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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영어 2.0 - 7.9급 공무원 및 경찰 시험 대비
강수정 지음 / 빛과소금(CH기획)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영어는 수험생들만을 괴롭히는 과목이 더 이상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에 누구나 끼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영어라는 언어가 우리말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영어를 강건너 존재하여 나와는 무관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막상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책을 고르려고 서점에 가면 수많은 영어책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데. 어떤 것을 골라야 하는지 난감하다. 영어를 회화 위주인지, 시험용인지 등의 어떤 목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선택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일에서 그렇치만 영어책에서도 잘못 선택된 것은 금전적, 시간적 손해일 뿐만 아니라 영어의 길을 잘못된 오솔길로 인도할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신중함이 요구된다.

 

강수정 시리즈 영어는 다른 기존의 영어책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즉 '살아 있는' 영어를 구사하고 있다. 일본식 영어 문법을 탈피하여서 기존의 5형식 체계를 완전히 탈피하였다. 또한 기본 원리에 충실해서 고등학교 때 영어 좀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이들에게는 구멍난 부분들을 메꾸어 줄 수 있다. 특히 '공통영어'는 영어에 대한 입문서(?)로 삼기에는 매우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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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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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민주주의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이론적인 면에서나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는 우리의 현대사를 보더라도 명확하다. 우리 헌법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87년의 6월 항쟁의 숭고한 정신으로 탄생한 현행 제9차 헌법에는 '실질적 민주주'의 정신이 녹아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원칙이 준수되는 '과정'상의 민주주의 뿐만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도출된 '결과'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 직선제 이후에도 국회에서는 수 십번의 날치기가 있었다. 그 때마다 날치기하는 다수당은 항상 민주주의를 이유로 내세우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반대로 소수당은 날치기는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라고 규정하였다. 같은 민주주의를 두고 서로 아전인수식의 주장을 하였다. 무식하고 가난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런 정치상황에 혼란에 빠지고 자신들의 이해타산에 따른 지지와 반대를 한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정치놀음의 장난감이 되어 버린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2차 세계 대전 때에 히틀러도 민주주의를 통해서 권력을 잡았고 독일이 패망하는 날까지 민주주의에 의해서 독일을 이끌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혼란한 독일을 재건하기 위해 등장한 히틀러의 배후는 자본주의자들이었다는 것도 놀랄만한 사실도 아니다. 세계를 대혼란으로 빠뜨리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데 일조한 것이 자본을 배경으로 한 민주주의자들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가 매우 취약한 정치 논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다만 그만큼 민주주의라는 정치 논리는 얼마든지 정치 권력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단점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민주주의 자체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이제는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이 매우 당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현재의 모습을 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가 흘렀다는 것을 모른다. 또한 그 역사만큼이나 얼마나 많은 종류의 민주주의의가 있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땅에 민주주의는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봇물이 터지듯이 매우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한 꺼번에 그것도 일시에 등장하였다. 그래서 어떤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이고 오류가 적은 민주주의이고 인간을 위한 민주인가에 혼란을 빠드리고 말았다. 모든 형태의 민주주의는 정치의 실험장에서 도마에 놀랐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라는 그 개념을 알기 위해서 책을 한 두권 접하면 얼마나 그 난해함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아무나 쉽게 말하는 민주주의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가 있어서 언제든지 기득권의 지배 논리에 이용당할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 가난한 자 그리고 국가의 역학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논쟁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전체주의의 대립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民意라는 아주 그럴 듯한 포장에 자유주의, 전체주의도 민주주의를 차용하면서 가난하고 무식한 백성들을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민주주의는 시대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사상과 결합을 하여 다양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자본주의 내에서 민주주의는 대립되는 논리였던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프랜차이즈인 '평등'을 차용하였지만 그대로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입맛에 따라서 각색을 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평등은 기회의 균등을 말한다. 그런데 기회의 균등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의 자유, 가진 자들만이 누리고 가난한 자들은 누릴 수 없는 형식적인 평등이다. 사회적 성공의 '기회'는 '교육'이 있어야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기회만 있을 뿐이고 실제로 돌아오는 몫은 없다. 이는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도 과거를 볼 기회가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백성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기도 힘든 판에 어느 세월에 공부를 하고 과거에 급제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자유주의가 말하는 평등은 어리석은 국민들을 눈속임 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평등'은 자유주의자가 말하는 기회의 평등, 산술적 평등이 아니며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민주주의에 내재된 평등은 양자를 절충한 기하학적인 평등을 말한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공동 영역을 공유하고 이 영역을 탈정치화시켜 국가의 일반적 성향을 거부하는 공적인 활동이다.(p154) 이는 '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의 평등과도 궤를 같이 한다. 

더구나 민주주의는 그 시대의 사회적 환경과 관련되면서 기득권의 논리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변태적 형태의 민주주의를 도출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나치 시대에 많은 헛점을 보인 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의 피를 불렀다. 이에 화들짝 놀란 법학자와 철학자들은 진일보한 민주주의를 만들어 냈다. 현재 우리 법학계와 헌법재판소분만 아니라 민주주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이고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이다. 즉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사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공영역의 확대 과정이다. 여기서 공공영역의 확대는 소위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에 대한 국가의 잠식을 의미하지 않는다.(p114) 민주주의는 공공영역에서 인간의 평등을 공동 생활의 다른 분야, 특히 자본주의적 부의 무제한성이 지배하는 분야로 확대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여기서 개인의 자유는 사회 내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만의 자유가 아니라 향유해야 할 권리를 갖지 못하는 인간들의 권리이며 동시에 자신들이 가지지 말아야 할 권리를 향유하는 시민들의 권리를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체제는 단순히 조악한 통치형태나 정치생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p87) 형식적 민주주의가 혐오스럽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그 민주주의는 공동체 내에 존재하며 잘 정돈된 통치구조와 대립되는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구조만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형태의 구조를 수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개인들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니다. 민주적 과정에서 통치는 서로 대립하는 특수성 사이에서 대화와 토론이라는 논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다움이라는 보편성을 끊임없이 사용하는 과정으로 인간의 주체화라는 틀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즉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은 각각의 위치를 끊임없이 변동하는 과정을 거친다. 민주주의에서 통치자는 통치받는 것처럼 보이고 통치받는 자는 통치자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에서 통치자는 공공의 차원이나 권력을 사유화하여서는 안된다. 최악의 정부는 바로 권력만을 지향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능숙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정부를 의미한다.(p155)  

현재 우리 헌법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차선의 선택이라고 중,고등학생 시절에 끊임없이 세뇌당하였다. 실제로 대의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자들 내에서 권력을 양분하기 위해서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다.(p155)  대의제는 공공영역을 담당할 권한을 가진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선거라는 과정을 거친다. 제한선거에서 출발한 대의제는 민주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방향 전환이 되었다가  다시 민주주의에 의해서 재정복되어 보통선거라는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발전하였다. 제한선거는 일정한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 보통선거는 누구나 선거권을 가지기 때문에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선거는 경제적 많은 경제적 비용이 필요하다. 선거에는 상당한 액수의 비용이 필요하여 실질적으로는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자들만이 당선의 접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대의제는 권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조건에서만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이다. 결국 선거는 형식적 평등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 원래 대의제는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p119) 대의제라는 선거를 통해서 지배층은 생명의 위협이 없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대의제의 본질을 이미 간파한 장자크 루소는 시민정부론에서 간접 민주정을 반대하고 직접 민주정을 주장하였다. 현재 스위스와 같은 일부 선진국에서는 직접 민주정치를 하고 있다. 

고대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고대 아테네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민주주의가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하나가 플라톤이다. 그는 아테네 시민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도 당시 소피스트의 인기를 압도하지 못하였다. 민주주의가 증오시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민중의 통치하에서는 모든 질서가 파괴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p21) 여기에서 '질서'라는 것은 현재의 권력 분점 상태를 의미한다. 신분과 권력의 특권이 사라지고 권력에 접근성이 민주화된다면 자신들의 현재의 프리미엄은 세습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이는 군사 독재 시절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자를 빨갱이로 매도하였던 자들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들은 항상 민주화 운동은 사회질서를 해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나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면서 민주적 절차를 통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시행되자 이번에는 새로운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에 반대되는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사실 포퓰리즘은 민주적 정당성과 과두제적 정당성이 악화된 모순을 은폐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용어이다.(p167) 이를 통해서 자유주의자들은 지배적 합의사항에서 모든 것들을 제어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지 않다.(p156)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에서는 대규모 민영 언론 사주들이 언론의 공적 기능을 활용하여 대중매체를 장악하였다. 이들은 끊임없이 정치적 반대자들의 사상을 검증하려고 한다. 기득권층은 모든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논리로 정치적 상대방을 이데올로기의 덫을 씌우려고 한다. 권력은 자신들이 독점 상태에 있는데, 권력의 분점을 요구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에 광신적 반응을 보이며 민주주의에 증오를 표방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 교과서도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조작하려고 한다.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화를 주장하던 자들을 이데올로기의 덫을 칠해서 빨갱이로 몰아부치던 자들이 권력을 잡자 자신들이 마치 이 나라의 민주화의 화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들에게 자본의 무한한 축적은 곧 신앙이고 그 수단으로 토론이라는 정치를 몰아 내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역사에 비친 눈이 꽤나 무서웠는가 보다.

해방 이후와 미완의 혁명 '4.19'와 1987년의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항상 맨 앞에 섰다. 그 때의 민주주의는 친일 '독재'와 군사 '독재'에 항거하는 의미로써의 민주주의였다. 그 당시에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포함하는 의미의 민주주의였다. 지금처럼 소수의 독점 대기업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유'는 당연히 '민주주의'의 하부 개념이었다. 당시 지식인과 민중들은 지금같이 탐욕스러운 '자유주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무절제한 자유, 합법을 가장하여 타인의 것도 빼앗는 자유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오로지 자유가 부족했던 시대는 당연히 민주주의가 최상의 가치였다. 이제 장기 집권이나 군사 독재는 흔적만 남기고 갔지만 그 때의 잔존 세력은 여전히 활기를 치고 있다. 그들은 독재시절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자유민주주의, 가짜 민주주의를 당시의 구호로 만들려고 한다. '민주주의'에 '자유'라는 이름을 덧붙여서 역사를 각색하려고 한다. 그들은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조작하는 중국과 수많은 역사서를 조작하며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아니 그들보다 더 나쁘다고 보아야 한다. 두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만 독재의 흔적들은 국가를 학대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을 만끽할 경제적 여유도 없는 가난하고 무식한 국민들은 '자유'는 무조건 좋은 줄만 알고 뇌화부동하고 있다. 가짜 민주주의가 최고의 굿판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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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문재인의 운명
문재인 지음 / 가교(가교출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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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중지


우리는 흔히 바다를 생성의 어머니라고 한다. 바다는 원시의 모든 생명이 시작된 곳이며 바다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녹아서 융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는 선하고 악한 것, 온순하고 거친 것, 진실되고 거짓된 것을 포함하여 어떤 존재도 거부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바다를 향해서 가고 강물도 예외는 아니다. 강물은 육지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을 보고 느끼며 껴안고 바다로 간다. 여기에는 인류의 오랜 세월 동안의 치욕과 영예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강물을 역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그 흐름은 평탄하지만은 않다. 수면은 도도하게 조용히 흐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굉음을 내면서 천지를 요동치게 한다. 어느 순간에라도 깊은 곳에서는 소용돌이가 온갖 잡스러운 것들을 뒤섞여 놓고 갈등을 아우르면서 어떤 것도 강물의 위대함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강물의 진면목이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의 피상적인 면보다는 그 강물 속에 잠재된 측면을 통찰하여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하였다. 역사는 매순간이 정과 반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반목이 물결을 이룬다. 그  역사의 강물, 대한민국의 강물에 조각배 하나가 나타났다. 그 배는 기름이 있어야 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지지'라는 민주주의가 있어야 만이 앞으로 갈 수 있는 배였다. 돈과 권력을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론조작이나 매수의 힘이 아닌 국민의 힘이 없는 경우에는 곧바로 침몰하는 배였다. 그 배의 선장, 노무현은 가난하여서 공부에 매달리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고 온갖 고문과 인권 유린의 군부독재, 잔인한 기득권에 항거하였다. 그는 줄곧 아웃사이더였으며 매번 총선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으나 차차 그의 진정성은 세상에 알려지고 수많은 조그마한 노란 돼지 저금통이 모여서 참여정부라는 깃발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는 '강물처럼'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p464) 그것은 말로만 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토론과 설득이라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

강물은 아무리 굽이쳐도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눈, 코, 입을 베어가는 겨울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간다. 그 곳에서 추위는 혹독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다가오는 감각은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사람은 추위라는 감각을 항상 외적인 피부로만 느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 두 명의다. 감각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심리적 상태에 달라지는 경우가 흔하다. 예컨데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왔으나 봄이 왔다고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인 이상화는 온몸에  햇살이 내리쬐고 보리밭은 가뿐하며 나비, 제비가 깝치는 봄이 찾아 왔으나 들을 빼앗겨 봄도 빼앗겼다고 했다. 자연의 봄에는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만은 그렇지 않다.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 역사적 사건이 이 땅의 역사에서는 비일비재 하게 일어났다. 30년 전에 독재자의 저승 행차로 정치적 봄이 온 것으로 생각하여 '서울의 봄'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정권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민주 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서 권력을 위한 권력이 아닌 국민을 위한 권력이 행사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일시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서민을 위한 권력자는 서민의 배신을 당하고 서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의 음모에 빠져서 갈귀갈귀 찢겼다. 그 때야 살아 있는 권력자의 본 보습을 보기 시작하였지만 기차는 이미 떠난 후였다.  

눈보라가 북방과 남방에서 세차게 몰아 치는 겨울 밤은 혹독하다. 남방에서 부는 신자유주의 바람과 북방에서 부는 '핵'을 통한 협박의 바람이 만나는 길목에 자리잡은 노무현은 한 나라의 지도자라로서 온갖 고뇌를 짊어지면서도 때로는 비분강개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냉정한 마음으로 양날의 칼을 바로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가난한 민주주의에 부는 수구의 외풍과 진보의 내홍은 서럽게만 다가왔다. 사회 밑바닥에 흐르는 도도한 보수적 풍토와 여론을 주도하는 강고한 수구세력과 욕하고 외면하는 진보세력에 노무현은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 있는 외로운 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존재로 혼자 살아남는다는 것은 신체적, 정신적으로도 힘들 뿐만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어렵다. 특히 심리적인 극복 의지는 바람 앞의 초불처럼 나불거릴 뿐이다. 이 때는 정말로 온 가족이 함께 항 수 있는 따끈따근한 아랫묵이 절로 절실하다. 이런 때에 바로 옆에 자신과 함께 자신의 길음에 보조를 맞추거나 최소한 자신에게 응원을 보내 주는 존재는 전투에 임하는 장군에게 千軍萬馬의 가치 이상이다. 즉 친구의 존재는 치열한 경쟁과 어둠의 세력과 생사를 벌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존재이다. 공자는 인생에서 자신을 알아 주는 진정한 친구가 3명 이상이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정도였다. 바보 노무현은 자신 보다 여섯 살이나 어리고 고시 5년 후배인 문재인을 한치의 망설임 없이 '노무현의 친구'라고 불렀다(p31).

바보 노무현의 친구의 인생에서 노무현은 무엇인가? 또 하나의 30년 지기의 '운명'은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외나무 다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친구의 눈에 비친 바보 노무현을 본다. 바보 노무현은 자서전 '운명'을 출간하였지만 자신이 직접 탈고한 것이 아니어서 정치적 현황이나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 그의 심적 상태나 마음가짐을 알 수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비록 친구의 눈이라는 간접적인 매개체를 통해서 비쳐지는 그의 모습이지만 지금은 이것만이라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노무현의 친구는 중, 고등하교 6년간 무척 많은 책을 읽었다. 학교 성적에 악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하지밤 독서를 통해 세상을 알게 되었고 인생을 알게 되고 사회 의식도 생겼다. 가난했던 시절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학 시절 그리고 시위 전력으로 사법 시험 차석으로 합격하고도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변호사가 되게 한 모든 과정들이 결국은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미리 정해진 운명적 수순처럼 느껴졌다.(p193.)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친구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이다.(p441) 동업자로 변신한 친구는 대우조선 사건과 탄핵 사건에서 그의 의뢰인이 되었고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거치면서 그의 영원한 동행자가 되었지만 그를 먼저 보내는 이별의 아픔도 맛보았다. 친구에게 좀더 가깝게 다가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도 너무 많았다.  

참여 정부는 시민사회의 힘으로 출범한 정부였다. 바보 노무현은 대선 때 소속 정당인 민주당의 뒷받침보다는 시민 사회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되었다.(p303) 바보 노무현은 모든 권력적 수단을 포기했다.(p279) 오로지 도덕적 신뢰 하나만이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밑천이었다. 도덕적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참여정부의 생명을 유지하여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덕적 가치라는 것은 모래알 같은 것이다. 모래는 언제든지 바람에 날리고 자취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국민의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도덕은 바람에 날아가고 마녀 재판 식의 비난의 목소리만 그 자리를 채울 뿐이다. 특히 그가 지역 구도 타파를 위하여 선거제도의 개혁을 전제로 한나라당에 제시한 대연정, 대북정책에서 6자회담 성사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수용한 이라크 파병은 시민사회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였다. 거기에다가 보수언론의 무자비하게 언론을 자유를 악용하는 보도 행태와 재임 초의 다수당의 횡포는 그의 도덕적 자부심과 도덕적 기반을 붕괴시키기 위하여 온갖 음모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자신이 기르던 똥개가 아파도 모든 것은 노무현 탓으로 돌렸다. 민주주의와 서민들을 위해서 개인의 영달을 뒤로 하였지만 깨끗하지 못하다는 누더기를 뒤집어 써야만 했다. 자신들의 모든 잘못을 전 정부 탓, 북한의 탓, 세계 경제의 탓, 탓, 탓으로 돌리는 현재의 정부와는 전혀 반대의 상황의 연출되었다.
 
인생을 뒤돌아 보면 원칙에 입각하는 선택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다.(p99.) 그 땐 용기가 없어서 바로 눈 앞의 이익을 외면하기 힘들어도 나중에 보면 권칙에 충실한 것은 번번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으로 드런난다. 당장 불리해 보인다고 하여 우리의 추구하는 가치까지 내버린다면 패배는 말할 것도 없고 다음 해에 오는 봄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는 희망조차 사라진다. 원칙의 충실함은 나의 빈 틈을 줄일 수 있기도 하다. 가치와 명분의 상실은 봄에 훨훨 나는 나비, 제비에게도 부끄러워진다. 봄이 오는 것을 싫어 하는 凍土의 세력은 따스한 햇살이 온 세상에 내리쬐는 봄을 싫어 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자만이 따스한 벽난로의 여유를 즐기기를 원한다. 날마다 피의사실을 흘리고 다니면서 정작 자신들의 잘못에는 눈을 감아 버리는 이들에게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봄날이 오는 것을 온몸으로 방해한다. 권력을 나누는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우월감이 상실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에게 대항하여 봄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깨끗해야 한다. 약점이 있으면 협박을 당하거나 자칫 잘못하면 신세를 망치기 십상이다. 人情에 치우쳐서 측은지심을 기대하는 것은 민주화 운동과 오랜 세월을 함계하는 인생의 벗에게도  누를 끼칠 수가 있다. 당장은 힘들거나 어려워도  원칙에 입각해서 가는 것이 나의 약점을 줄이고 장점을 살리는 인생의 정답 중의 하나이다.   

바보 노무현은 흐르는 강물을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흘러 갔지만 우리가 살아 가는 세상에 많은 교훈과 과제를 남겼다. 그의 정신과 가치는 '사람 사는 세상'이란 깃발 아래 남아 있다. 그 세상은 경제적 복지를 넘어서 빈부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똑같은 존엄한 세상을 의미한다. 그가 치열하게 꿈꾼 세상에는 아직도 봄바람은 불지 않고 있다. 우리가 운명처럼 살고 있는 세상은 기상 이변이 잦아지고 있으며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지구 온난화가 원인이라고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바닷물이 따듯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현상만 추구하는 책임 회피성으로 보인다. 그 원인은 외부에서 부는 바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인간의 문제로 보인다. 해수면 온도의 상승은 남극과 북극의 얼음도 녹이고 있지만 인간의 탐욕은 사그러들 줄을 모른다. 북극해에는 바닷길이 생기고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층도 녹고 있지만 소비자인 국민의 마음은 더욱 꽁꽁 얼고 있다. 한여름에 뜨겁게 내리 쬐는 태양도 수명이 있다고 하니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가 보다.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세계가 이러할진데 인간의 세계는 두말할나위도 없다. 역사의 강물도 한층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예전에는 權不十年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權不五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성싶다. 권력의 상실과 동시에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권력을 부리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자를 꿈꾸는 자에게는 정말로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말이다. 그런데 권력을 악용하여 남을 못살게한 동토층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통토층에 고인 물은 녹아서 강으로 모여들고 결국 진실은 드러날 것이다. 역사의 강물은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을 토해내고 골라내서 바다로 흘러 갈 것이다. 다만 순수했던 한 청년의 운명이 5년의 순행과 4년의 퇴행이 만나는 시점에서 지나간 강물의 자취를 세겨보고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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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조용헌의 백가기행 1
조용헌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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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시절의 고향집은 허스름했다. 겨우 새마을 운동의 끝무렵에 초가집에서 쓰레트집으로 바뀌었지만 본래의 내용에는 큰 변화는 없었다. 엄마는 가끔 집 장만 방송프로그램에 신청하고 싶다는 정도였다. 볼 품 없는 함부로 만든 바라지 문, 흙 냄새가 진동하는 수토방, 허름한 말깡, 간간히 잡초를 뽑아야 할 정도로 넓은 마당, 밭으로 쓰일 정도의 뒤뜰이 있었다. 면적은 족히 200평이 넘었다. 몇 가구 안 되는 동네는 몇 집을 빼놓고는 지붕이 다 비슷했지만 텃밭이 있고 너른 뜰을 가진 집은 주인의 개성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집 주변의 환경을 이용하면서도 집을 지은 자의 개성이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집집마다 정감이 가고 모두 한 이웃처럼 지냈다. 지금 서울에는 사람도 많지만 집도 매우 많다.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서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거기에도 집은 널리고 널렸다. 그래도 그 셀수 없이 많은 집은 집집마다 개성을 가지기 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다. 집에 사는 사람들의 개성은 공장식으로 막 만들어진 몰개성적인 특성을 갈하게 풍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소수의 몇 사람의 계획 하에 무더기로 만들어진 집이기 때문이다. 단독 주택은 이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서는 자연 친화감에서 오는 인간다움을 느끼기는 어렵다. 즉 서울의 수많은 집들은 집에 거주하는 사람을 배려하기 보다는 집을 짓는 사람을 더 배려한 경향이 강하다. 순전히 집 장사꾼들이 마구잡이로 찍어낸 집은 인간미가 있는 집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떤 경우에는 불량품이 많아서 위층과 아래층 간에 소음으로 다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또한 콘크리트로 지은 집은 아이들의 건강에도 좋지 않아서 호흡기와 피부의 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러면 어떤 집이 좋은 집일까?

강호동양학으로 불리는 사주, 풍수, 한의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동양 철학자인 저자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서울에 있는 22개의 집을 직접 찾아가서 집을 둘러 싼 산세와 물의 흐름, 집의 역사, 역대 집 주인의 인생, 건축적 특징, 정원의 조성 방법, 심어진 나무, 실내 장식과 가구 등을 꼼꼼히 살피면서 자신의 철학 사상에 맞추어서 설명하고 있다. 궁금한 것은 직접 집 주인과 대화를 통해서 풀려고 했다. 이 책은 직접적으로는 집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우리 인생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 것인가를 '집'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풍수학을 통하여 접근하고 있다.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운명의 여덟 글자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에 어울리는 집을 보여 주는 주역 풀이는 흥미롭다. 

우리가 사는 집은 단순히 잠만 자는 곳이 아니다. 해가 지면 들어가고 해가 뜨면 밖으로 나가는 공간이 아니다. 그 곳은 생활의 공간이다. 생활 공간은 우리의 생노병사가 함께 일어나면서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생각이 바뀌어야 업보와 운명이 바뀐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려면 우리의 바이오 리듬에 적합한 공간으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자신과의 조화를 통하여 끊임 없이 공간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자신과 집 터의 궁합이 맞지 않는 경우에는 자신의 내공을 쌓아서 이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담담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여 평소에 욕심내지 않고 담담한 심정으로 매사를 대하면 터의 기운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지나친 욕심을 멀리하고 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면서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만끽하고자 하였다.  
                                                                                                                                 
 우리 조상님들은 '집'도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대보름날이나  추석같은 명절에는 조왕신과 성주신에게도 성심을 다하였다. 서로 모르는 남녀가 결혼을 위해서 만났을 때에 서로의 궁합을 보는 것처럼 '집'이라는 생명체는 그 곳에 사는 사람과의 조화, 즉 '궁합'이 맞아야 한다. 서로 간에 궁합이 맞는 경우에는 겉으로 보이는 운치가 일품이다. 가령 달밤에 비치는 달빛과 노란 창포의 궁합은 가히 환상적이다. 황금색이 주는 풍요에는 푸른색이 주는 젊음이 어우러져야 한다. 사물 간의 궁합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이는 집과 나의 음양 오행이 서로 넘치거나 부족함을 상호 보완적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집안의 실내 장식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집주인과 그 터가 지닌 강약에 따라 궁합이 달라진다.(p111) 주인이 타고난 기질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터 궁합이 달라진다. 사주팔자를 보면,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집을 알 수 있다. 물이나 불이 부족한 사람은 풍수의 이치에 따라서 물과 불이 충만한 땅의 기운을 찾아가면 된다. 사람의 병은 스트레스로 인해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머리에 불이 올라와서 생기는 병이다. 이 경우에는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자면 효과가 좋다.(p106) 그런데 물의 기운이 강한 곳에는 불의 기운이 많은 사람이 살면 궁합이 맞다. 해남의 대흥사 수구에 자리잡은 유선여관에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인생의 무상함과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체험하고픈 사람에게는 호젓하기만 하다. 불은 번뇌를 사라지게 한다.불의 따뜻함은 우울증과 부인병에도 좋아서 아궁이는 심신 건간에 일조했던 장치이다.

집은 사는 이의 인생 철학을 담는다.(p112) 우리는 집에 모든 정성을 쏟아 붇는다. 집의 위치, 구조, 실내 장식은 처음부터 지금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집 안의 벽에 못을 하나 박는 경우에도 요리 조리 따지고 미관을 생각한다. 장성 축령산의 오두막 집은 건축 비용이 비록 2만 8천원에 불과하고 방 한 칸 크기에 지나지 않지만 마음과 통양이 서로 자연스럽게 소통된다는 믿음이 있다. 방이 작아서 우주를 생각하게 되고 자기 내면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무등산 자락에 자리잡은 허백련의 춘설헌은 예인의 풍류와 민족 사상의 숨결을 담고 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배산임수로 하는 호쾌한 풍광 아래 자리잡은 쌍산재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마루가 특징인 나주 박장흥 고택은 좌우익의 중간에서 거중 조정을 했다. 자신의 치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이 배어 있는 집은 역사에 배신당하지 않고 격동의 100년 세월에도 살아 남았다. 그런데 소설 토지의 모델이 된 하동 조부잣집은 자연의 품 속에서 다시 자연을 품 안으로 글어들였지만 풍파를 못 이기고 현재 본채만 남아 있다.  

집은 사는 사람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집은 사는 사람이 편리해야 한다. 집은 건강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p81) 우리는 집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다. 집에서 자고 휴식을 취하고 외부의 존재로 부터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수 최소한의 공간이다. 작은 우주라고 불리는 우리 인체는 화, 수, 목, 금, 토의 음양오행의 교감을 통해서 우주만물과 교감을 한다. 즉 인체는 자연과 상호 소통의 관계를 이룰 때가 가장 편안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이런 논리는 이 세상에서 사람에게 최대한의 휴식을 줄 수 있는 공간은 '自然'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경쟁관계인 사회로부터 잠깐이나마 거리를 두면서 자연에서 마음을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여기에서 자연과 집이 최대공약수를 찾는 것이 중요한 미학으로 떠오른다. 자연을 집 안으로 끌어들여서 家內救援을 받는 것이다.(p38) 나주 죽설헌은 담양의 소쇄원처럼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같이 밥 먹고, 같이 놀고, 같이 정담을 나누는 집이자 정원이다. 양평의 땅 집은 실내에 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중정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의 고요함을 얻을 수 있다. 열린 소통을 만드는 회통적 공간, 인화당이 있고 얼, 흥, 정, 멋, 맛, 격이 있는 집으로 지어어진 창덕궁 옆의 은덕 문화원은 다기장이 마음에 든다. 계동 낙고재에서는 전통 한옥이 현대 한옥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부산의 조효선 씨의 아파트 다실은 단순함으로 편안하고 효율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인생은 낯선 여관에서의 하룻밤이다'고 했다. 여관은 잠깐 머무르는 곳이다. 인생은 잠깐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머무르는 곳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집착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집에 광적으로 집착한다. 집은 최소한의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공간으로 여기는 시대는 과거 속의 이야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MB정부는 사활을 걸고 서민들의 시장 바구니는 아예 포기하고 어떻게 든 높은 부동산 가격을 유지하려고 올인하고 있지만 오히려 집 값은 떨어지고 있다. 높은 부동산 가격은 소수의 부유층에게만 행복을 느끼게 만든다. 집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관념을 바꾸어 버렸다. 예전에는 집이라는 것은 경제적 여유를 나타내는 증표였지만 이제는 재테크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도 사람은 아무 데서나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행복은 아무데서나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살고 싶은 곳에 자기 손으로 집을 짓고 건강하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 큰 복이다.(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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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조론 나남신서 690
조지훈 지음 / 나남출판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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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역사는 갈등의 연속이다. 해방 이후에 반민족주의와 반민주주의가 기득권을 형성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 혼란 속에서 사는 인생은 갈등 선택의 연속이다. 이 선택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지에 관한 것도 있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한 선택의 것도 있다. 특히 후자는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 사이의 갈등에서 발생하는 선택이다. 어떤 선택의 결과가 자신에게 물질적 안락을 이루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는 자신의 신념과 역사 법칙에 위배되는 결론에 이른다는 것에서 온다. 

지금 우리는 매 순간이 선택의 과정에 놓여 있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에서 비롯하여 진보와 보수의 정치적 이념에서 어디를 지지할 것인가는 머리를 지끈거리게 한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는 매우 어렵기도 하지만 매우 쉽기도 하다. 양자의 견해를 들어서 합리적 선택을 하려는 경우도 있지만 한 쪽 귀를 완전히 닫아버리고 마이 웨이를 하는가 하면, 모든 것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선택, 자신의 입장에 대한 자신만의 선택은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근래 100년의 대한민국 역사에서는 우리는 극명하게 볼 수 있다. 이처럼 선택이 생사를 좌우하는 경우는 선택을 신중하게 해야 하면서도 선택한 결정을 외부의 타인에게 알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한다.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표현하고 말하는 것을 고민하기 마련이다. 이런 고민은 지금을 살아가는 현세대만의 것은 아니었다. 우리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었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인생 경험이 일천한 20대의 젊은이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할 지를 몰라서 허둥지둥하다가 고귀하고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기 일수이다. 시대정신과 미래의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지남차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인생 스승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나라의 젊은이들은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살짝 크게 뜨고 선배를 찾아본다면 어렵지 않게 우리의 선택에 조언을 해줄 선배를 찾아 볼 수 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동탁 조지훈이다. 그는 경북 영양 출신으로 경상도 선비의 자세를 지니고 있으면서 우리의 인생길에 길잡이를 해 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인생 선배 중의 한 분이다. 그는 4.19의거의 중심에 섰고 박정희 군사 독재에 맞서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인식되기보다는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청록파는 매서운 일제의 칼날이 춤을 추고 있을 때에 현실을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고 하여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냉소적인 비판 아닌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이는 청록파의 시들을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데서 오는 오해이다. 

世事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고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우리의 시흥을 돋우고 우리의 입가에 빛깔나는 붉은 빛을 드리우게 했던 시인이 세상을 향해서는 쓴 소리를 내뱉고 있다. '지조론'은 1960년대 즈음에 동탁이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념 갈등, 세대 갈등, 기독교 문제, 한일 간의 관계 등에 대해서 자신만의 견해를 군사독재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피력하고 싶은 말을 '사상계'와 '고대 신문', '동아일보(지금의 동아일보와는 질적으로 다름)'에 기고한 글을 모아 놓은 것으로 동탁의 역사관, 시대관, 인생관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50여 년전에 쓰여진 것이지만 아직도 그 때의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오늘날에도 요긴하게 참고할만한 내용의 글로 묶여 있다.

몇 해 전에 영국에서 앤서니 기든스라는 정치학자의 '제3의 길'이라는 것이 바람을 불어서, 이 바람으로 노동당이 정권을 잡았다. 그런데 그 집권의 결과는 국내적으로나 국외적으로도 유쾌하지는 않았다. 특히 외교적으로는 '부시의 푸들'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이런 제3의 길은 좌우가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유용한 것으로 보이기도 해서 여기에 현혹된 지식인들도 있었다. 지금도 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생각이 짧은 어린(遇) 백성이 많은 것으로 안다. 우리는 지난 10년의 민주 정부가 한국적 제3의 길을 가려다가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뼈저린 경험을 했다. 그런데도 그 경험을 벌써 잊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정책에 대해서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에 흔히 '중도'라는 제 3의 길을 선택한다. 이는 양자의 견해를 절충하고 종합하는 것으로 보여서 매우 멋지게 보인다. 모든 관점을 종합하여서 장점만을 취사선택한 것처럼 보여서 매우 매력적이라고 자기 위안을 한다. 그런데 동탁은 '중도주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경계한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전혀 다른 상반된 것을 양쪽에 매달아 놓고 엄정 중립으로 중용을 잡겠다고 하는 것은 허망한 관념의 윤리라고 한다. 이런 중간주의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비지성적이라는 것이다. 이 중간주의는 대개의 경우에 기회주의로 통한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에서도 중도라는 입장의 위험성을 알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이 땅에는 젊은 세대와 기성 세대간의 이념적 사고의 차이가 매우 크다. 기성세대는 썩었으므로 물러가라고 외치기 시작했던 구호는 4월혁명 이후부터 유효한 구호가 되었다.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가 어리고 버릇이 없어서 철부지처럼 행동하여서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한다. 기성 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은 현재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와 관련이 된다. 그러면서도 양 세대는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서로를 좀더 성의 있게 관찰하고 이해하고 인식함으로써 서로를 어루만지며 각자에게 주어진 새롭고 정당한 사명의 횃불이 필요하다고 한다. 자칫 양자는 모조리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갈지도 모른다. 동탁은 기성 세대는 자라면서부터 저유를 만끽한 젊은이들을 감옥 속의 처신을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 젊은 세대는 새로운 창조를 위하여 기성 세대와는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한다.      

현재 기독교와 불교의 갈등도 치열한 불꽃을 튀기며 점입가경(?)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그것의 발단은 기독교는 모든 것을 자신만의 세계관으로 본다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이 지금까지 가꾸어 온 문화와 전통도 그들의 세계관으로 재단한다. 불교는 우리의 전통과 뗄내야 뗄 수 없는 것인데, 이런 것들도 불교의 색채가 있어서 미신이라고 생각하고 배척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급기야는 통일신라의 처용가는 불교적인 것이므로 처용가 축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기독교의 막가파식 사고는 동탁이 살던 시절에도 문제가 되었는가 보다. 그는 한국 교회는 3.1운동 이후에 줄곧 내리막길을 걸어서 지나친 정치 참여로 현실의 부패에 부동함으로써 교회가 자기 폐쇄의 길을 가고 있다고 하였다. 당시의 교회는 본 바닥의 신학에만 몰두한 나머지 기독교 정신을 이 땅에 뿌리박기 위한 한국의 사상적 통양의 연구에 관심이 너무 없는  것 가타고 한다. 그는 교회 내부를 이끌 지성의 인물과 사회에 무한한 사랑의 손길을 뻗치지 못하는 교회의 활동에 아쉬움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50여 년전에 이 땅을 바라본 인생 선배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는 한 치의 오차도 벗어나지 않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현실의 이야기였다.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에 우리는 물질적으로 변화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으로는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동탁이 바라보는 현실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그가 걱정했던 현실의 문제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동탁의 관전과 병행하여 50년의 역사에 우리의 인생 선배들은 '우리'라는 대의를 위해서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골방의 툇간으로 물러나서 종요히 있어야 할 이들이 오로지 나이가 많다는 심정만으로 현실 문제를 나대는 것은 과분한 행동이라고 본다. 또한 젊은이들은 기성 세대와는 다른 형태의 존재론적인 삶이 필요하다. 마냥 과거만을 비판하다가는 과거를 답습할 수 있고 다시 50년 후에 자신들도 지금처럼 무개념의 노인네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동탁이 제시했던 수많은 현실의 문제는 앞으로도 미제의 상태로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들은 이 땅을 갈등의 상태로 남겨 놓을 것이다. 이 갈등은 지금보다 더 낳은 미래를 꿈꾸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다. 거짓을 진실인 냥 포장을 해서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을 어렵게 하거나 선택을 후회하게 한다. 이는 정치 영역이나 사회 영역 전반에 퍼졌다. 경제만 살리면 도덕은 필요없다고 외치고 정치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는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선진화'라는 허울좋은 겉포장으로만 어린 백성을 현혹시킬 뿐이다.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오히려 뻔뻔하게 법치주의를 주장하여 민주주의에 혐오감을 갖게 할 뿐이다. 그러면서 민주주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치게 한다.    

요즘처럼 사람을 헷갈리게 하던 시대는 없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무식하거나 정보 수단의 미비로 허위가 진실을 압도했다. 그런데 지금에는 교육 수준도 높고 교통 수단이 최첨단을 달리고 있지만 양두구육의 수단은 더욱 발달하여 관심이 없는 것이 오히려 편한 세상이 되고 있다. 동탁의 시대에 민족 고대라고 자부하는 대학의 고대 신문이나 일간지에는 자기 집단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보수적이고 퇴영적인 글이 넘쳐난다. 미래지향적인 글보다는 과거지향적인 글들이 훨씬 더 많다. 이런 현상으로 학교 신문은 대다수 학우들에게서 외면당한다. 프락치나 거지 근성을 보이는 신문 편집위원들도 한 몫한다. 지금도 자기의 신념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타협하지 않고 항거하여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악의 곤욕을 무릅쓸 각오로 무장된 지조있는 선비정신으로 무장된 지성인들은 지금도 필요한 시대이다. 이제는 기존의 언론을 통해서 정보를 얻는 수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사람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지성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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