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부주의자이면서 어떻게 나라를 위해 그것도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나설 수가 있는가?”
“사랑한다는 건 자아의 확대입니다. 나는 박열을 사랑했고 박열은 조선을 사랑했어요. 그래서 나는 조선을 사랑했고 조선독립을 위해 나선 것입니다.”
영화 ‘박열’ 보셨는지요? 많은 이들에게 잊혀졌던 한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의 삶을 조명한 영화로 올 여름 극장가 화제작 중의 하나였죠. ‘군함도’가 사실 이외의 불필요한(?) 장면 설정으로 논란이 된데 반해 ‘박열’은 사실에 충실한 영화로 호평을 받았죠. 관객 동원에서는 ‘군함도’가 앞섰지만 영화의 깊이에서는 ‘박열’이 앞섰던 것 같아요.
영화 ‘박열’의 주인공은 당연히 박열이지만 박열 못지않은 비중으로 다뤄진 인물이 그의 일본인 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였죠. 영화에서 가네코는 박열 못지않은 투철한 아나키스트이며,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당찬 여인으로 그려지죠. 위의 인용문은 가네코가 실제 재판정에서 판사와 나눈 말인데 그녀의 당찬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말이에요.
사진은 영화에서 가네코가 박열과 함께 형무소에서 찍은 사진 일부예요(실제로도 두 사람은 형무소에서 영화 장면과 똑같은 사진을 찍었어요). 이 사진은 결혼 기념 사진이었어요(감옥에 오기 전 두사람은 동거 상태였는데 재판이후 대역죄로 사형이 확정될 게 분명했기에 정식 부부가 되기로 합의하죠).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아나키스트답게 전형적인 결혼 기념 사진을 안찍고 파격적인 사진을 찍었다는 점이에요. 위 사진에는 안나오지만 원사진을 보면 박열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한 손은 탁자에 올려 턱을 괴고 또 한 손으론 가네코를 안고 있어요. 놀라운 것은 가네코를 안은 손이 그녀의 가슴에 올려져 있다는 점이죠. 가네코 또한 박열의 손을 개의치 않고 박열에게 비스듬히 기대어 책을 읽는 포즈를 취하죠. 도무지 결혼 기념 사진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장면이죠. 두 사람은 아나키스트답게 결혼기념 사진에서도 기존의 틀을 벗어나려 투쟁했던 셈이에요. 그런 투쟁의 성과였을까요? 후일 이 사진은 언론에 공개되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끝내 내각이 해체되는 결과까지 가져오죠(물의의 주원인은 대역죄인에게 그것도 형무소에서 결혼 기념 사진을 찍게 했다는 점이었지만, 여기에는 두 사람의 오만한 포즈도 한 몫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사진에서 가네코가 들고 있는 책 이름은 ‘신지지(新地誌)’예요. '새 지리 책' 정도의 의미예요. 이게 실제 가네코가 들었던 책인지 그저 영화 촬영시 소품으로 사용된 것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그러나 실제이든 우발적 소품이든 가네코가 든 책은 가네코와 잘 어울려요. 가네코가 걸었던 아나키스트의 삶은 매우 새로운 삶이었죠. 일본인으로서 천황제를 반대하고 조선 독립을 지원하며 여성의 독자성을 주장한 것은 새로움을 넘어 혁명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어요. 신지지 역시 과거의 지리책을 탈각해 새롭게 만든 지리책이라고 할 수 있으니 가네코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소품이죠. 그렇지 않나요? ^ ^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新은 斤(도끼 근)과 木(나무 목)과 立(辛의 약자)의 합자예요. 나무를 베어 땔감을 장만했다는 의미예요. 斤과 木으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立은 음을 담당해요. '새롭다'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새 땔감을 장만했다는 의미로요. 땔감 신. 새 신. 新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新舊(신구), 新聞(신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地는 土(흙 토)와 也(蛇의 옛 글자, 뱀 사)의 합자예요. 대지라는 뜻이에요. 土로 뜻을 표현했어요. 也는 음을 담당하면서(사→지)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원래 대지에는 파충류들이 많았다는 의미로요. 땅 지. 地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地帶(지대), 天地(천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誌는 言(말씀 언)과 志(뜻 지)의 합자예요. 기억한다는 의미예요. 잘 듣고 말을 해봐야 기억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로 言을 의미 부분으로 삼았어요. 志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기억하려는 대상에 전일(專一)하게 뜻을 모아야 기억이 잘 된다는 의미로요. 기록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잘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는 의미로요. 기록할 지. 誌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日誌(일지), 雜誌(잡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지지의 사전적 정의는 “특정 지역에 초점을 두고 그것을 둘러싼 자연 인문 현상의 배열과 결합을 통한 모든 관계를 밝혀 지역의 개성을 체계적으로 설명 기술한 것"이에요.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전통 지지로는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이 있죠. 수록된 항목들을 보면 '건치연혁 - 관원 - 군명 - 성씨 - 풍속 - 형승 - 산천 - 토산 - 성곽 - 봉수 - 학교 - 누정 - 궁실 - 역원 - 교량 - 불우 - 사묘 - 명환 - 인물 - 제영' 등 이에요. 근대이후 서구의 지리학 영향을 받아 지지 편찬 등에 변화가 오는데 오횡목의 '여재촬요(輿載撮要, 1870)에는 태양과 지구의 운행에 관한 천문학과 지구 전도 및 대륙별 지지등이 실려 있어요. 이런 경향의 지리서를 '신지지'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이상 daum 백과사전 참조).
여담 둘. 영화 '박열'의 가네코 역을 맡은 최희서는 얼굴이 너무 따뜻하더군요. 연기 자체는 흠잡을데 없이 좋았지만 인물 자체는 가네코와 좀 거리감이 있지 않나 싶어요. 가네코의 사진들을 보면 매우 차가우면서 히스테릭하게 생겼는데 실제 성격도 그런 일면이 있었다고 해요. 재판을 맡았던 판사에 의하면 "반항적이고 열광적이며 눈물이 많고, 때로 무서울 정도로 히스테릭했다"고 하거든요. 좀 더 차가운 얼굴의 연기자가 가네코 역을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