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히 왔다 간다."


걸레 스님 중광(重光, 1934-2002)의 비명(碑銘)이다. '괜히'라는 부사의 사용이 절묘하다. 덕분에 유머러스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말이 되었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한 세상 살다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을 뜨는 것이 인생이다. 한 세상 사는 동안은 우리 의지대로 사는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얼마만큼이나 우리 의지대로 살았는지 회의감에 젖게 된다. 이래저래 인생은 아무런 실속이 없는 공허한 것이다. 그러니 '괜히'라는 말을 붙여도 대과없다. 농담같이 들리지만 삶의 본질을 꿰뚫는 비수같은 말이다.


언젠가 나도 세상을 뜰 것이다. 나도 멋진 비명, 아니 유언을 한 마디 남기고 싶다.


사진은 베트남 응우옌 왕조 말기 황제 카이딘(啓定, 재위 1916-1925)의 황릉 명문(銘文)이다. 묘비명이라해도 무방하다. 그가 직접 남긴 것은 아니고, 신하들이 남긴 걸게다. 무슨 내용일까?



四面獻奇觀風景別開宇宙 사면헌기관풍경별개우주   사면 풍경 기이하니 신천지 열린 듯하고

億年種旺氣江山張護儲胥 억년종왕기강산장호저서   영원할 늠름 강산 서있으니 이 궁은 영원토록 보호되리



황릉이 오래도록 유지되길 기원하는 소원문이다. 그러면 묘비명이 아닐까? 소원문이지만 묘비명이라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면 뭐라 해석해야 할까? 영원히 살고지고이다. 죽어서도 명전(冥殿)이 지속되길 원했다면, 살아서는 오죽했을까? 비영속의 삶이 영속하기를 기원하는 것은 과욕이다. 과욕은 추하다. 소화불량에 걸린 이의 똥빛 안색과 같기 때문. 자신들이 섬긴 황제에게 올린 최대의 공사(恭辭)였겠지만 최대의 허사(虛辭)란 생각이 든다. 설령 황제 자신이 생전에 원했다 해도 말이다.


삶은 왔다 가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 이를 거스르는 것은 추하다. 카이딘 황릉은 화려하다. 그러나 화려하기에 더 추하다. 자연스러움을 어겨 영속을 원했기 때문. 당장도 편히 쉬어야 할 유택(幽宅)에 이국의 관광객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추함이 초래한 업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儲, 胥가 낯설어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자.


儲는 亻(사람 인)과 諸(모두 제)의 합자이다. 쓰임에 대비한다는 의미이다. 亻으로 뜻을 표현했다. 諸는 음(제→저)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한다. 쓰임에 대비하기 위해선 여러가지를 준비해 둬야 한다는 의미로 본뜻을 보충한다. 쌓을 저. 儲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儲輔(저보, 왕세자), 儲積(저적, 저축) 등을 들 수 있겠다.


胥는 月(肉의 변형, 고기 육)과 疋(발 소)의 합자이다. 게살을 이용해 담근 장(醬)이란 의미이다. 月으로 뜻을 표현했다. 疋는 음(소→서)을 담당한다. 게장 서. 지금은 '돕다'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유추된 의미이다. 게살장은 입맛을 돋는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도울 서. 胥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 胥吏(서리), 象胥(상서, 역관) 등을 들 수 있겠다.


여담. 신천지 교단이 코로나 확산의 주범으로 몰려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여러 정보를 취합해 보면 정상적인 교단이라 보기 어렵다. 재미있는 것은 이 교단의 주된 주장이 '영생'이라는 것. 그것도, 살아서! 비영속의 존재가 영속을 바라는 건 과욕이다. 과욕을 부리면 추해진다. 추해지면 (常道)를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된다. 신천지의 비정상적 교단운영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런만큼 이 교단에 대한 해법 또한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영생의 과욕 포기가 그것. 신천지 교단에 대한 표면적 해결책은 사법 혹은 행정적 조치이겠지만 심층적 해결책은 이 간단한 '인식 전환'이 될수도 있다. 그러나, 간단하다고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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