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꿈은 재벌 2세 였어요."
갓 직장에 들어온 어린(?) 동료 한 사람이 잡담중에 한 말이에요. 듣던 동료들이 모두 웃었지만 왠지 뒷 맛이 개운치 않더군요. 왜 일까, 곰곰 생각해 보았어요.
매슬로우(Abraham Maslow, 1908-1970)의 욕구 5단계설이란게 있죠. 생리적 욕구, 안전과 인정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자기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저층의 욕구 부터 상층의 욕구까지는 위계를 지니며 각 단계의 욕구가 충족될 때 그 다음 단계의 욕구를 갈망하게 된다고 하죠. 사람의 욕구가 꼭 이런 위계를 밟아 진행되느냐는 비판도 있지만, 대체로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그런대로 타당성이 있는 이론이란 생각이 들어요. 먹고 살기 바쁜 사람이 언제 자아실현의 욕구를 갖겠어요?
사진은 '무량수유대복(無量壽有大福)'이라고 읽어요. '한량없는 장수와 큰 복의 소유' 혹은 '한없이 오래 살고 큰 복을 소유하라'라고 풀이할 수 있어요. 선친의 글씨예요 ^ ^;; 큰 누님댁에 있는 휘호인데, 이번 여름에 누님 댁을 방문했다 찍어 왔어요. 기억하기론 누님이 오래 전에 지금사는 집을 새로 짓고 입주했을 때 선친께서 기념으로 써주셨던 것 같아요. 으레이 입주때 써 줄만한 평범한(?) 문구예요.
'한량없는 장수와 큰 복의 소유'는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로 보면 생리적 욕구 그리고 안전과 인정의 욕구 충족에 해당될 듯 싶어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생리적인 것과 관계 깊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것은 안전이나 인정과 관계 깊으니까요. 저희 누님은 아버지의 이런 휘호 덕분(?)인지 건강하게 오래(?) 살아 계시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세요. 다만 매형이 좀 아프신게 흠일 뿐이죠.
누님은 해방(1945) 끝머리에 태어나 초등학교 밖에 졸업 못하고 일찍부터 경제전선에 뛰어들어 힘겹게 지내셨어요. 그러나 타고난 낙천적 성격과 사교성 그리고 이재술(理財術)과 베풀줄 아는 마음 그리고 여기에 미용 기술까지 익혀 경제적 풍요를 이뤘어요. 홀시아버님도 정성껏 모셨고 세 아들도 결혼에 집 마련까지 다 해줬고 이따금 친정이나 형제들이 어려울 때도 적잖은 도움을 줬지요. 4년 전부터 매형께서 파킨슨 병으로 몸져 누워계시지만 여전히 낙천적으로 생활하고 계시죠. 미용실을 운영하시면서요. 누님의 연세는 70이 넘었어요.
제가 보기에 누님은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설로 볼 때 4단계(자기 존중의 욕구)까지는 충족하시지 않았나 싶어요. 누님은 가족은 물론 주변인들과도 사이가 좋고 칭송도 많이 듣고 계시거든요. 그런데 5단계(자아 실현의 욕구)는 달성하기 어려우시지 않을까 싶어요. 아니, 그런 욕구가 있으시기나 한가 모르겠어요. 가족의 삶과 자신의 삶을 일체화시켜 온 것이, 제가 보기에, 누님의 삶이었기 때문이죠. 누님의 삶에서 시아버지, 자식, 남편, 친정 식구를 빼면 남는 것이 없거든요. 지금도 돈을 버는 누님은 "돈을 만지니 좋아!" 하면서 자신이 베풀 기회가 오면 넉넉하게 베풀고 계세요. 어쩌면 누님은 이런 것이 자신의 '자아 실현'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누님이라고 왜 '자아 실현의 욕구'가 없을까요? 다만 저를 포함해 가족이나 주변인들이 그런 것을 묻지도 않고 본인도 생각해 볼 겨를이 없거나 생각하려 하지 않았을 뿐 이겠지요. 그런 것은, 누님이 살아온 세대에게는, 사치였을 테니까요.
누님이 그토록 자신을 희생시켜 가며 2세를 키운 것은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말라는 기대였을 거예요. 자아실현의 삶을 살라고 말이죠. 그런데 2세는 과연 그런 삶을 살고 있을까요?
조카들을 보니, 제가 보기엔, 여전히 그런 삶과는 거리가 있어 보여요. 더 큰 아파트, 더 많은 돈을 원하고 있거든요. 이것을 자아실현이라고 보기는 좀 그렇잖아요? 위에서 어린 직장 동료의 말 - 제 꿈은 재벌 2세 였어요 - 을 듣고 개운치 않다고 했는데, 그 이유를 알았어요. 부모의 희생(?)으로 성장한 세대가 더 나아진게 아니라 오히려 퇴보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사회 문제인 것 같아요. 우선 떠오르는 것은 욕망의 과다와 부인부빈익빈의 사회구조예요. 누님 세대가 키운 2세들은 만족할만 한 경제 상황임에도 상대적 빈곤감으로 과도한 욕망을 품고 계속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고 있죠. 이와는 또 반대로 사회 구조가 불평등하여 풍요 속에서도 절대 빈곤이 늘어나고 있구요. 이외에도 다양한 요인들이 있을 거예요. 인간다운 삶이 정착된 행복한 나라, 여전히 힘든 숙제인 듯 싶어요. 2세들의 과제도 누님 세대가 해결해야 했던 과제 만큼이나 녹록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자를 두어 자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할까요?
量은 重(무거울 중)의 약자와 曏(향할 향, 向과 통용) 약자의 합자예요. 경중을 헤아린다는 뜻이에요. 重으로 뜻을 표현했지요. 曏 약자는 음을 담당해요. 헤아릴 량. 量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度量(도량), 測量(측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壽는 老(늙을 로)의 약자와 음을 담당하는 나머지 글자로 구성됐어요. 오래 되었다란 뜻이에요. 老로 뜻을 표현했어요. '목숨'이란 뜻으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오래 된 것중 가장 의미있는 것이 목숨이란 의미로요. 목숨 수. 壽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長壽(장수), 壽命(수명)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福은 示(神의 약자, 귀신 신)과 畐(가득할 복)의 합자예요. 신이 상서로운 일로 인간을 도와준다는 의미예요. 의미를 줄여 복'으로 사용해요. 示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畐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인간을 만족시켜 주는 일이 바로 '복'이란 의미로요. 복 복. 福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禍福(화복), 福券(복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무량수유대복, 좋은 내용이지만 이제는 이를 넘어서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런, 선친께서 (하늘 나라에서) 기분이 언짢으실 듯. "감히 애비의 말에 토를 달어!" 죄송합니다, 아버지.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