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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입니다만, 문제라도? 11 - L Books
바바 오키나 지음, 키류 츠카사 그림, 김성래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9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급 스포일러, 개인적인 해석 주의
11권은 용사 '율리우스'의 이야기입니다. 이 캐릭터는 여주인공(거미녀)의 반 친구 중 '슌'의 형으로서 순수한 이세계인이죠. '슌'은 필자가 남자 주인공이 있으면 딱 맞을 거라고 표현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의 형인 율리우스는 그동안 사이드 스토리 S에서 등장하여 대미궁에서 여주와 싸우기도 했고, 여주가 지상에 출몰했을 때 만나기도 했었죠. 여느 작품이라면 이렇게 인연을 맺어 가다가 친구가 되거나 연인 사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장밋빛 미래를 그려볼 만도 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얄궂게도 인마 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뒤 율리우스는 운명을 달리해야 했었죠. 11권은 그의 과거를 그립니다. 용사 율리우스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마음으로 용사의 길을 걷고 있는지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죠.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이 될 수 있다는 용사라는 무게, 용사라는 이름이 가지는 중책.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어디든 달려가고, 자신의 미래를 예견이라도 한 듯 사랑을 포기하는 장면들은 가슴을 아프게 하죠. 성선설 기반으로 한 발암 용사가 아닌, 판타지의 정석 용사를 그대로 체현해 놓은 율리우스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그의 11살일 때부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 시기는 세계적으로 엘프에 의해 한창 유괴 사건이 끊이질 않던 때죠. 이걸 해결하기 위해 용사를 중심으로 각국에서 인원이 차출되어 모입니다. 하지만 율리우스는 고작 11살, 아무리 신(神)이 점지한 용사라도 역전의 맹장들에게 그는 풋내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영웅담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죠. 허수아비 지휘관이 지금의 용사 율리우스의 입장입니다. 현실로 빗대어 보자면 군(軍)에서 막 부임한 초임 소위의 위치라고 할까요. 능력은 되지만 신뢰는 못 받고 있죠. 율리우스는 어떻게 해야 병사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유괴 조직을 추적하면서 올곧게 사람들을 구하려 하고, 구하지 못할 때는 마음 아파하는 등 참으로 인간미 넘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힘들고 괄시 받아도 꺾이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신뢰를 얻어 가죠. 한 가지 다행인 것은 그는 혼자가 아닌 성녀와 동료들이 있고, 그를 지지해 주는 부관이 있다는 것이 위안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의 나이 22살, 여주(거미녀)와 마왕은 이세계를 구하려 인마 대전을 일으키고, 율리우스는 참전합니다.
만약 여주(거미녀)가 자신들이 하려는 일을 용사에게 털어놨다면 미래는 다르게 흘러갔을까 하는 궁금증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바탕엔 이세계 사람들 절반 이상을 희생 시켜야 한다는 전재가 깔려 있는지라 한 명이라도 구하려는 용사는 분명 거부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을 테죠. 결국 섞일 수 없는 물과 기름인 게 마왕과 용사. 자세한 건 핵심 스포일러라 언급은 힘들지만, 이세계는 마모되어가는 톱니바퀴와 같습니다. 이대로는 멀지 않은 미래에 분명 궤도를 이탈하여 붕괴하고 말 것입니다. 여주는 마왕 따라 어느 유적지에서 봉인된 여신(10권 리뷰 참조)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여주는 이세계의 기반이 되는 시스템(스킬, 능력치)이 어떻게 운용되는지를 보았죠. 죄악을 저지른 인간들은 자신들을 대신해 그 감당을 여성 한 사람에게 짊어지우고 태평하게 살아가는 세상. 그래서 여주는 용사 율리우스를 치우려 했겠죠. 마왕과 싸우게 하면 분명 마왕은 질 테니까요. 마왕이 지면 이세계는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걸 듣고 율리우스는 미래를 여주에게 맡기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맺으며: 12권이든 13권이든 다시 한번 여주와 율리우스가 만나는 장면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느낌이 든 11권이었습니다. 중2병식 진행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가슴 아픈 장면을 연출해 주지 않을까 싶군요. 12권을 구매해뒀으니 리뷰 끝나는 데로 바로 읽어 보아야겠습니다. 그만큼 이번 11권에서 용사 율리우스가 보여주었던 선한 마음은 참으로 구구절절했군요. 하지만 여주와 마왕이 아직 어린 율리우스와 조우했으면서도 바로 치우지 않고 훗날로 미룬 점에서 의외로 무덤덤하게 끝나 버릴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여주와 마왕이 하려는 일과 연관이 있고, 용사가 가진 큰 힘은 보탬이 될 테니까요. 핵심 스포일러와 연결되어서 자세히 언급은 힘듭니다만. 요컨대 용사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운명이라는 것. 몇 권인지는 까먹었는데, 인마 대전이 일어나고 여주가 용사를 치웠을 때 악당의 길로 가기로 했나 하는 생각을 가졌었습니다만, 지금에서 보면 이세계를 구하려면 어쩔 수 없겠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이 작품은 퍼즐을 흩트려 놓고 조금씩 맞춰가는 방식이다 보니 그때그때 느낌을 다르게 해서 좋게 말하면 흥미가 돋고, 나쁘게 말하면 머리 아프게 하는 게 특징입니다. 아무튼 학교에 입학한 흡혈녀 소피아의 히스테릭이 더 심해졌다는 것과 그 반동인지 나쁜 짓을 저지르다 여주에게 된통 혼나는 소소한 재미를 가미해두었군요. 마지막으로 이번 11권은 여주와 마왕이 군대를 이끌고 엘프 진영으로 쳐들어가는 인마 대전 직전까지 다루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