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제가 죽거들랑 새 장가 들지 마셔요!"
여인은 죽음에 임박하여 남편에게 부탁을 했어요. 새 부인이 들어오면 자신이 낳은 친자식과 갈등을 일으키리라 염려했기 때문이죠. 듣는 남편 입장에선 서운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한 가정의 비극을 사전에 예방한다는 차원에선 매우 현명한 부탁이었어요. 의붓 어머니와 배다른 자식간의 갈등은 오랜 역사를 통해 입증된(?) 갈등이니까요.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부탁을 저버리고 새 장가를 들었어요. 이후 이 가정엔 여인이 예견했던 갈등이 발생했어요. 특이한 것은 쌍방간 갈등이 아니란 점이었어요. 의붓 어머니가 배다른 자식을 일방적으로 구박했거든요. 그것도 거의 막무가내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다른 자식은 의붓 어머니에게 자식으로의 소임을 다하려 무진 애를 썼고, 끝내는 의붓 어머니를 감동시켜 회심하게 만들었어요. 배다른 자식은 단명했는데(48세), 여기엔 의붓 어머니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도 한 몫 했다고 보여요. 어쩌면 여인이 예견했던 비극은 자식의 의붓 어머니와의 갈등보다 그로 인한 자식의 단명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자식의 품성을 부모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이 여인과 자식은 누굴까요? 네, 그래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예요. (널리 알려진 이야기라 잘 아실 것 같아요. ^ ^)
사진은 신사임당의 글씨예요. 정갈하면서도 담대함을 보여주는 글씨예요. 초서체임에도 획이 깔끔하고 분명하며 획간 폭이 넓직해요. 일부러 이렇게 쓴 걸까요? 아닐 거예요. 평소의 자품(資品)이 이렇게 쓰도록 만들었을 거예요. 하여 '글씨는 곧 그 사람[書如其人]'이란 말을 하는 거죠. 신사임당의 유언도 이 글씨에서 보이는 면모와 무관해 보이지 않아요.
사진의 한자를 읽어 볼까요?
강남우초헐(江南雨初歇) 강강/ 남녘 남/ 비 우/ 처음 초/ 그칠 헐
산암운유습(山暗雲猶濕) 뫼 산/ 어두울 암/ 구름 운/ 오히려 유/ 축축할 습
미가동귀요(未可動歸橈) 아닐 미/ 가할 가/ 움직일 동/ 돌아갈 귀/ 노 요
전계풍정급(前溪風正急) 앞 전/ 시내 계/ 바람 풍/ 바를 정/ 급할 급
해석을 해볼까요?
비 개인 강남/ 산은 어둑하고 구름엔 아직도 습기 / 배를 돌리지 못하는데/ 앞 시내에선 다급한 바람까지
이 시는 부사를 절묘하게 사용하여 시의 완성도를 높였어요. 각 구에 사용된 초(初), 유(猶), 미(未), 정(正)은 일련의 상황 변화를 부가적 설명없이 잘 전달하고 있어요. 초는 최초의 상황, 유는 상황의 지속, 미는 상황의 변화 모색, 정은 변화 모색의 좌절을 나타내고 있어요. 표면적으론 서경시처럼 보이지만 꼼꼼히 읽어보면 서경을 빙자한 서정시로 읽혀요. 한시에서 비나 구름 바람 등은 정치적 상황을 암시하는 시어들이거든요. 이렇게 보면 첫 구의 비가 개었다는 것은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이 다소 진정되었다는 의미로, 둘째 구의 어두운 산 기운과 축축한 구름은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의 여파가 아직 잔존한다는 의미로, 세째 구의 배를 쉽사리 돌리지 못한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 모색이 쉽지 않다는 의미로, 네째 구의 세찬 바람이 불어 온다는 것은 또 다시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이 야기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어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시의 마지막 구는 본래 '전계풍정급(前溪風正急)'이 아니고 '전정풍랑급(前程風浪急, 앞 길에 풍랑이 급하네)'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정(程)이 계(溪)로, 랑(浪)이 정(正)으로 바뀌어 전해졌다고 해요. 아마도 부사의 사용을 전체 시에 일관되게 적용하고 육로에 사용되는 시어보다는 수로에 사용되는 시어를 사용하는 것이 시의 완성도를 높인다고 생각하여 바꾼 것이 아닐까 싶어요. 화룡점정의 묘를 잘 살린 것 같아요. 개작자가 누군지는 알려져 있지 않아요(원작자는 당(唐)의 대숙륜(戴叔倫)이에요).
위 시에 등장한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初는 衤(衣의 변형, 옷 의)와 刀(칼 도)의 합자예요. 옷감을 재단하기 위해 칼을 처음 옷감에 댔다는 의미예요. 처음 초. 初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最初(최초), 始初(시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歇은 欠(하품 흠)과 曷(그칠 갈)의 합자예요. 힘들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한숨을 내쉰다는 의미예요. 쉴 헐. 歇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間歇(간헐), 歇坐(헐좌, 휴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濕은 물 이름이에요. 산동성 우성 지점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흘러가는 물이에요. 氵(물 수)로 의미를 표현했고,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물이름 습. '축축하다'란 의미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축축할 습. 濕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濕氣(습기), 多濕(다습)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橈는 木(나무 목)과 堯(높을 요)의 합자예요. 구부러진 나무란 의미예요. 木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堯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구부러진 나무는 대개 키가 커서 위로 더 올라갈 수 없기에 구부러진 것이란 의미로요. 휠 뇨. '노'라는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나무를 변형시켜[구부려] 만든 것이 '노'란 의미로요. 노 요. 橈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橈橈(요요, 휘는 모양), 橈敗(요패, 기세를 꺾어 패하게 함, 또는 기세가 꺾여 패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急은 心(마음 심)과 及(미칠 급)의 합자예요. 급하다는 의미예요. 心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急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及은 후미에서 앞으로 '다급하게' 이르렀다란 의미거든요. 급할 급. 急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促急(촉급), 應急(응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정리 문제를 풀어 볼까요?
1. 다음의 한자를 허벅지에 열심히 연습하시오.
初 처음 초 歇 쉴 헐 濕 축축할 습 橈 노 요 急 급할 급
2. ( )안에 들어갈 알맞은 한자를 손바닥에 써 보시오.
( )敗 應( ) 最( ) 間( ) ( )氣
3. 다음을 읽고 풀이해 보시오.
江南雨初歇/ 山暗雲猶濕/ 未可動歸橈/ 前溪風正急
사진의 시를 읽다보면 왠지 지금의 정치적 상황과 전망을 보는 것 같아 섬찟한 느낌이 들어요.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정치를 모색하려 하는데 정작 대통령으로 이상한(?) 사람이 당선될 것 같아서 말이지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주는 격'이 되는데... (부디 이런 염려가 기우에 그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