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도 중요하지만 형식도 중요하지."

 

오래 전. 서울에 올라가 연수를 받고 있었어요. 어느 날 한 동료가 제게 저녁을 샀어요. 동료는 서울서 근무하다 지방으로 내려왔어요.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 마디 했어요. "이렇게까지 안해도 되는데…" 그러자 동료는 웃으며 "내 구역에 왔는데 그럴수 있나?" 하면서 무슨 말인가를 하던 끝에 저 말을 했어요.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어요.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좌우할 수도 있지." 연수받느라 고생한다는 위로의 마음이나 말도 중요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밥 한 끼 사는 행위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며, 때로는 그 행위가 마음이나 말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강조한 거였어요. 

 

시를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면, 보통은 내용을 우선시할 거예요. 그러나 저 동료의 말을 대입하면, 때로는 형식이 우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발 더 나아가 형식이 내용을 좌우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여기 형식은 표현 방식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에요.

 

사진은 추사(秋史)의 작품으로 만들어진 병풍의 일부분이에요. 제사용 병풍으로 제작되어 시중에 판매되는 것인데, 병풍 마지막에 추사라는 낙관이 있더군요. 제사용 병풍으로 판매되는 것이라 추사의 진적(眞迹)이 아닌 것은 분명해요. 추사의 진적 복사본을 또다시 복사하여 만든 것이거나, 진적 임서본을 복사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돼요. 혹은 추사체를 모사하여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글씨의 진위를 알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단지 추사의 시가 맞을까 하는 생각만 했어요.

 

시를 100번 가량 소리내어 읽어 봤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표현이 많이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표현이 어색하니 내용은 도외시 되구요. 음식 그릇이 깨끗지 않으니 음식에 별 구미가 당기지 않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시를 읽어 볼까요?

 

高齋晴景美  고재청경미   높은 정자 개인 경치 아름답고

淸氣滿園林  청기만원림   맑은 기운 원림에 가득하여라

倚杖寒山暮  의장한산모   지팡이 짚고 거니는데 한산은 저물녘

開門落照深  개문낙조심   문을 여니 낙조 짙었네

 

이 시는 이른 시간에서 늦은 시간까지 그리고 높은 공간에서 낮은 공간까지 자신이 바라본 경치를 그렸어요. 이렇게 시공간의 변화를 주면서 경치를 그린 건 경치의 미감을 독자에게 잘 전달하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그런데 압축을 중요시하는 한시에서는 시공간의 변화를 굳이 다 설명할 필요가 없어요. 일부분만 표현하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도 충분하죠. 이런 면에서 이 시는 실패했어요. 첫째 구에서 비개인 산뜻한 경치를 표현했는데 이 내용을 둘째 구에서 반복하고 있고, 셋째 구에서 저물녘의 풍경을 그렸는데 이 내용을 넷째 구에서 반복하고 있어요. 이 시는 첫째 구와 셋째 구 만으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는 시예요.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도 돼죠. 아울러 이 시의 치명적인 실수는 첫째 구의 '아름답고[美]'란 표현이에요. 풍경의 아름다움을 시 전체를 통해 독자가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해야지 시인 스스로가 아름답다고 말해 버리면 그건 시가 아니라 산문이죠.

 

이 시의 또 다른 표현 실패는 계절감을 나타내는 시어의 일관성없는 사용이에요. 첫째 구의 '개인 경치' 둘째 구의 '맑은 기운' 셋째 구의 '한산' 넷째 구의 '낙조'는 이 시의 계절적 배경이 언제인지 헛갈리게 만들어요. 첫째 구와 둘째 구의 시어를 보면 계절이 여름인 것 같은데, 셋째 구와 넷째 구의 시어를 보면 계절이 가을인 것 같거든요.

 

이 시가 추사의 진작(眞作)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읽을수록 느껴지는 표현의 어색함을 생각하면 추사의 진작이 아닐 것 같아요. 백 번 양보하여 추사의 진작이라 해도 표현에 있어선 그다지 후한 평가를 주기 어려워요. 

 

낯선 한자를 두어 자 자세히 살펴 볼까요?

 

齋는 示(神의 약자, 귀신 신)과 齊(가지런할 제)의 합자예요. 제사 전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의미예요. 示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齊는 음(제→재)음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한다는 것은 그 둘을 가지런히 일치시키는 것이란 의미로요. 재계할 재. 제사를 지내는 집 혹은 서재란 뜻으로도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제실 재. 서재 재. 齋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書齋(서재), 齋戒(재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倚는 人(사람 인)과 奇(기이할 기)의 합자예요. 타인에게 의지한다는 의미예요. 人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奇는 음(기→의)을 담당해요. 의지할 의. 倚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倚子(의자), 倚支間(의지간, 처마끝에 잇대거나 집채의 원간에 기대어 늘여 지은 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杖은 木(나무 목)과 丈(길이 장)의 합자예요. 기다란[丈] 지팡이[木]란 의미예요. 지팡이 장. 杖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几杖(궤장, 안석과 지팡이. 공로많은 노대신에게 내리던 상), 短杖(단장, 짧은 지팡이)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여담. 위 시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는데, 꼭 그렇게만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예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어요. 표현의 절제미를 상실한 것은 충분한 미감 전달을 위해 부득히 사용한 것이고, '아름답고'란 직설적 표현 또한 그 이상의 표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풍경이 아름답기에 부득히 사용한 것이며, 계절의 미감을 살리지 못한 표현은 있는 그대로 그릴 뿐 일관성을 염두에 둔 작위적 표현을 배제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이 시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저만의 편견에 불과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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