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산에 대나무가 있는데 여리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곧고, 그것을 잘라서 쓰면 견고한 갑옷과 투구도 뚫을 수 있소이다. 이런 것으로 말한다면 도대체 배움이 무슨 필요가 있겠수!"
"대나무 화살에 깃털을 꽂고 화살촉을 숫돌에 갈아서 쓴다면 그 뚫는 것이 더 깊어지지 않겠는가?"
자로가 공자를 처음 찾아와 만났을 때 나눴던 대화의 일부분이다(출전: 『공자가어』). 배움의 무용과 유용을 두고 불꽃튀는 진검 승부를 겨뤘다. 승부는? 알다시피, 공자가 이겼다. 이후 자로는 긴 세월 '고난의 행군'을 함께 한 몇 안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고, 정적의 칼에 맞아 죽을 때도 "선비는 관(冠)을 벗어서는 안된다"며 떨어뜨린 관을 찾아쓰고 죽었다. 스승의 교화와 교육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그런데, 만일 자로가 원래 자신의 생각대로, 공자의 견해에 무릎을 꿇지 않고, 살았다면 어땠을까?
난설헌(蘭雪軒) 허초희(許楚姬, 1563-1589)는 요절한 천재 여류시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사후 문집인『난설헌집(蘭雪軒集)』은 조·중·일의 베스트셀러였다. 여성교육이 등한시되던 중세에 그녀는 당대 어느 사족(士族)의 남성못지 않은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허엽과 오빠 허봉의 영향이 컸다.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불린 이달의 지도를 직접 받기도 했다. 자로처럼 화살에 깃털을 꽂고 화살촉을 숫돌에 간 격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삶은 어떠했나? 그녀는 생전에 세가지 한을 말했다고 한다. "어째서 여자로 태어났는가? 어째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는가? 어째서 조선 땅에 태어났는가?" 불행한 삶을 조목조목 들먹이지 않아도 그녀의 삶이 어땠을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전해지는 말이니, 진위를 확실히 가릴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녀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방증한다). 만일 그녀가 수준높은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즉 자로가 말했던 '남산의 대나무'처럼 그냥 살았다면 어땠을까?
사진은 난설헌 허초희의「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다)」이다. 이 시는 꽤 긴 서문(序文)을 갖고 있다. 시의 이해를 위해 읽을 필요가 있다.
을유년(1585) 봄에 나는 상을 당해 외삼촌 댁에 묵고 있었다. 하루는 꿈속에서 바다 가운데 있는 산에 올랐는데 산이 온통 구슬과 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많은 봉우리들이 겹겹이 둘렸는데 흰 구슬과 푸른 구슬이 반짝였다. 눈이 부셔서 똑바로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산봉우리 사이로 오색빛 영롱한 무지개 구름이 서려 있고 그 아래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시냇물을 따라 올라가니 갖가지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과 풀이 피어 있고 난새와 학, 공작과 물총새들이 좌우로 날며 춤을 추었다. 숲속 나무들의 온갖 열매에서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가 산속에 가득했고, 기암절벽 사이로 폭포수가 쏟아져 내렸다. 구슬 같은 물방울들이 부딪치면서 옥쟁을 타는 듯한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산정에 도착하니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온통 푸른빛이었다. 홀연히 붉은 해가 바다 위로 쑥 솟아올랐다. 산봉우리 꼭대기에는 맑은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피어있었다. 신묘한 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다가가니 우산처럼 큰 연잎이 서리를 맞아 시들고 있었다. 붉고 푸른 무지개 치마를 입은 선녀 둘이 나타났다. "여기는 광상산이옵니다. 신선 세계 십주(十洲)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옵니다. 낭자에게는 신선의 인연이 있어 이곳까지 오신 것이니 시를 지어 이 일을 기록하소서!" 그 말에 절구(絶句) 한 수를 읊자 두 선녀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한자 한자 모두 신선의 글이나이다!" 갑자기 하늘에서 붉은 구름이 떨어져 산봉우리에 걸리고 둥둥 북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일어나니 선녀는 간데없고 싸늘한 이불 속이었다. 베개 밑에는 여전히 아지랑이 기운이 서려 있었다. 태백의「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姥吟留別)」에 비견하긴 어렵겠지만 그런대로 써본다. (번역 출처: https://blog.naver.com/leesobia/221307008861 및 윤지강,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예단:2009) )
사진의 시를 읽어보자.
碧海浸瑤海 벽해침요해 푸른 바닷물이 옥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청란의채란 푸른 난새가 오색 난새와 어울리네
芙蓉三九朶 부용삼구타 연꽃 스물일곱 송이
紅墮月霜寒 홍타월상한 붉게 떨어지니 달빛이 서리 위에 차가워라 (번역 출처: 윤지강, 『난설헌, 나는 시인이다』(예단:2009) )
작시의 배경이 서문에 자세히 나와 있기에 굳이 사족을 달 필요가 없다. 이 시는 유선시(遊仙詩)이다. 유선시는 현실도피적인 시인데,『난설헌집』에 수록된 상당수가 유선시이다. 허난설헌이 현실도피적인 유선시를 다수 지었다는 것은 그녀를 둘러싼 환경과 자신의 삶이 그만큼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반증한다. 앞서 인용한 그녀의 세 가지 한탄과 맥을 같이 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질문을 해본다. 만일 그녀가 수준높은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성급히 어떤 답을 찾자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교육이 삶의 행복과 얼마나 상관성이 있는지 한 번 되짚어보고 싶은 것 뿐이다. 만일 그녀가 수준높은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鸞, 朶, 墮가 낯설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자.
鸞은 鳥(새 조)와 變(변할 변)의 약자가 합쳐진 것이다. 봉황과 유사하나 성장하면서 털 빛깔에 변화가 생겨 봉황과 다른 모습이 되는 새란 의미이다. 난새 란. 상상의 새이다. 鸞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鸞鳳(난봉, 난새와 봉황. 뛰어난 선비를 비유), 鸞駕(난가, 난새가 끄는 수레. 천자가 타는 수레를 비유) 등을 들 수 있겠다.
朶는 木(나무 목)과 꽃이나 열매 가지가 늘어진 모양을 표현한 乃의 합자이다. (꽃이나 열매) 가지가 늘어졌다는 뜻이다. 가지라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늘어질(가지) 타. 朶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花朶(화타, 꽃이 핀 가지), 紅雲朶(홍운타, 빛이 붉고도 두꺼운 국화) 등을 들 수 있겠다.
墮는 土(흙 토)와 隋(제사고기 나머지 수)의 합자이다. 성벽이 무너졌다란 의미이다. 성벽 소재인 토석(土石)의 의미를 담은 土로 뜻을 표현했다. 隋는 음(수→타)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제사지낸 고기 부스러기처럼 성벽이 허물어진 상태란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무너질 타. '떨어지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의미이다. 떨어질 타. 墮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墮落(타락), 墮淚(타루, 눈물을 흘림)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혹 여성 교육을 무시하자는 의견으로 이 글을 읽으신 분이 없기를(당연히 없을 것으로 믿지만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서 말씀드린다)! 한 불행했던 천재 여류 시인의 시를 읽으며 문득 배움과 행복의 상관성을 한 번 떠올려 본 것 뿐이다. 유달리 교육열이 높은 우리나라이기에 더더욱 이 질문을 던져본 것이다. 사진은 다음 사이트에서 빌렸다. https://www.pinterest.co.kr/choi7shinc0291/%ED%95%9C%EC%8B%9C%EB%AA%A8%EC%9D%8C/ 글씨가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