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친불여근린(遠親不如近隣), 먼 곳의 친척이 가까운 이웃만 못하다. 피부에 와 닿을 때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이죠. 문화도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요. 먼 곳의 문화보다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의 문화가 더 핍진하게 다가오잖아요? 그런데 그 핍진하게 다가오는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의외로 많은 것 같아요. 정작 파랑새는 가까운 곳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말이지요.
사진은 전남 장흥의 유학자 잠계(潛溪) 백형기(白亨璣, 1881-1948) 선생의 시예요. 장흥에서는 치인 이봉준이란 분이 2009년부터 이곳의 역대 유림들 시문을 작품화하여 전시회를 갖고 있는데 이번(2017)에는 19세기와 20세기를 살다간 유림들의 시문을 작품화하여 전시회를 열었다고 해요(관련 기사 및 사진 출처: http://www.asiae.co.kr/news/print.htm?idxno=2017072414324829763&udt=1 ). 이런 전시회를 기획한 지방 자치 단체나 서예가의 의도가 무척 신선하게 느껴지더군요. 서예 전시회 하면 으레히 한국과 중국의 유명 문인 시문만 작품화하기 마련인데 지역 문인들의 작품만 그것도 특정 시기를 살았던 문인의 시문을 작품화 한 것은 서예 전시회의 관습적 구태를 벗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예요. 전시회를 관람할 주 관람객은 장흥 지역 주민들일텐데, 이 전시회를 관람하는 관람객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사는 지역의 문화적 유산에 대해 큰 애정과 자부심을 느낄 것 같아요. 이런 점도 이 전시회가 신선한 느낌을 주는 또 한가지 요인인 것 같아요.
시를 한 번 읽어 볼까요?
난생매영(欄生梅影) 난간에 매화 그림자 어리다
난생매영자(欄生梅影子) 난간에 매화 그림자 어리고
정산죽정신(庭散竹精神) 뜰엔 대나무 신기(神氣) 어려라
미각삼경만(未覺三更晩) 밤 깊은 줄 모르고
무서상고인(撫書想古人) 책장 넘기며 옛사람을 생각타
시제(詩題) 초당명월(草堂明月) 시 제목 초당에 뜬 밝은 달
잠계선생시(潛溪先生詩) 을미 춘절(乙未 春節) 이치인(李痴人) 근서(謹書) 잠계선생의 시 을미년(2015) 봄날에 치인 이봉준 삼가 쓰다.
이 시에서 핵심은 '옛사람을 생각함'이에요. 시인은 옛사람의 어떤 면모를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 내용은 1, 2구에 나타나 있어요. 이른바 탁물우의(託物寓意, 사물을 빌어 마음을 표현함)로 그 마음을 표현했지요. 1, 2구에 등장하는 사물은 매화와 대나무예요. 매화와 대나무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사군자(四君子)중 하나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죠. 따라서 시인이 옛사람을 생각하며 배우고 따르고자 하는 것은 바로 '지조와 절개'라고 할 수 있어요. 그가 넘기는 책장도 이와 관련이 있는 내용일터이구요. 이 시는 옛사람의 지조와 절개를 사모하는 한 견결한 선비의 서늘한 내면 풍경을 그렸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번 전시회에 등장한(전시회는 이미 끝났어요) 시문들이 혹 모두 다 잠계 선생류의 시는 아닐까? 전시회의 대표작으로 보도 사진에 실린 시가 이 시라면 여타의 작품도 이런 시풍의 시일 가능성이 크다. 만일,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사실과 부합한다면(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번 전시회는 약간 빛바랜 느낌이 들어요. 왜냐하면 19세기와 20세기를 살다간 문인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시문이 아니기 때문이죠. 서예가 단순한 문자의 희롱(?)이 아닌 바에야 - 단순한 문자의 희롱이라면 그건 서예가 아니라 그림이죠 - 그것이 표현하는 내용도 매우 의미있어야 하죠. 19세기와 20세기를 살다간 문인들의 시문을 작품화 한다면 도학자연(道學者然)의 시문보다는 내우외환이 극심했던 19세기와 20세기를 걱정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시문들로 작품을 만들었어야 할 거예요. 만일 그런 시문이 없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요(그러나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유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우국충정의 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欄은 원래 闌으로 표기했어요. 이것으로 설명해 보도록 하죠. 闌은 門(문 문)과 柬(가릴 간)의 합자예요. 출입하는 사람들을 가리기 위해 문밖에 설치한 차단물이란 의미예요. 오늘날의 바리케이트 정도에 해당하는 것이죠. 난간이란 의미는 여기서 연역된 거예요. 난간은 출입을 선별하는 기능이 있잖아요? 후에 난간의 재료를 강조하는 뜻에서 木(나무 목)이 추가됐어요. 난간 란. 欄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欄干(난간), 欄外(난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影은 景(볕 경)과 彡(形의 약자, 형상 형)의 합자예요. 빛이 비치는 쪽에 드러나는 형상[그림자]이란 의미예요. 그림자 영. 影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陰影(음영), 影像(영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庭은 广(집 엄)과 廷(조정 정)의 합자예요. 본뜻은 중궁(中宮)이란 의미예요. 广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廷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중궁이 있는 곳은 조정처럼 넓고 평평한 곳이란 의미로요. 뜰이란 의미로도 많이 사용하는데(위 시에서는 이 의미로 사용했죠),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중궁이 있는 장소처럼 넓고 평평한 장소가 바로 뜰이란 의미로요. 뜰 정. 庭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庭園(정원), 校庭(교정)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神은 示(神의 약자, 귀신 신)과 申(번개 신)의 합자예요. 번개처럼 위력적이며 그 상태를 예측하기 어려운 존재란 의미예요. 示로 주 의미를 나타냈고, 申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했어요. 귀신 신. 神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神靈(신령), 神殿(신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覺은 見(볼 견)과 學의 약자가 합쳐진 거예요. 學은 깨닫다의 의미가 내포돼 있어요. 본래 잠에서 깨어 사물을 인지하다[見]란 의미예요. 후에 의미가 확장되어 무지몽매한 상태를 벗어나다란 의미로 사용하게 됐어요. 지금은 주로 이 의미로 사용하죠. 깨달을 각. 覺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覺醒(각성), 觸覺(촉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撫는 扌(手의 변형, 손 수)와 無(없을 무)의 합자예요. 無에는 더없이 풍부하다란 의미가 내포돼 있어요. 부지(扶持)하여 편안하게 해주다란 뜻이에요. 扌로 뜻을 표현했어요. 無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상대를 부지해 편안하게 하려면 상대를 배려하는 중후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요. 어루만질 무. 撫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慰撫(위무), 愛撫(애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潛은 '물속에 잠겨 있다, 물속으로 들어가 이동하다'란 의미예요. 氵(水의 변형, 물 수)로 그 의미를 표현했고,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잠길 잠. 潛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潛水(잠수), 潛在(잠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痴는 疒(병 력)과 知(알 지)의 합자예요. 인지(認知)에 문제가 있다란 의미예요. 어리석을 치. 痴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白痴(백치), 痴者多笑(치자다소, 어리석은 자는 웃음이 많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謹은 言(말씀언)과 菫(진흙 근)의 합자예요. 입자가 고운 진흙처럼 언행을 삼가하고 조심한다란 의미예요. 삼갈 근. 謹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謹身(근신), 謹弔(근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위에서 작품 전시 내용의 미흡한 점 - 추측에 의한 것이라 오해의 소지가 많은 - 을 들었지만 지역 문인의 시문을 지속적으로 작품화하여 전시하는 기획은 다른 지방 단치 단체나 서예가들이 많은 본받아야 할 사례인 것 같아요. 지역의 축제와 더불어 이런 서예 전시회를 병행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담 둘. 사진의 한자들을 읽는데 무척 힘들었어요. ㅠㅠ 갑골문과 전서 행서 등을 뒤섞어 써놓아 저같이 해서체나 겨우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겐 꽤나 곤혼스러운 일이더군요. 네이버 지식IN의 도움도 받았지만 그 도움도 흔쾌한 도움은 못되었어요. 답해주신 분도 자신감있게 읽질 못하셨거든요. 요는 위 사진의 내용을 해서로 옮긴 것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ㅠㅠ 혹 오류를 발견하시면 질책하지 마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적만 해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