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0. 대한민국 99. 2017.
시간에는 금[선]이 그어져 있지 않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금을 긋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아마도 '의미'부여와 상관이 있지 않나 싶어요. ‘새로운 출발’ 이 그 대표적인 의미 부여겠죠. 연호를 쓰는 것도 비슷할 것 같아요. 그리고 여기에는 '새로운 출발'에 보태어 ‘문화의 지배’라는 강력한 의미가 포함될 듯 싶어요. 연호 사용은 문화 권력과 깊은 상관 관계를 가지니까요.
현재 우리는 서기(西紀)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있죠. 서기라는 것은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하는 서구의 문화적 잣대로 만든 연호이죠. 이것을 차용해 쓰고 있다는 것은 서구 기독교 문화를 수용하고 이의 지배를(?) 용인한다는 의미라고 할 거예요. 과거 우리는 중국의 연호를 사용했죠. 이 역시 중국의 문화를 수용하고 이의 지배를 용인한다는 의미였다고 하겠죠.
사진은 '황명 홍치 사년 신해 조(皇明 弘治 四年 辛亥 造)'라고 읽어요. '효종 황제께서 계시는 명나라 홍치년 네 해째 간지로 신해년에 (성을) 축조하다'란 뜻이에요. 서산 해미읍성에 새겨진 문구로, 이 성의 축조 시기를 말해주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황명'까지는 그렇다 쳐도 '홍치 사년 신해'라는 시간은, 요즘 우리에게는,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 시간 개념이에요. 옛 분들에게는 실감나게 와닿았겠지만요. 왜 그럴까요? 우리가 그만큼 서기에 익숙하고 과거의 연호에 낯설기 때문이겠죠. 홍치 4년은 1491년이에요. 조선이 1392년에 건국됐으니 선초(鮮初)가 조금 지난 시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연산군(재위1487-1505) 초기예요. 연호의 시기를 서기로 바꾸니 그렇지 않을 때와 시간 체감에 있어 확실히 차이가 있죠?
현대가 서구 기독교 문명이 지배하는 시대라는 것은 동양의 맹주에 해당하는 중국도 서기를 쓰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어요. 북한이나 일본 대만 등이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고 있지만 서기를 병기하고 있는 상황이니, 독자적 연호를 쓰는 것 자체는 가상하다 하겠으나 그게 그렇게 큰 의미를 지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우리도 해방 후 한 때 ‘민국00년’, ‘단기’ 등의 연호를 쓴 적이 있지만 5.16 군사정변(1961)이후 서기로 바꾸었죠. 이에 대해 부정적 견해가 없는바 아니지만, 북한이나 일본 대만 등에 비해 자존감 없는 일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중요한 것은 연호를 사용하는 이면의 내실을 다지는 거겠지요(과거에 우리가 중국의 연호를 쓴 것은 사대의 의미도 있었지만 실제는 불필요한 중국과의 마찰을 줄이고 우리의 내실을 기하고자 함도 있었어요). 막말로 올 해를 2017년으로 표기하든 단기 4350년으로 표기하든 대한민국 99년으로 표기하든 그 자체야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 해에 우리가 ‘촛불 혁명’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의미있죠. 그렇지 않은가요?
첫머리에 내놓았던 숫자의 의미는 파악하셨는지요? 네, 그래요. ^ ^ 맨 앞은 올 해의 단기이고, 두 번째는 임정 수립을 기점으로 한 올해의 연도이며, 마지막은 올 해의 서기 연도예요.
세 자만 좀 자세히 살펴볼까요?
皇은 두 가지로 설명해요. 하나는 면류관을 쓰고 옥좌에 단정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는 설이고, 또 하나는 白(自의 변형, 부터 자)과 王(임금 왕)의 합자로 처음으로 임금 노릇을 한 위대한 자라는 뜻으로 보는 설이에요. 임금 황, 皇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皇帝(황제), 皇上(황상)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弘은 弓(활 궁)과 厶(肱(팔뚝 굉)의 약자)의 합자예요. 화살을 쏜 후 활줄에서 나는 소리라는 뜻이에요. 弓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厶는 음을 담당해요(굉→홍). 후에 넓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게 됐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예요. 활시위 소리가 넓게 퍼져 나간다란 의미로요. 넓을 홍. 弘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弘益(홍익), 弘報(홍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造는 辶(걸을 착)과 告(고할 고)의 합자예요. 성취하다란 뜻이에요. 辶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告는 음을 담당하면서(고→조)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남에게 알리는 것은 성취가 있은 다음에 알린다란 의미로요. '짓다'란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성취하다의 의미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성취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짓는 것이니까요. 지을 조. 造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創造(창조), 造成(조성)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해미읍성은 이순신 장군이 군관 시절에 근무했던 곳이에요. 서산시는 이 점을 부가시켜 해미읍성을 정비하며 활터를 마련했는데, 이곳에 이순신 장군의 미니어처를 설치해 놓았더군요. 문제는 장군이 당시에 해미읍성을 다스리던 우두머리인 양 미니어처를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에요. 장군은 일개 군관에 불과했는데 말이지요. 고치면 좋지 않을까 싶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