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도 중요하지."

 

오래 전. 서울에 올라가 연수를 받고 있었어요. 어느 날 한 동료가 제게 저녁을 샀어요. 동료는 서울서 근무하다 지방으로 내려왔어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 마디 했어요. "이렇게까지 안해도 되는데…" 그러자 동료는 웃으며 "내 구역에 왔는데 그럴수 있나?" 하면서 무슨 말인가를 하던 끝에 저 말을 했어요.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어요.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좌우할 수도 있지." 연수받느라 고생한다는 위로의 마음이나 말도 중요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밥 한 끼 사는 행위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며, 때로는 그 행위가 마음이나 말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한 거였어요. 

 

시를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면, 보통은 내용을 우선시할 거예요. 그러나 저 동료의 말을 대입하면, 때로는 형식이 우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발 더 나아가 형식이 내용을 좌우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여기 형식은 표현 방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에요.

 

사진은 추사(秋史)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병풍의 일부분이에요. 제사용 병풍으로 제작되어 시중에 판매되는 것인데, 병풍 마지막에 추사라는 낙관이 있더군요. 제사용 병풍으로 판매되는 것이라 추사의 진적(眞迹)이 아닌 것은 분명해요. 추사의 진적 복사본을 또다시 복사하여 만든 것이거나, 진적 임서본을 복사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돼요. 혹은 추사체를 모사하여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글씨의 진위를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단지 추사의 시가 맞을까 하는 생각만 했어요.

 

시를 100번 가량 소리내어 읽어 봤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표현이 많이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표현이 어색하니 내용은 도외시 되구요. 음식 그릇이 깨끗지 않으니 음식에 별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시를 읽어 볼까요?

 

高齋晴景美  고재청경미   높은 정자 개인 경치 아름답고

淸氣滿園林  청기만원림   맑은 기운 원림에 가득하여라

倚杖寒山暮  의장한산모   지팡이 짚고 거니는데 한산은 저물녘

開門落照深  개문낙조심   문을 여니 낙조 짙었네

 

이 시는 이른 시간에서 늦은 시간까지 그리고 높은 공간에서 낮은 공간까지 자신이 바라본 경치를 그렸어요. 이렇게 시공간의 변화를 주면서 경치를 그린 건 경치의 미감을 독자에게 잘 전달하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그런데 압축을 중요시하는 한시에서는 시공간의 변화를 굳이 다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일부분만 표현하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도 충분하죠. 이런 면에서 이 시는 실패했어요. 첫째 구에서 비개인 산뜻한 경치를 표현했는데 이 내용을 둘째 구에서 반복하고 있고, 셋째 구에서 저물녘의 풍경을 그렸는데 이 내용을 넷째 구에서 반복하고 있어요. 이 시는 첫째 구와 셋째 구 만으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시예요.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도 돼죠. 아울러 이 시의 치명적인 실수는 첫째 구의 '아름답고[美]'란 표현이에요. 풍경의 아름다움을 시 전체를 통해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해야지 시인 스스로가 아름답다고 말해 버리면 그건 시가 아니라 산문이죠.

 

이 시의 또 다른 표현 실패는 계절감을 나타내는 시어의 일관성없는 사용이에요. 첫째 구의 '개인 경치' 둘째 구의 '맑은 기운' 셋째 구의 '한산' 넷째 구의 '낙조'는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이 언제인지 헛갈리게 만들어요. 첫째 구와 둘째 구의 시어를 보면 계절이 여름인 것 같은데, 셋째 구와 넷째 구의 시어를 보면 계절이 가을인 것 같거든요.

 

이 시가 추사의 진작(眞作)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읽을수록 느껴지는 표현의 어색함을 생각하면 추사의 진작이 아닐 것 같아요. 백 번 양보하여 추사의 진작이라 해도 표현에 있어선 그다지 후한 평가를 주기 어려워요. 

 

낯선 한자를 두어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齋는 示(神의 약자, 귀신 신)과 齊(가지런할 제)의 합자예요. 제사 전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예요. 示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齊는 음(제→재)음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것은 그 둘을 가지런히 일치시키는 것이란 의미로요. 재계할 재. 제사를 지내는 집 혹은 서재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제실 재. 서재 재. 齋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書齋(서재), 齋戒(재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倚는 人(사람 인)과 奇(기이할 기)의 합자예요. 타인에게 의지한다는 의미예요. 人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奇는 음(기→의)을 담당해요. 의지할 의. 倚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倚子(의자), 倚支間(의지간, 처마끝에 잇대거나 집채의 원간에 기대어 늘여 지은 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杖은 木(나무 목)과 丈(길이 장)의 합자예요. 기다란[丈] 지팡이[木]란 의미예요. 지팡이 장. 杖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几杖(궤장, 안석과 지팡이. 공로많은 노대신에게 내리던 상), 短杖(단장, 짧은 지팡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위 시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는데, 꼭 그렇게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예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어요. 표현의 절제미를 상실한 것은 충분한 미감 전달을 위해 부득히 사용한 것이고, '아름답고'란 직설적 표현 또한 그 이상의 표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기에 부득히 사용한 것이며, 계절의 미감을 살리지 못한 표현은 있는 그대로 그릴 뿐 일관성을 염두에 둔 작위적 표현을 배제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 시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저만의 편견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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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께서 가보라고 하셔서.”

 

어느 날 군수가 저희 집을 방문해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며 말했어요. 그러면서 내복 한 벌을 선물로 드렸어요. 담소 후 집을 떠나며 아버지께 말했어요.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주십시오.” 군수의 방문은 동네의 화제가 됐어요. 아버지 얼굴엔 희색이 만연했죠. 그 해 겨울 아버지는 청와대로부터 각하 내외의 사진이 담긴 신년 연하장을 받았어요. 연하장을 받은 아버지 얼굴엔 또 한 번 희색이 만연했어요. 이 연하장은 아버지 생전에 거의 가보 수준으로 취급받았어요.

  

자신보다 한층 위에 있는 사람의 방문이나 서신을 받으면 감동하죠. 그 순간은 자신이 온 세상을 가진듯한 환희를 맛볼 거예요. 사진의 내용도 이와 유사해요. 옛글이라 매우 점잖게 표현됐지만 상대의 글을 받았을 때의 환희를 짐작할 수 있어요.

  

浮世淸緣 何以易就 且須隨喜方便 不必自惱自勞也 阮堂先生自欲句 堵冬(부세청연 하이이취 차수수희방편 불필자뇌자로야 완당선생자욕구 도동)

  

덧없는 세상의 맑은 인연인데, 어떻게 이루기가 쉽겠습니까. 그러니 우선 좋은 방편을 기다릴 것이요 굳이 스스로 고심하고 수고롭게 할 것이 없습니다. 완당선생 자욕구. (글씨 쓴 이의 아호).

 

그런데 정작 읽어보니 편지를 받았을 이의 환희를 짐작하기 어렵죠? 이 글 이전의 생략된 내용을 읽어야 편지를 받은 이의 환희를 확실히 짐작할 수 있어요.

 

세후의 한 서신에 대해서는 마치 해가 새로워짐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꽃이 핀 때를 만난 것 같기도 하였으니, 그 기쁨을 알 만합니다. 그러나 다만 방만하고 초췌한 이 사람은 족히 높으신 권주(眷注)를 감당할 수 없을 뿐입니다. 산사(山寺)에 가자는 한 약속 또한(年後一椷 如瞻歲新 如逢花開 喜可知耳 但此頹放憔悴 不足以當崇注 山寺一約 亦) … (이상 번역: 고전번역원 DB 「완당(추사 김정희)선생이 석파(石坡)에게 준 편지글」)


 

확실히 편지를 받은 이의 환희가 느껴지죠 신분이 자신보다 높은 이가 산사에 가자고 청을 했으니 편지를 받은 이는 대단히 영광스러웠겠죠? 그러나 무슨 사정인진 모르지만 그 일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편지를 받은 이는 아쉬움을 달래며 후일을 기약하자고 말하고 있어요. 문맥은 상대를 위로하는 듯한 내용이지만 실제는 자신을 위로하고 있는 거예요. 상대의 신분이 높으니 상대를 위로하는 어투를 취한 것뿐이지요.

  

여기 영광스런 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추사 김정희예요. (‘완당선생이란 단어에서 이미 짐작하셨죠?) 그러면 그에게 영광스런 편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일까요? 석파 이하응이에요. 흔히 흥선대원군으로 불리는 사람이죠. 석파와 추사는 내외 종간의 먼 친척이에요. 석파는 영조의 고손자인 남연군의 아들이었고, 추사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11촌 조카였거든요. 둘의 나이차는 서른 네살 이었어요. 추사가 위였죠. 그러나 석파는 왕실 사람이었기에 추사에겐 어려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어요. 이런 그에게 산사에 함께 가자는 청을 담은 편지를 받았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마치 저희 아버지께서 각하의 연하장을 받았을 때의 마음과 진배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자칫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 있어요. 추사가 받은 편지가 석파의 대원군 시절 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그러나 추사가 받은 편지는 석파의 대원군 시절 편지가 아니예요. 대원군의 파락호 시절 편지예요. 석파가 대원군이 되었을 때 추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러면 또 다른 의문이 생기겠죠? ‘아니 파락호 시절의 석파에게 그것도 한참이나 나 어린 석파에게 추사가 저토록 감읍하는 모습을 보였단 말인가?’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돼요. 세간에 석파가 파락호로 지낼 때 모든 이들에게 천대를 받았다고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거예요. 석파가 의도적으로 파락호 행세를 한 건 분명하지만, 모든 이들이 그를 우습게 대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는 추사의 감읍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워요. 석파는 파락호 시절에도 여전히 왕실 사람으로 존숭을 받고 있었다, 이것이 사실(事實)일 거예요. 추사집(최완수 역, 현암사: 1976)에 보면 추사가 석파에게 보낸 편지 7통이 나오는데 모두 극존칭을 사용하며 존숭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어요.

  

사진의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볼까요?

 

(물 수)(의 약자, 알깔 부)의 합자예요. 물위에 떠있다란 의미예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새가 부화를 위해 알 위에 올라 앉듯 물체가 물 위에 떠있다란 의미로요. 뜰 부.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浮草(부초), 浮標(부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높을 경)(더욱 우)의 합자예요. 돌출적으로[] 높은 언덕이란 의미예요. 높을 취. 이루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유추된 뜻이에요. 높이 성취했다는 의미로요. 이룰 취.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成就(성취), 進就(진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터럭 삼)(머리 혈)의 합자예요. 턱수염이란 의미예요. 수염 수. 모름지기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동음을 빌미로 가차한 경우예요. 모름지기 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必須(필수), 須眉(수미, 수염과 눈썹)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착)(떨어질 타)의 합자예요. 뒤따라간다는 의미예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따를 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隨行(수행), 隨筆(수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마음 심)(뇌 뇌) 약자의 합자예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괴롭다는 의미예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의 약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마음이 괴로우면 머리도 아프다란 의미로요. 괴로워할 뇌.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煩惱(번뇌), 懊惱(오뇌)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하나. 위 추사의 편지에는 생략된 부분이 또 있어요. 그런데 이 생략된 부분이 사실은 추사 편지의 핵심이에요. 석파는 추사에게 난초 치는 법을 배우는 과정중 자신의 작품집 난화(蘭話)에 대한 추사의 품평을 요청했고, 위 편지는 그에 대한 답장이기 때문이에요. 생략된 나머지 부분을 읽어 볼까요?

 

난화(蘭話) 한 권에 대해서는 망녕되이 제기(題記)한 것이 있어 이에 부쳐 올리오니 거두어주시겠습니까? 대체로 이 일은 바로 하나의 하찮은 기예(技藝)이지만, 그 전심하여 공부하는 것은 성문(聖門)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학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일거수 일투족이 어느 것도 도()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니, 만일 이렇게만 한다면 또 완물상지(玩物喪志)에 대한 경계를 어찌 논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지 못하면 곧 속사(俗師)의 마계(魔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가슴속에 5천 권의 서책을 담는 일이나 팔목 아래 금강저(金剛杵)를 휘두르는 일도 모두 여기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울러 큰 복이 있기를 바라면서 갖추지 않습니다. (이상 번역: 위 번역 출처와 동일) 

  

담 둘. 사진의 (기쁠 희)’자는 (뜻 의)’자로 나온 곳도 있더군요. 개인적 생각으론 가, 문맥상, 더 자연스러워 보여요. 사진은 친구에게서 얻었어요. 서각을 가르치는 분이 써 준 것이라고 하더군요.

  

여담 셋. 각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에요. 아버지는 그를 찬양하는 한시를 지어 청와대에 보내셨어요. 저는 후일 아버지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껴 타계하신 뒤 청와대 연하장을 불태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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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찬 2019-09-18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추사와 석파, 그리고 엮으신 분의 인품도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건필하십시오.

찔레꽃 2019-09-19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
 

 

 

 

 

 

처음에 사랑 할 때 / 그 이는 씩씩한 남자였죠 / 밤하늘에 별도 달도 따주마 / 미더운 약속을 하더니 / 이제는 달라졌어 / 그 이는 나보고 다 해달래 / 애기가 되어버린 내 사랑 당신 / 정말 미워 죽겠네 / 남자는 여자를 정말로 귀찮게 하네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인 문주란 씨의 노래  「남자는 여자를 귀찮게 하네」예요. 가사 내용을 보면 여인은 남편이 결혼 전과 너무 다른 모습을 보여 몹시 실망하고 있어요. '씩씩한 남자'인줄 알았는데 '애기'처럼 행동하니 실망스럽기도 할 거예요.

 

그런데 남자는 왜 씩씩했다가 애기가 된 걸까요? 그건 씩씩함 속에 감춰졌던 애기스러움이 드러났기 때문일 거예요. 이걸 그럴듯한 용어로 표현하면 양속에 감춰졌던 음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어요. 양과 음이 균형을 이루면 씩씩함과 애기스러움이 조화를 이뤄 설령 애기스러움이 드러난다 해도 실망스런 수준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둘의 조화가 깨지면 어느 일방적인 면만이 강하게 드러나 실망스런 수준이 되겠죠. 저 노래 속의 남자는 음양의 균형이 깨진 상태라 여인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사진은 후덕재물(厚德載物)이라고 읽어요. 『주역』 곤괘()를 풀이한 해석서 중의 하나인 상전(象傳)에 나오는 내용으로, '후덕함으로 만물을 수용한다'란 뜻이에요. 흔히 건괘() 상전에 나오는 자강불식(自彊不息, 스스로 힘써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쉬지 않음)과 짝을 지어 많이 사용하죠. 자강불식과 후덕재물을 짝지우는 것은 양자가 균형을 맞출 때 온전한 가치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실제 자강불식은 진(進, 나감)의 성격이 강하고, 후덕재물은 퇴(退, 물러남)의 성격이 강하기에 양자는 조화가 필요해요. 일과 휴식의 관계로 환치하면 이를 쉽게 알 수 있죠. 일이 자강불식이라면 휴식은 후덕재물이라고 할 수 있죠. 양자가 균형을 이뤄야 함은 두말 할 필요가 없겠죠?

 

사진의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돌 석)(높을 고)의 합자예요높이가 높은 돌은 두께도 두껍다는 의미예요. 두터울 후.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重厚(중후), 厚顔無恥(후안무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걸을 척)(덕 덕)의 합자예요. 본래 으로 표기했는데, 후에 행동의 의미인 이 추가됐어요. (곧을 직)(마음 심)의 합자예요. 정직한 마음이란 의미예요. 까지 추가하여 풀이하면 정직한 마음이 행동으로 발현된 것이란 의미예요. 덕 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道德(도덕), 德望(덕망)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싣다란 의미예요. (수레 거)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나머지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실을 재.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積載(적재), 連載(연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소 우)(말 물)의 합자예요. 만물이란 의미예요. 만물 중에서 가장 쉽게 눈에 잘 띄는 것이 소인지라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만물 물.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生物(생물), 現物(현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저 노래의 한심스러우면서도 왠지 측은해 보이는 남자를 구제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음양 균형론으로 말하면 아무래도 여인이 좀 더 수용적인 태도를 지녀야 할 것 같아요. 여인에게 너무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 아니냐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 남자는 어디에서도 음의 충족을 얻지 못해 더 퇴행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과도한 씩씩함[광포]을 보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지 않을까요? (여기서는 남자를 놓고 음양 균형론을 말했는데 이는 여성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때는 남자가 좀 더 수용적인 태도를 지녀야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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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이병욱 2018-12-28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찔레꽃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찔레꽃 2018-12-29 07: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도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건필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노인네가 주책이지.”


전 부럽던데요.”


 지난 해 유독 눈이 많이 내린 날 지인 한 분이 적설을 헤집고 새벽 등산한 사진을 페이스 북에 올렸어요. 지인은 60이 된 분이었어요. 그 사진을 함께 본 이웃 분이 혀를 차며 걱정하더군요. 저는 걱정도 됐지만 그의 노익장(老益壯)이 부러웠어요. 그만 훨씬 못한 나이인데도 적설을 핑계로 하루 종일 문 밖을 나가지 않았거든요.


 노익장, 늙을수록 더 씩씩 하다란 이 말은 사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에요. 젊을수록 씩씩하지, 늙을수록 씩씩해지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웃 분도 지인의 새벽 등산을 흉봤을 거예요. 무리수를 두는 행동이라고 본 것이겠죠. 그러나 세상사가 항상 이치대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듯, 늙을수록 더 씩씩해지는 특별한 이들도 있죠. 제 지인도 그런 경우일 거예요.

 

 늙을수록 더 씩씩해진다는 뜻의 노익장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후한의 장수였던 마원(馬援, BC 14 ~ AD 49)이에요. 재미있는 것은 그가 나이든 후에 타인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일찍이 젊은 날 부터 그 말을 마치 자성예언(自成豫言)처럼 했다는 거예요. 조실부모하고 자수성가했던 그는 입버릇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장부가 뜻을 세웠으면 힘들수록 더 분발해야 하고, 나이 들수록 더욱 더 씩씩해야 한다(丈夫爲志 窮當益堅 老當益壯).” 후일 그는 자신의 말처럼 노장군이 되어서도 변경을 개척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많은 성과를 거뒀죠.


 그런데 흔히 나이 들어서 씩씩하고 혈색 좋으면 이렇게 묻곤 하죠. “아니, 뭘 드셨기에 이렇게.” 마원도 뭔가 특별한 것을 먹었을 것 같죠? 맞아요. 특별한 것을 먹었어요. 바로 율무[薏苡仁]였어요. 지금의 티베트와 월남 북부 지역을 정벌할 때 이 특별한 것으로 부하들의 건강을 돌봤고 자신의 건강도 챙겼어요. 귀환할 적에 이를 잔뜩 실어왔는데 사람들로부터 귀한 재물을 실어왔다고 오해를 받아 곤욕을 치루기도 했죠


아니, 기껏 율무를 먹었을 뿐이란 말이야!” 이런 말이 들리는 듯 하네요. 기록에 전하는, 마원이 먹은 특별한 음식은 이것 뿐예요. “, 그럼 나도 오늘부터 율무를.” 이런 말도 들리는 듯 하네요. 하지만 인터넷을 찾아보니 율무는 체질적으로 태음인에게 맞는 음식이지, 모든 이에게 맞는 음식은 아니라고 나오더군요. 이로 미뤄보면 마원은 태음인 체질이었던 것 같고, 그에게 율무를 지급받았던 병사들 중에서 효과를 본 병사는 태음인이었을 가능성이 커요. 다른 체질의 병사들은 그리 큰 효과는 보지 못했을 것 같아요. 그저 배고픔을 면하는 양식 정도였겠죠.


 그런데 정말 마원은 건강을 위해 율무 이외의 다른 음식이나 약은 복용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다만 기록에 나타난 것이 없는 것뿐이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사진의 한자는 노익장을 원하는 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보약을 담은 포장 상자의 글씨예요. 읽어 볼까요? ‘보정강장 만병회춘 연년익수(補精强壯 萬病回春 延年益壽)'라고 읽어요.‘정기를 보하여 튼튼하게 하다. 만병을 치유하여 회춘하고 해마다 수명을 늘이다란 뜻이에요. 보약 상자에 어울리는 문구예요. 그런데 읽고 해석할 분들이 많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차라리 한글로 이렇게 쓰면 어떨까 싶어요. ‘정성껏 드시고 건강하세요!’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볼까요?


 補(의 약자, 옷의)(남자의미칭 보)의 합자예요. 헤진 옷을 수선하여 제대로 만들었다란 의미예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남자의 미칭처럼 수선된 옷은 보기 좋다는 의미로요. 기울 보.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補完(보완), 補充(보충)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精(쌀 미)(푸를 청)의 합자예요. 골라낸 쌀이란 의미예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선명한 푸른색처럼, 골라낸 쌀은 깨끗하고 품질이 좋다는 의미로요. 고른쌀 정. 쌀눈을 의미하는 글자로 보기도 해요. 쌀눈 정. 정기(精氣)라는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쌀눈이란 의미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정기 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精氣(정기), 精粹(정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强(벌레 충)(넓을 홍)의 합자예요. 쌀벌레란 의미예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쌀벌레 정. 강하다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동음을 빌미로 차용한 거예요. 강할 강.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强力(강력), 强弱(강약)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壯(장사 사)(조각 장)의 합자예요. 심신이 건강하다는 의미예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건장할 장.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壯士(장사), 壯盛(장성)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壽(늙을 로)의 약자와 (밭두둑 주) 약자의 합자예요. 긴 밭두둑처럼 오래 살아 나이가 많다는 의미예요. 목숨 수.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壽命(수명), 長壽(장수)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평균 수명이 80을 바라본다고 하죠? 오래 사는 것은 원초적 욕망일 듯싶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게 오래 사는 걸 거예요. 그것이 동물적 장수를 넘어선 인간적 장수일 것이기 때문이죠. 마원의 노익장이 빛나는 것은 그가 노년에 들어서도 젊은 장수를 능가하는 업적을 이뤘기 때문이지, 단순히 늙어서도 튼튼했기 때문만은 아니 듯이 말이죠. 오래 살되 의미 있게 오래 살 것, 평균 수명 80을 바라보는 우리 시대 노년의 중요한 지향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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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vehills 2018-12-16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언 70이 다가온 무심한테 정말 도움 되는 좋은 글입니다.

찔레꽃 2018-12-17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께 도움이 되다니, 영광입니다. ^ ^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건강 유의하셔요. 아드님도 빨리 쾌차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출처: http://www.seoul.co.kr>

 

 

"주남(周南), 소남(召南)을 모르면 담을 마주한 것과 같단다."

 

공자가 아들 백어의 시(詩) 학습을 독려하면서 한 말의 일부예요. 당대 사회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언급이기도 해요. 시가 소통의 매개체였기에 그것을 모르면 타인과 소통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죠. 아이들 세계에서 게임을 모르면 다른 아이와 소통하기 어려운 경우와 비슷하다고나 할까요? 공자는 소통이 불가능한 처지를 '담을 마주함'으로 비유했어요. 여기 '담'은 전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띄고 있죠. 막막함, 답답함…  대체로 부정 이미지가 강한 것이 담이죠. 담이 긍정적 이미지로 사용된 경우도 있을까요?

 

사진은 담, 정확히는 벽의 긍정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사례예요. 흔치는 않을 듯 싶어요. 한자를 읽어 볼까요?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를 본받아 벽처럼 (굳게) 서다, 란 뜻이에요. (내) 집안엔 증자와 주자만 벽처럼 서 계실 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란 뜻으로도 풀이할 수 있어요. 우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그가 한양에서 벼슬살이 할 때 머물던 집의 바위에 새긴 글씨예요(현 위치 명륜동). 무슨 의미일까요? 증자는 공자의 도통을 이은 인물로 알려져 있고 주자 역시 이 도통 계보에 위치하는 인물이죠. 특히 주자는 성리학을 건국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 그 어떤 유학자보다 숭상되었던 인물이죠. 이 문구는, 한 마디로, 유학의 이념을 - 구체적으로는 성리학(주자학)의 이념을 - 한 치의 흔들림없이 굳게 지키겠다는 신념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송시열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죠. 시대의 변화를 도외시한 채 형해화된 이념만을 고수한 극단적 보수주의자로 보는 시각과 가치의 혼란 시대에 명확한 이념 제시로 사상을 통일시켜 안정을 도모하려했던 정통 유학자로 보는 시각이 그것이죠. 둘 다 맞는 평가라고 생각해요. 모든 존재는 양면성을 지니기에 가치의 척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죠. 저 문구도 송시열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벽(담)의 긍정적 이미지와 무관하게, 양면의 시각으로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송시열을 거시적 시각으로는 부정적으로, 미시적 시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요. 거시적 시각은 역사의 흐름을 염두에 둔 언급이고, 미시적 시각은 개인적 신념을 염두에 둔 언급이에요. 임진, 정유, 병자, 정묘호란으로 이어지는 국난의 시기에 사림의 영수로서 수명을 다한 성리학(주자학적) 이념만을 고수하여 국정이 경색되도록 영향을 끼친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지만, 자신의 가치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점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봐요(송시열은 숙종 때 사약을 받고 죽는데, 여기에는 그의 이런 면모가 큰 요인으로 작용했어요).

 

사진의 한자를 자세히 살펴 볼까요?

 

曾은 결론을 짓게 되어 편안한[八, 기가 분산되는 모양] 마음으로 사용하는[曰, 가로 왈] 조사인 '이에'라는 뜻이에요. 八과 曰 이외의 부분은 음을 담당해요. 이에 증. 시루를 그린 글자로 보기도 해요. 曾은 '일찍, 더하다' 등의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시루'라는 의미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시루 증. 일찍(더할) 증. 曾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未曾有(미증유), 曾益(증익. 보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朱는 목심(木心, 나무 속)이 붉다는 의미예요. 목심은 木(나무 목)으로, 붉다는 의미는 丿과 一로 표현했어요. 붉을 주. 朱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印朱(인주), 朱雀(주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壁은 土(흙 토)와 辟(밝힐 벽)의 합자예요. 벽이란 의미예요. 土로 의미를, 辟으로 음을 표현했어요. 벽 벽. 壁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巖壁(암벽), 壁報(벽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立은 사람이 지면 위에 양발을 디디고 가만히 서있는 모양을 그린 거예요. 설 립. 立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直立(직립), 立場(입장)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어릴 때 선친에게 들었던 송시열에 관한 일화 한 토막. 송시열이 중병에 걸렸을 때 정적이었던 허목에게 처방전을 의뢰했어요. 처방전을 받아온 아들은 기겁을 했어요. 극약인 비상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들은 분노했지만 송시열은 아무 말없이 처방전대로 약을 달여오게 했어요. 놀랍게도 송시열은 쾌차했어요. 허목은 왜 송시열에게 비상을 넣은 약을 처방했고, 송시열은 왜 아무 말없이 그것을 복용했을까요? 허목은 송시열이 평소에 속열을 삭히기 위해 어린아이의 오줌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때문에 오줌 적이 내장에 끼였을 그에게 평범한 약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여 극약을 처방했던 거예요. 송시열 역시 허목이 비록 자신과 정치적 대립 관계에 있지만 결코 야비한 수를 쓰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극약 처방을 받아 들였던 것이고요. 허목과 송시열의 인간적 됨됨이를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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