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배 씨 칼럼도 내가 손봤지..."

 

 오래 전 우연히 알게 된 어떤 분이 한 말이에요. 자신이 모 신문의 편집실장을 하고 있었을 때 당시 명칼럼니스트였던 김중배 씨의 칼럼을 받아 과감히 양을 줄이고 내용도 일부 수정했다고 무용담처럼 말하더군요. 일견 자신의 감식안이랄까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 처럼 들렸지만 당시 김중배 씨가 누구고 그 분의 글이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는 제게 그 분의 자랑은 그다지 실감나게 와닿지 않았어요.

 

 후에 김중배 씨와 그의 칼럼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게 되고선 그의 그런 행동이 자랑할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문명(文名)이 있는 사람의 글을 손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감식안 이랄까 그런 것이 높은 수준에 올랐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니까요. 더불어 대가의 글도 항상 훌륭한 것은 아니다 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겠지요.

 

 사진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음주(飮酒)'란 시예요.

 

 客路春風發興狂   객로춘풍발흥광     나그네 길 봄바람 만나니 미친 흥 절로 난다

 每逢佳處卽傾觴   매봉가처즉경상     아름다운 곳 만날 때마다 술잔을 기울이네.

 還家莫愧黃金盡   환가막괴황금진     집에 돌아와 돈을 다 썼다고 부끄러워 말자

 剩得新詩滿錦囊   잉득신시만금낭     금낭(錦囊)에 한 가득 신시(新詩)를 얻었거니.

 

 시인의 호쾌방탕한 면모를 보여주는 시예요. 그런데, 우리 말 번역에서는 느끼기 어렵지만 원문으로 이 시를 읽어보면 왠지 느슨한 느낌이 들어요. 미친 흥이 날 정도면 탄력있게 느껴져야 하는데 말이지요. 이유는 5언으로 해도 될 것을 7언으로 늘리면서 불필요한 언사를 넣었기 때문이에요. 매 구의 첫 2자는 군더더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매 구의 첫 2자를 빼면 탄력이 살아나고 여운도 풍부해져요.

 

春風發興狂  춘풍발흥광     봄 바람에 미친 흥 절로 나니

佳處卽傾觴  가처즉경상     아름다운 곳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네.

莫愧黃金盡  막괴황금진     노잣돈 다썼다 부끄러워 말자

新詩滿錦囊  신시만금낭     금낭에 신시가 가득하니.

 

우리 말 번역으론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이 번역을 앞 번역과 대조해 보면 위에 한 말이 과시 그릇되지 않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그렇게 느껴지시지 않나요?  ^ ^ 원작자 포은 선생께서는 뭐라고 하실런지…).

 

 

낯선 한자를 몇 자 살펴 볼까요?

 

은 同(한가지 동)과 舁(마주들 여)의 합자예요. 한 마음으로 일시에 들어올린다는 뜻이에요. 일(어날) 흥. 興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興起(흥기), 興趣(흥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미친 개라는 뜻이에요. 왼 쪽의 犭(犬의 변형, 개 견)이 뜻을 담당하고, 오른 쪽은 음을 담당해요(왕광). 지금은 '개'라는 의미는 떼버리고 '미치다'란 뜻으로 사용하죠. 미칠 광. 狂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發狂(발광), 狂氣(광기)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人(사람 인)과 頃(기울 경)의 합자예요. 머리가 반듯하지 않고 한쪽으로 기울어졌다란 뜻이에요. 기울 경. 傾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傾斜(경사), 傾國(경국, 나라를 위태롭게 하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술잔이란 뜻이에요. 角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나머지는 음을 담당해요(양→상). 술잔 상. 觴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濫觴(남상, 시초), 觴飮(상음, 술잔을 들고 술을 마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忄(心의 변형, 마음 심)과 鬼(귀신 귀)의 합자예요. 부끄럽다는 뜻이에요.  忄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鬼는 음을 담당하면서(귀괴)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귀신은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인데, 그같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마음 속에 간직한 부끄러움이란 의미로요. 부끄러울 괴. 愧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慙愧(참괴), 愧色(괴색, 부끄러워하는 얼굴 빛)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본래 賸으로 표기했어요.  賸은 貝(조개 패)와 朕(나 짐, 천자의 자칭)의 합자예요. 남아도는 재물이란 의미예요. 貝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朕은 음을 담당하면서(짐→잉)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천자는 그 소유한 재물이 항상 남아돈다는 의미로요. 남을 잉. 剩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剩餘(잉여), 過剩(과잉)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은 위 아래로 묶고 가운데 물건이 들어있어 불룩하게 된 모양을 그린 거예요. 주머니 낭. 囊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背囊(배낭), 囊中之錐(낭중지추, 능력이 있으면 저절로 드러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한시는, 여타 시도 그렇지만, 적어도 100번 이상은 소리 내 읽어봐야 해요. 그래야 행간의 의미도 알 수 있고, 한계는 있지만 리듬감도 느낄 수 있거든요(우리는 한시에서 운율을 제대로 느끼기 어렵죠. 중국처럼 사성을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포은 선생 시에 가한 비평도 100번 이상 읽고 얻은 수확이에요. 그러나, 혹 모르겠어요. 포은 선생 시를 200번 혹은 300번 읽으면 생략시켰던 부분을 다시 복원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런지도. 이유는 제가 결코 시를 보는 감식안이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다만 포은 선생 시를 100번 가량 읽어보니, 이 수준에서는, 매 구의 2자를 빼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감히(?) 손을 본 것 뿐이지요. 거기다 사족을 붙이자면, 대가도 실수가 있지 않겠는가라는 고정 관념이 있어서….

 

여담 둘. 사진은 예산에 있는 한국 서예 비림 박물관에서 찍었어요. 잘 쓴 글씨이긴 한데, 시 내용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좀 더 힘을 빼고 여유있게 썼으면 내용과 더 잘 어울리지 않았을까 싶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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