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오래 전, 문득 떠오른 말이에요. 괜찮은 말인것 같아 친구에게 이 말을 했더니, 돌직구를 던지더군요. "아닌 것 같은데? 별똥별은 제자리를 벗어나기에 더 아름답잖아?" 당시 뭐라고 응수했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지금 응수를 한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아요. "별똥별의 이탈은 그것 자체가 별똥별의 제자리 아닐까? 그래서 아름다운 것 아닐까?" 너무 억지일까요? ^ ^
아포리즘은, 제 경험으로 보면, 일종의 초월이나 비상에서 나온 말이 아닐까 싶어요. 알게 모르게 오랫동안 곰삭혀 생각했던 것들이 임계점을 넘어섰을 때 나온 것 아닌가 싶은거죠. 그렇기에 아포리즘은 적실(的實, 실상에 잘 들어맞음)한 경우가 많죠(제 경우는 빼고요. ^ ^)
사진은 "욕지미래 선찰이연(欲知未來 先察已然)"이라고 읽어요. "미래를 알고자 한다면 먼저 이미 그러한 것[과거]을 살펴보라"는 뜻이에요. 『명심보감』「성심」편에 나오는 아포리즘이에요. 아마도 이 말을 한 이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오랫동안 자신의 내부에서 곰삭혀 왔다가 토설했을 거예요. 그러나 이 말은 본래 아포리즘이 아니라 전후에 어떤 말이 있는데 『명심보감』의 저자가 전후 맥락을 자르고 해당 부분만 인용했을 수도 있어요. 그렇긴해도 이 말을 접하는 사람은 저간의 사정을 알 수 없으니, 결국은 이도 아포리즘이 되는 셈이에요.
이 아포리즘은 일반적으로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도의 의미로 이해될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이해의 배후엔 '성공적인 미래'가 상정되어 있는 것 같구요. 그런데 이 아포리즘엔 '성공적인 미래'가 상정되어 있지 않아요. 그저 냉정히(?) 말하고 있을 뿐이죠. 미래를 알고자 하는가? 과거를 살펴보라!
그렇다면 냉정한 이 아포리즘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미래의 성공과 실패를 알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과거의 성공과 실패를 살펴보라. 상황이 유사한데 과거에 성공했다면 미래에도 성공할 것이다. 상황이 유사한데 과거에 실패했다면 미래에도 실패할 것이다." 성공이나 실패는 학습되는 것이기에 과거에 성공한 일은, 유사한 경우, 미래에도 성공할 가능성이 크고, 과거에 실패한 일은, 유사한 경우, 미래에도 실패할 가능성이 크죠. 이는 개인이나 집단 모두에 적용될 듯 싶어요. 과거의 예를 하나만 들어볼까요? 은나라 마지막 임금 주(紂)때 그의 폭정을 만류하던 신하들이 입에 침이 마르고 닳도록 경계한 말이 '은나라의 전대인 하(夏)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桀)을 생각하라!'는 것이었죠. 그러나 결국 주(紂)는 은나라를 망치고 말았어요. 유사한 경우, 전대의 실패는 후대에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사례지요. '욕지미래 선찰이연'은 성공과 실패는 유사하게 재현된다는 것을 냉정하게 알려주는 아포리즘이지 결코 '성공적 미래'를 도와주기 위한 따뜻한 아포리즘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欲은 欠(빠질 결)과 谷(골짜기 곡)의 합자예요. 채워지지 않은 욕구란 뜻이에요. 欠로 뜻을 표현했어요. 谷은 음을 담당하면서(곡→욕)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물이 쉽게 채워지지 않은 골짜기처럼 쉽게 채워지지 않는 욕구란 의미로요. 하고자할 욕. 欲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欲求(욕구), 欲望(욕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知는 矢(화살 시)와 口(입 구)의 합자예요. 화살처럼 대상에 대해 정확하고 예리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대상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알 지. 知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認知(인지), 知能(지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未는 본래 屮(싹날 철)이 중첩된 글자와 木(나무 목)이 합쳐진 모양이었어요. 오래된 나무에 잎사귀가 무성하다란 의미였지요. 지금은 본래 의미와는 따르게 '아니다'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죠. 동음을 빌미로 뜻을 가탁해 사용하다가 본래의 의미는 상실되고 가탁된 의미가 본의미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아닐 미. 未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未完(미완), 未久(미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來는 본래 보리를 그린 거예요. 그런데 보리는 춘궁기에 요긴한 곡식이었기에 신이 보내온 선물이라 여겨 '오다'란 뜻으로도 사용되다 이 뜻으로 굳어졌어요. 보리를 뜻하는 글자는 來에 夕을 더하여 麥(보리 맥)으로 표기하게 됐지요. 올 래. 來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本來(본래), 去來(거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先은 之(갈 지)의 변형(글자 상단 부분)과 人(사람 인)의 변형(글자 하단 부분)이 합져진 글자예요. 남들보다 앞서 간다란 의미예요. 먼저 선. 先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先頭(선두), 先後(선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察은 宀(집 면)과 祭(제사 제)의 합자예요. 높은 곳에서 살펴 본다란 의미예요. 宀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祭는 음을 담당하면서(제→찰)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제사지낼 때 매우 조심스런 태도를 가지듯이 그런 자세로 살핀다란 의미로요. 살필 찰. 察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觀察(관찰), 警察(경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已는 무릎 꿇은 사람의 모습을 그린 것이에요. 여기서 의미가 확장되어 '그치다' '이미' 등의 뜻이 나왔어요. 이미 이, 그칠 이. 已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已往(이왕), 已降(이강, 已後(이후)와 동일 의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然은 犬(개 견)과 月(肉의 변형, 고기 육)과 灬(火의 변형, 불 화)의 합자예요. 개고기로 번제(燔祭, 태워서 지내는 제사)를 올린다는 의미예요. 지금은 이 의미를 燃으로 표기하고, 然은 주로 '그러하다'란 뜻으로 사용하죠. 이 경우는 동음을 빌미로 뜻을 가탁한 거예요. 불탈 연. 그러할 연. 然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自然(자연), 茫然自失(망연자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과거의 실패와 성공이 미래에 동일하게 반복된다면 과거를 알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아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렇겠지요. 그러나 알고 맞이하는 것 하고 모르고 맞이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거예요. 이런 차원에서라도 과거를 알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비록 실패가 예견된다 할지라도 말이지요. 알고서 맞이한 실패는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해 아무래도 충격이 덜할테니까요. 그리고 부족하나마 어느 정도 대비도 할 수 있을테니 말이지요.
여담 둘. 사진은 인사동에서 찍었어요. 인사동의 미래를 걱정하는 이들이 많죠. 높은 임대료로 인한 전통 가게들의 철수와 국적 불명의 값싼 제품의 난무를 주요인으로 들더군요. 이번에 가보니 실감하겠더군요. 인사동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여담 셋. 격언 경구란 말이 식상해서 아포리즘이란 말을 써보았어요. 조금 신선한 맛은 있는데 역시 좀 어색하네요. 다음부터는 격언 경구란 말을 다시 써야 겠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