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

 

아침마다 만나는 태권도장 관장. 한 아파트에 살고 반상회에서도 자주 만나는 사이였어요. 그런데 참 인사성이 없었어요. 인사를 먼저하는 법은 절대 없고, 인사를 해도 잘 받지 않았어요. 얼굴은 늘 우거지상이었고. '왜 그럴까,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속으로 이리저리 궁리를 해봤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결론을 내렸어요: "운동(만) 해 무식해서 그런거다!"

 

운동(만) 한 사람들은 무식하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이 편견이 틀리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했어요. 운동(만) 한 사람들이 무식하다는 편견은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것 같지 않아요. 어렸을 때 부터 주위 어른들한테 익숙하게 들었고, 학창 시절 주변 학우들에게서 실제 그런 면모를 확인했어요. 이런 편견은 사회생활을 통해 더 강화됐어요. 운동 좀 한다는 사람들은 대개 말이 거칠고 문제를 논리적으로 풀기보다는 힘을 앞세워 풀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운동하는 사람들은 무식할까요? 무식이 단지 아는 것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무식 = 머리 나쁨'을 의미한다면 이는 잘못된 상식이라고 해요. 운동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머리가 좋고 사교성도 우수하다고 해요. 미국 대학 입시에서 고교시절 운동 (선수) 한 학생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보면 운동 좀 한다는 사람들이 말이 거칠고 힘을 앞세워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은 꼭 실제로 말이 거칠고 힘을 좋아해서라기 보다는 그것이 문제를 푸는데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러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무식한 자의 우둔한 방법이라기 보다 머리좋은 자의 약삭빠른 방법이라고 볼 수도 있는 거지요. 어쩌면 저 태권도장 관장의 무례도 자신의 우월성(?)을 확보하기 위한 약삭빠른 행위였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만일 운동 하는 사람이 겉으로 드러내는 행동도 예의바르고 말투도 공손하며 논리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사진은 '영도매화용법묘 춘생도리예림향(詠到梅花樁法妙 春生桃李藝林香)'이라고 읽어요. '매화 꽃 노래하듯 권법 오묘하고, 도리화 핀 봄날처럼 도장 향기롭네'라고 풀이해요. 영춘권(詠春拳)의 '영'과 '춘'을 가지고 이 권법의 특징과 수련생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렸어요. 영춘권은 견자단 주연의 영화 엽문을 통해 잘 알려졌죠. 특이하게 여성이 창안한 권법으로 보폭이 짧고 다이나믹한 손놀림이 특징인 권법이죠. 엽문(葉問, 1893 -1972)을 통해 널리 전파된 무술로 액션 스타 이소룡도 그에게 배웠다고 전하죠.

 

엽문은, 영화에도 나오지만, 본래 자신의 수련을 위해서 영춘권을 익혔을 뿐 제자들을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고 해요. 대륙이 공산화되자 거처를 홍콩으로 옮기고 부득이 생계 수단으로 제자들을 받기 시작했다는군요. 인터넷에서 그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어요.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다고 해요. 또 가르칠 적에는 '재미(흥미)'를 중시하여 제자들의 재미 수준에 맞춰 개별 지도를 해줬다고 하더군요. 흡사 공자(孔子)의 교수법을 연상시키는 이런 지도 방법은 그가 지도한 것이 학문이 아니라 무예란 점에서 더욱 흥미로워요. 무예 지도하면 으레 '강압'을 연상하는데 그의 지도는 이런 것과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죠. 영화 '엽문'에서도 보면 그가 제자들을 억지로 가르치기 보다는 자발성에 기초해서 따라오도록 지도하거나 제자들에게 인격의 수양을 강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실제 그러했던 것 같아요.

 

대련(對聯) 중앙에 있는 이는 엽문인데, 짐작컨대, 말년의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모습이 무척 평온해 보여요. 전혀 무도인같지 않고 오랫동안 수양을 해 온 도인처럼 보여요(이런, 무도인도 도인이긴 하네요). 이 사진 한 장으로도 그가 제자들을 어떻게 지도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춘권이 널리 퍼지게 된 건 영춘권 자체가 훌륭해서라기 보다 엽문의 훌륭한 인품과 능숙한 지도 방법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낯선 자 두 자만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樁은 木(나무 목)과 舂(찧을 용)의 합자예요. 말뚝이란 뜻이에요. 木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舂은 음을 담당하면서(용→장)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위에서 아래로 찧을 때 잘 박히는 것이 말뚝이란 의미로요. 말뚝 장. 위 대련에서는 '치다'란 뜻으로 사용됐는데, 이는 의 의미를 부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칠 용.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定(장정, 확고하게 정함), 法(용법, 치는 방법) 등을 들 수 있겠네요.

 

藝는 본래 埶로 표기했어요. 埶은 坴(언덕 륙)과 丮(잡을 극)의 합자예요. 손에 씨앗을 쥐고[丮] 여러 땅에다[坴] 심는다는 의미예요. 이 글자의 일반적 의미인 '재주'는 여기서 연역된 거예요. 씨앗을 심는 행위가 결실을 위한 초보 행위이듯이 재주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한 토대란 의미로요. 재주 예. 藝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藝術(예술), 技藝(기예)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태권도장 관장과 헤어진 지는 벌써 10년이 돼가요. 그 이는 지금도 여전히 그런 모습인지 궁금해요. 만일 그가 엽문같은 좋은 스승한테 배웠어도 그런 모습을 취했을까 생각해 봐요. 무도만큼 스승의 영향을 깊게 받는 분야가 없기에(대부분 일대일 지도니까요) 그의 그런 무례한 태도는 스승의 영향도 크지 않았을까 싶어요. 부디 그가 가르치는 제자들에게는 그가 밟은 전철(?)을 답습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여담 둘. 대련 해석에 확신이 없어요. 영춘권의 특징과 수련장의 모습을 담았을 것으로 짐작하고 풀이는 했는데 왠지 자신이 없네요. 사진은 처(妻)가 자신의 페이스 북에서 얻었다며 준 것이에요. 글을 쓰는데 아내의 도움이 큽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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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7-12-09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동(만) 한 사람이 다 그렇지는 않겠고, 아마도 인사할 줄 모르는 그 관장님 개인 품성이 문제겠지요.^^
오늘도 나를 돌아볼 계기가 된 좋은 글 감사해요~♥

찔레꽃 2017-12-10 12:17   좋아요 0 | URL
그렇겠죠? ^ ^

무심 2017-12-09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 관장님은 무도라기보다는 무술을 배운 듯싶습니다. 저도 전에는 운동만 하는 사람들을 무시햇었는데 요즈음은 달라졌습니다. 예를 들어 ‘강호동‘은 그야말로 운동만 한 사람인데 얼마나 머리가 좋습니까! 그의 개그감각이라든가 언어감각은 웬만한 개그맨을 뛰어넘습니다.
저는 영춘권 같은 여성적인 운동을 높이 쳐줍니다. 여성적인 운동은 우리 몸을 부드럽게 해 주고 그 결과 ‘혈행‘을 원할하게 해 줍니다. 혈행이 원할하면 고혈압이라든가 당뇨 같은 성인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사람의 건강은 절대적으로 혈행에 달려 있습니다. 걷기나 자전거 타기, 수영 같은 ‘우리 몸을 부드럽게 해 주는 운동‘을 저는 ‘혈행 운동‘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따라서 축구나 복싱 같은 격한 운동은 건강에 안 좋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찔레꽃 2017-12-10 12:18   좋아요 0 | URL
‘술‘과 ‘도‘는 글자 한 자 차이인데, 경지는 하늘과 땅 사이인 것 같습니다. 무심 선생님만의 건강법을 갖고 계시군요. 부럽습니다. ^ ^
 

 

 

 

소아성애(小兒性愛)를 바탕으로 한 액션 활극에서 '삶과 행복'을 읽는다면 다들 이렇게 말하겠죠? "웃기네!" 하지만 어린 아이가 무심코 내뱉는 말에도 이따금 보석같은 말이 있듯 - 본인은 아무 생각없이 말했겠지만 - 그런 영화에서도 생각하기에 따라선 놓치기 아까운 장면이나 말이 있을 거예요.

 

"사는게 항상 이렇게 힘든가요?" "원래 그래."

 

영화 '레옹'에 나오는 마틸다와 레옹의 대화예요. 집에서 얻어맞아 입가에 피멍이 든 마틸다. 아파트 계단 베란다에 앉아 건들거리다 지나가는 레옹에게 무심코 건넨 말에 레옹이 감정없이 대꾸하는 장면이에요. 두 사람의 대화에서 저는 삶의 진상(眞相)을 읽었어요. 삶은 결코 장미꽃을 뿌려놓은 탄탄대로가 아니라 가시 덩쿨이 뒤엉킨 골목길이라는 것. 종교, 중에서도 불교의 그럴싸한 외피를 빌자면 '고(苦)' 그것이 바로 삶의 진상인 거죠.

 

이런 삶에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자신의 동생을 죽인 마약 단속 반장 스탠스의 뒤를 쫓다 되려 스텐스에게 죽을 처지에 놓인 마틸다. 약에 취한 스탠스가 총을 어루만지며 으스스한 저음으로 말하죠.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지. 죽기 직전에야 삶이 고마운 걸 느끼는 거야." 스탠스의 대사에서 저는 행복의 진상을 읽었어요. 행복은 살아있음 그 자체를 느끼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무엇이 아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 이란 바로 이 행복을 각성하는 것 아닌가 싶어요.

 

사진은 '신통묘용 운수반시(神通妙用 運水搬柴)'라고 읽어요. '신비롭고 오묘한 일은 바로 물 긷고 나무하는 것이다.'라고 풀이해요. 살아 움직이는 일상의 평범함이 바로 신비롭고 오묘한 일이지 그 외에 다른 무엇이 아니다란 의미지요. 통념을 뒤집는 이 언급은 저 영화 '레옹'의 대사와 일맥상통해요. 고(苦)인 삶에서 살아있음 그 자체가 행복이듯 신비롭고 오묘한 일은 바로 이 몸이 살아 움직인다는 평범한 일 이라는 것, 이 둘은 표현만 다르지 기본 인식은 같아요. 행복이나 신비는 먼데 있지 않다. 바로 여기에 있다!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神은 示(보일 시)와 申(번개 신)의 합자예요. 만물의 시원(始原)이 되는 자, 곧 만물을 지어내는 자란 뜻이에요. 만물이 형상을 드러냈다는 의미의 示를 가지고 뜻을 표현했어요. 申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이 자는 번개처럼 두렵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라는 의미로요. 귀신 신. 神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鬼神(귀신), 神秘(신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通은 辶(걸을 착)과 甬(湧의 약자, 샘솟을 용)의 합자예요. 막힘없이 솟아 나오는 샘처럼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다닌다는 뜻이에요. 통할 통. 通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通行(통행), 通路(통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妙는 女(여자 녀)와 少(적을 소)의 합자예요. 나 어린 소녀는 순진하고 귀여워 다들 좋아한다는 의미예요. 묘하다란 의미는 본뜻에서 확장된 의미지요. 묘할 묘. 妙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妙技(묘기), 妙數(묘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運은 (걸을 착)과 軍(군사 군)의 합자예요. 군사들을 위한 각종 병기와 보급품을 이동시킨다는 의미예요. 운전할 운. 運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運轉(운전), 幸運(행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搬은 扌(手의 변형, 손 수)와 般(돌릴 반)의 합자예요. 물건을 옮긴다는 뜻이에요.  扌로 뜻을 표현했어요. 般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돌리는 것은 곧 옮긴다는 의미니까요. 옮길 반. 搬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搬出(반출), 반입(搬入)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柴는 木(나무 목)과 此(이 차)의 합자예요. 땔 감이란 뜻이에요. 木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此는 음을 담당해요(차→시). 땔감 시. 柴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扉(시비, 사립문), 柴奴(시노, 땔 나무 하던 머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레옹'에는 이 외에도,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 괜찮은 대사들이 꽤 있어요. 그 중의 하나는 마틸다의 다음 대사예요. "정말 사랑한다면 공원에 심어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해요." 화분을 갖고 다니는 레옹에게 마틸다가 하는 말이죠.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 하여 나로 인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란 의미인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와는 좀 다르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일리있는 말이에요. 상대나 내가 아파서 흔들린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고통이죠. 사랑의 이름을 가장한(?) 고통. 이런 점에서 진정한 사랑은 결혼 이후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 봐요. 사진은 어떤 지인의 작품이에요. 방온거사(龐蘊居士, ? - 808)의 시 일부라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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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 2017-12-01 1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 아주 좋습니다. 찔레꽃님의 한자 실력도 그렇거니와 삶에 대한 내공이 놀랍습니다. 하긴 제 와이프도 언젠가 이런 말을 했지요. ˝여보, 행복이라는 건, 별 일 없어서 다소 따분한 느낌의 나날들이 아닐까?˝

깊은 산속의 도사님들만 도를 깨치는 게 아니라는 데 동의합니다. 속세에 살면서도 충분히 도를 깨칠 수 있지요. 영화 레옹의 하찮은 대사와 방온거사의 일언이 통하는 원리이죠.


찔레꽃 2017-12-01 15:56   좋아요 2 | URL
무심 선생님, 오발에 꿩 잡는 수도 있다죠? 그 격 아닐까요? ^ ^ 선생님의 격려성 칭찬이 제가 이 블로그에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한 편 좀 걱정되기도 합니다. 실망시켜 드릴까 봐. 블로그라는게 자유가 전제되야 하는데 선생님의 격려성 칭찬은 한편으로 고마우면서도 한 편으로 부담을 주는 양면이 있네요. 선생님께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텐도 말이지요. 하하. 제가 좀 워낙 소심해서.... 날씨가 추워집니다. 늘 건강 잘 챙기셔요~ 꾸벅.

무심 2017-12-01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하하. 제 글도 항상 잘 풀리는 게 아닙니다. 발표해 놓고 나서 나중에 후회할 때가 있다니까요. 그렇다 해도 ‘삶을 성실히 사는 방법‘으로써 글을 써서 블로그에라도 발표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거지요. 그 동안 제가 10편의 글을 블로그에 올렸다면 나중에 반 가까이는 만족 못하고 있습니다.
찔래꽃님. 글쓰는 일에 너무 부담 갖지 않기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중학교 땐가 고등학교 땐가 국어 시간에 배운 시조예요.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의 회고시(懷古詩)로 흔히 세상사와 인생의 무상함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죠. 그런데 정작 이 시조를 배울 당시는 이 시조의 주제를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도 그럴 것이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에 세상사와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지요. 학교를 졸업한 지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사 이 시조의 주제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렴풋이'란 말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시조의 주인공처럼 한 시대 역사의 틀을 짜거나 권력의 못을 박아본 적이 없기에 이 시조의 작자가 느끼는 무상함을 온전히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에요.

 

사진은 길재 선생의 '한거(閑居)'라는 시예요. 위 시조와 관련하여 읽어보면 내용 이해가 한결 더 쉬울 것 같아요.

 

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시냇가 초가집 홀로 한가롭나니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달 밝고 바람 맑으니 흥 넘쳐라.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래산조어   외갓네 오지 않고 새 소리만 조잘조잘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대 울타리 아래로 평상 옮기고 누워서 책을 보다.

 

하늘에 달이 휘영청 밝고 바람은 서늘해요. 모르긴 해도 시냇가 옆에 지은 초가이니 시냇물 소리도 은은히 들려오겠지요. 외갓 사람 오지 않은 조용한 곳인데다 한 밤중이라 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요. 더없이 고적한 공간에 있지만 시인은 외롭지 않아요. 외려 흥이 나요. 왠지 모를 충만감이 밀려오기 때문이에요. 하여 자신도 모르게 누옥(陋屋)을 나와 대 숲 아래 평상을 옮겨 놓고 누워 책을 봐요. 고적하지만 충만함이 가득한 공간에 자신도 동참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시에서 좀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있어요. 바로 마지막 구절이에요. 내용 전개상 무리가 없는 듯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좀 문제가 있어요. 지금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밤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달빛 아래 책을 본다는 것일까요? 옛날 도서의 글씨가 아무리 크다 해도 달빛 아래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크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달빛 아래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무리한 일이지요. 비록 시적으로는 그럴듯한 행위일런지 모르지만요.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돼요: “길재 선생은 실제 책을 본 것이 아니다. 다만 시적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시적 표현을 위해 등장시킨 이 부분은 선생 자신도 모르게 선생의 마음자리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책은 자연과 대척점에 있는 문명의 산물이다책을 본다는 것은 아직 완전한 한거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일반적으로 이 시를 선생의 한거와 유유자적함을 읊은 것으로 보는데, 이는 피상적 분석이 아닐까 싶어요.

 

길재 선생은 한 때 역사의 틀을 짜고 권력의 못을 박는 위치에 있었어요. 그러나 새 정권의 탄생과 함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권력의 뒷방으로 물러났어요. 그렇게 물러난 한거란 사실 그리 흔쾌한 한거가 아니지요. 적어도 제가 보기에, 길재 선생의 한거는 어쩔 수 없는 체념에서 택한 한거라는 생각이에요. ‘오백년...’의 시조에서 과거의 영화에 대한 그리움의 자취가 어른거리듯 이 시에서도 어쩔 수 없는 체념에서 택한 한거에서 오는 세상에 대한 미련의 그림자가 어른거려요.

 

낯선 한자를 좀 자세히 살펴 볼까요?

 

(누울 와)(물건 품)의 합자예요. 높은 곳에서 몸을 구부려[] 아래 있는 대상을 살펴 본다는 의미예요. 이 글자의 일반적 의미인 '임하다'는 본뜻의 일부를 사용한 거예요. 높은 곳에 위하하여 아래를 바라볼 자세를 취했다란 의미로요. 임할 임.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臨時(임시), 降臨(강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먹을 식)(나 여)의 합자예요. 는 음을 담당해요. 풍족하게 먹어 배가 부르다는 의미예요. 이 글자의 일반적 의미인 '남다'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배가 부르기에 더 먹을 수 없어 남겼다란 의미로요. 남을 여.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餘談(여담), 餘裕(여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벼 화)(많을 다)의 합자예요. 벼 모를 옮겨 심는다는 의미예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다이)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소출을 늘리기 위해 이앙을 한다는 의미로요. 옮길 이.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移徙(이사), 移秧(이앙)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흙 토)(까마귀 오)의 합자예요. 둑이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村塢(촌오, 촌락), 塢壁(오벽, 작은 성)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사람 인)(신하 신)의 합자예요. 엎드려 쉰다는 의미예요. 신하는 보통 군주 앞에서 몸을 굽힌 자세를 취하기에 을 합하여 의미를 표현했어요. 눕다란 의미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여기에도 쉬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건 마찬가지지요. 누울 와.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臥佛(와불), 臥薪嘗膽(와신상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길재 선생의 시를 너무 혹평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 시를 100번 가량 읽었는데도 일반적으로 이 시에 대해 언급하는 한거의 운치가 떠오르질 않는 거예요. 하여 그 이유를 따져보다 위와 같은 평을 하게 됐어요. 시 한수를 가지고 길제 선생이 한거의 운치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좀 무리가 있긴 해요. 그러나 적어도 이 작품을 가지고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한거의 운치가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에요. 적어도 제게는요. 사진은 예산에 있는 한국 서예 비림 박물관에서 찍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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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11-28 1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뭐, 개인적인 의견을 혹평이라 생각하지도 않지만서도,
무릇 평이란걸 하려면 적어도 백번은 읽어야 한다는 의미처럼 생각되어서 숙연해집니다.
백번은 커녕, 날림으로 읽어내고 감정을 분출해내는 저를 반성하게도 되고요.

좋고 귀한 글, 잘 읽고 있습니다, 꾸벅~(__)

찔레꽃 2017-11-29 08:36   좋아요 2 | URL
겸손이 지나치셔요~ ^ ^ 좋게 말씀해 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양철나무꾼 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더더욱 노력해야겠다는 다소 싱거운(?) 생각을 해봤습니다. ^ ^
 

'홍운탁월(烘雲托月)'이란 동양화 기법이 있어요. 달을 직접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구름에 가탁해 달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달 주변의 구름을 어둡게 표현하여 달이 드러나게 하는 거죠.

 

 공자의 핵심 사상은 '인(仁)'인데, 그 정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고 하죠. 묻는 이에 따라 저마다 다르게 답변했을 뿐 더러 그 조차 개념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이죠. 일례로 '인'을 묻는 안연에게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답해요.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욕구를 극복하고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 그것이 '인'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에는 구체적으로 그 '인'의 모습이 나타나 있지 않아요. 마치 저 홍운탁월의 기법처럼 그저 무엇이 제거되어 달성된 그 지점이 '인'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죠.

 

 사진은 '단진범정 별무성해(但盡凡情 別無聖解)'라고 읽어요. 원래는 이 구절 앞에 수행지요(修行之要)란 말이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됐어요. 이 말까지 넣어 풀이하면 '수행의 알맹이는 범부의 생각을 떨어지게 할 뿐이지 따로 성인의 알음알이가 있을 수 없다'라고 풀이해요(법정 스님 번역을 빌었어요).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나오는 말이에요. 여기서도 수행의 알맹이가 명확히 명시되어 있지 않아요. 이 역시 홍운탁월의 기법처럼 '범부의 생각을 떨어지게 하면 그것이 수행의 알맹이다'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

 

이런 표현은 언어의 한계를 인식한데서 비롯된 것 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관계'에 우선한 철학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모든 것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기에 실상을 정의할 때 이런 정의 방식을 택한 것 아닌가 싶은 거죠. 사랑한다의 반대는 미워하다이고 미워하다의 반대는 사랑한다이죠.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을 그 자체로 '무엇무엇이 사랑한다이다'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미워함이 없는 것 그것이 곧 사랑이다'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거예요. 미워한다도 마찬가지겠죠. 이런 정의가 가능한 것은 둘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죠. 종교와 철학에서 중시하는 관념이 선과 악인데 동양의 종교과 철학에서는 절대 선과 절대 악이 존재하지 않죠. 이는 선과 악이 상관 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 아닌가 싶어요. 악의 이면이 선이고 선의 이면이 악이란 상관 관념하에서는 절대 악과 절대 선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요.

 

낯선 한자를 살펴 볼까요?

 

은 人(사람 인)과 旦(아침 단)의 합자예요. 웃통을 벗는다는 의미예요. 人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旦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아침이 되어 동이 트면 사물의 형체가 명확히 드러나듯 웃통을 벗으면 그 같이 몸이 드러난다는 의미로요. 웃통벗을 단. 지금은 '다만'이란 뜻으로 주로 사용하는데, 이는 동음을 빌미로 뜻을 차용한 거예요. 지금은 웃통을 벗는 다는 의미를 袒으로 표기해요. 다만 단. 但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但只(단지), 但書(단서, 본문 다음에 그에 대한 어떤 조건이나 예외 따위를 나타내는 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皿(그릇 명)과 盡(燼의 약자, 탄나머지 신)의 합자예요. 타고 나면 남는 것이 없듯이 그릇 속의 음식물이 남김없이 다 비워졌다란 의미예요. 다할 진. 盡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盡力(진력),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乃(이에 내)와 一(한 일)의 합자예요. 첫 시작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해요. 乃는 뜻을 연결지어주는 말이고, 一은 처음을 의미하는 말이지요. 무릇 범. '평범하다'란 의미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동음을 빌미로 뜻을 차용한 거예요. 평범할 범. 凡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平凡(평범), 凡例(범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冎(뼈발라낼 과)와 刂(刀의 변형, 칼 도)의 합자예요. 칼로 뼈에서 살을 발라내듯이 분해한다란 의미예요. 이 글자의 일반적 의미인 '다르다'는 본뜻에서 연역된 거예요. 분해해서 구별했다란 의미로요. 다를 별. 別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區別(구별), 別稱(별칭)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耳(귀 이)와 呈(드러낼 정)의 합자예요. 귀로 소리를 듣고 실정을 이해하듯 온갖 사물의 실정에 통달했다란 뜻이에요. 그러한 경지를 '성스럽다'고 하지요. 성스러울 성. 聖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聖賢(성현), 聖經(성경)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角(뿔 각)과 刀(칼 도)와 牛(소 우)의 합자예요. 칼을 가지고 소의 머리에서 뿔을 해체한다는 의미예요. 풀 해. 解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解剖(해부), 解決(해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사진에 나온 글씨가 좀 그렇죠? ^ ^ 아는 분이 스마트 폰에서 제 폴더 폰으로 보냈는데 이것을 이메일로 옮겨 붙이다 보니 사진이 이렇게 됐어요. 그냥 옮겨 붙이면 화질은 좀 괜찮은데 글씨가 너무 작아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확대하기를 택했더니 화질이 형편 없어진 거예요. 그런데, 처음엔 좀 이상했는데 자꾸 쳐다보니 나름대로 괜찮더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하하.

 

여담 둘. 이 사진의 내용을 가지고 글을 쓰기 위해 법정 스님의 『선가귀감』번역본을 구입했어요. 난해한 구절에 스님의 주석이 붙어있는데 단순한 글자 풀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 불교의 개탄스런 현실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고 있어 흥미롭더군요. 아울러 스님의 대표 수필집으로 평가되는 『무소유』의 내용 원형도 이 주석에서 살펴볼 수 있었어요. 1,200원(원가) 짜리를 15,000원(판매가)에 샀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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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배 씨 칼럼도 내가 손봤지..."

 

 오래 전 우연히 알게 된 어떤 분이 한 말이에요. 자신이 모 신문의 편집실장을 하고 있었을 때 당시 명칼럼니스트였던 김중배 씨의 칼럼을 받아 과감히 양을 줄이고 내용도 일부 수정했다고 무용담처럼 말하더군요. 일견 자신의 감식안이랄까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 처럼 들렸지만 당시 김중배 씨가 누구고 그 분의 글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는 제게 그 분의 자랑은 그다지 실감나게 와닿지 않았어요.

 

 후에 김중배 씨와 그의 칼럼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게 되고선 그의 그런 행동이 자랑할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문명(文名)이 있는 사람의 글을 손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감식안 이랄까 그런 것이 높은 수준에 올랐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니까요. 더불어 대가의 글도 항상 훌륭한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겠지요.

 

 사진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음주(飮酒)'란 시예요.

 

 客路春風發興狂   객로춘풍발흥광     나그네 길 봄바람 만나니 미친 흥 절로 난다

 每逢佳處卽傾觴   매봉가처즉경상     아름다운 곳 만날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네.

 還家莫愧黃金盡   환가막괴황금진     집에 돌아와 돈을 다 썼다고 부끄러워 말자

 剩得新詩滿錦囊   잉득신시만금낭     금낭(錦囊)에 한 가득 신시(新詩)를 얻었거니.

 

 시인의 호쾌방탕한 면모를 보여주는 시예요. 그런데, 우리 말 번역에서는 느끼기 어렵지만 원문으로 이 시를 읽어보면 왠지 느슨한 느낌이 들어요. 미친 흥이 날 정도면 탄력있게 느껴져야 하는데 말이지요. 이유는 5언으로 해도 될 것을 7언으로 늘리면서 불필요한 언사를 넣었기 때문이에요. 매 구의 첫 2자는 군더더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매 구의 첫 2자를 빼면 탄력이 살아나고 여운도 풍부해져요.

 

春風發興狂  춘풍발흥광     봄 바람에 미친 흥 절로 나니

佳處卽傾觴  가처즉경상     아름다운 곳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네.

莫愧黃金盡  막괴황금진     노잣돈 다썼다 부끄러워 말자

新詩滿錦囊  신시만금낭     금낭에 신시가 가득하니.

 

우리 말 번역으론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이 번역을 앞 번역과 대조해 보면 위에 한 말이 과시 그릇되지 않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그렇게 느껴지시지 않나요?  ^ ^ 원작자 포은 선생께서는 뭐라고 하실런지…).

 

 

낯선 한자를 몇 자 살펴 볼까요?

 

은 同(한가지 동)과 舁(마주들 여)의 합자예요. 한 마음으로 일시에 들어올린다는 뜻이에요. 일(어날) 흥. 興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興起(흥기), 興趣(흥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미친 개라는 뜻이에요. 왼 쪽의 犭(犬의 변형, 개 견)이 뜻을 담당하고, 오른 쪽은 음을 담당해요(왕광). 지금은 '개'라는 의미는 떼버리고 '미치다'란 뜻으로 사용하죠. 미칠 광. 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發狂(발광), 狂氣(광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人(사람 인)과 頃(기울 경)의 합자예요. 머리가 반듯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란 뜻이에요. 기울 경. 傾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傾斜(경사), 傾國(경국, 나라를 위태롭게 하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술잔이란 뜻이에요. 角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는 음을 담당해요(양→상). 술잔 상. 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濫觴(남상, 시초), 觴飮(상음, 술잔을 들고 술을 마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忄(心의 변형, 마음 심)과 鬼(귀신 귀)의 합자예요. 부끄럽다는 뜻이에요.  忄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鬼는 음을 담당하면서(귀괴)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귀신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인데, 그같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마음 속에 간직한 부끄러움이란 의미로요. 부끄러울 괴. 愧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慙愧(참괴), 愧色(괴색, 부끄러워하는 얼굴 빛)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본래 賸으로 표기했어요.  賸은 貝(조개 패)와 朕(나 짐, 천자의 자칭)의 합자예요. 남아도는 재물이란 의미예요. 貝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朕은 음을 담당하면서(짐→잉)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천자는 그 소유한 재물이 항상 남아돈다는 의미로요. 남을 잉. 剩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剩餘(잉여), 過剩(과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위 아래로 묶고 가운데 물건이 들어있어 불룩하게 된 모양을 그린 거예요. 주머니 낭. 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背囊(배낭), 囊中之錐(낭중지추, 능력이 있으면 저절로 드러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한시는, 여타 시도 그렇지만, 적어도 100번 이상은 소리 내 읽어봐야 해요. 그래야 행간의 의미도 알 수 있고, 한계는 있지만 리듬감도 느낄 수 있거든요(우리는 한시에서 운율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죠. 중국처럼 사성을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포은 선생 시에 가한 비평도 100번 이상 읽고 얻은 수확이에요. 그러나, 혹 모르겠어요. 포은 선생 시를 200번 혹은 300번 읽으면 생략시켰던 부분을 다시 복원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런지도. 이유는 제가 결코 시를 보는 감식안이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다만 포은 선생 시를 100번 가량 읽어보니, 이 수준에서는, 매 구의 2자를 빼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감히(?) 손을 본 것 뿐이지요. 거기다 사족을 붙이자면, 대가도 실수가 있지 않겠는가라는 고정 관념이 있어서….

 

여담 둘. 사진은 예산에 있는 한국 서예 비림 박물관에서 찍었어요. 잘 쓴 글씨이긴 한데, 시 내용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좀 더 힘을 빼고 여유있게 썼으면 내용과 더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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