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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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이론적인 면에서나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는 우리의 현대사를 보더라도 명확하다. 우리 헌법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87년의 6월 항쟁의 숭고한 정신으로 탄생한 현행 제9차 헌법에는 '실질적 민주주'의 정신이 녹아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원칙이 준수되는 '과정'상의 민주주의 뿐만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도출된 '결과'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 직선제 이후에도 국회에서는 수 십번의 날치기가 있었다. 그 때마다 날치기하는 다수당은 항상 민주주의를 이유로 내세우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반대로 소수당은 날치기는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라고 규정하였다. 같은 민주주의를 두고 서로 아전인수식의 주장을 하였다. 무식하고 가난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런 정치상황에 혼란에 빠지고 자신들의 이해타산에 따른 지지와 반대를 한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정치놀음의 장난감이 되어 버린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2차 세계 대전 때에 히틀러도 민주주의를 통해서 권력을 잡았고 독일이 패망하는 날까지 민주주의에 의해서 독일을 이끌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혼란한 독일을 재건하기 위해 등장한 히틀러의 배후는 자본주의자들이었다는 것도 놀랄만한 사실도 아니다. 세계를 대혼란으로 빠뜨리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데 일조한 것이 자본을 배경으로 한 민주주의자들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가 매우 취약한 정치 논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다만 그만큼 민주주의라는 정치 논리는 얼마든지 정치 권력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단점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민주주의 자체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이제는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이 매우 당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현재의 모습을 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가 흘렀다는 것을 모른다. 또한 그 역사만큼이나 얼마나 많은 종류의 민주주의의가 있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땅에 민주주의는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봇물이 터지듯이 매우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한 꺼번에 그것도 일시에 등장하였다. 그래서 어떤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이고 오류가 적은 민주주의이고 인간을 위한 민주인가에 혼란을 빠드리고 말았다. 모든 형태의 민주주의는 정치의 실험장에서 도마에 놀랐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라는 그 개념을 알기 위해서 책을 한 두권 접하면 얼마나 그 난해함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아무나 쉽게 말하는 민주주의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가 있어서 언제든지 기득권의 지배 논리에 이용당할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 가난한 자 그리고 국가의 역학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논쟁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전체주의의 대립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民意라는 아주 그럴 듯한 포장에 자유주의, 전체주의도 민주주의를 차용하면서 가난하고 무식한 백성들을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민주주의는 시대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사상과 결합을 하여 다양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자본주의 내에서 민주주의는 대립되는 논리였던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프랜차이즈인 '평등'을 차용하였지만 그대로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입맛에 따라서 각색을 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평등은 기회의 균등을 말한다. 그런데 기회의 균등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의 자유, 가진 자들만이 누리고 가난한 자들은 누릴 수 없는 형식적인 평등이다. 사회적 성공의 '기회'는 '교육'이 있어야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기회만 있을 뿐이고 실제로 돌아오는 몫은 없다. 이는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도 과거를 볼 기회가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백성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기도 힘든 판에 어느 세월에 공부를 하고 과거에 급제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자유주의가 말하는 평등은 어리석은 국민들을 눈속임 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평등'은 자유주의자가 말하는 기회의 평등, 산술적 평등이 아니며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민주주의에 내재된 평등은 양자를 절충한 기하학적인 평등을 말한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공동 영역을 공유하고 이 영역을 탈정치화시켜 국가의 일반적 성향을 거부하는 공적인 활동이다.(p154) 이는 '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의 평등과도 궤를 같이 한다. 

더구나 민주주의는 그 시대의 사회적 환경과 관련되면서 기득권의 논리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변태적 형태의 민주주의를 도출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나치 시대에 많은 헛점을 보인 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의 피를 불렀다. 이에 화들짝 놀란 법학자와 철학자들은 진일보한 민주주의를 만들어 냈다. 현재 우리 법학계와 헌법재판소분만 아니라 민주주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이고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이다. 즉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사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공영역의 확대 과정이다. 여기서 공공영역의 확대는 소위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에 대한 국가의 잠식을 의미하지 않는다.(p114) 민주주의는 공공영역에서 인간의 평등을 공동 생활의 다른 분야, 특히 자본주의적 부의 무제한성이 지배하는 분야로 확대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여기서 개인의 자유는 사회 내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만의 자유가 아니라 향유해야 할 권리를 갖지 못하는 인간들의 권리이며 동시에 자신들이 가지지 말아야 할 권리를 향유하는 시민들의 권리를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체제는 단순히 조악한 통치형태나 정치생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p87) 형식적 민주주의가 혐오스럽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그 민주주의는 공동체 내에 존재하며 잘 정돈된 통치구조와 대립되는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구조만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형태의 구조를 수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개인들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니다. 민주적 과정에서 통치는 서로 대립하는 특수성 사이에서 대화와 토론이라는 논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다움이라는 보편성을 끊임없이 사용하는 과정으로 인간의 주체화라는 틀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즉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은 각각의 위치를 끊임없이 변동하는 과정을 거친다. 민주주의에서 통치자는 통치받는 것처럼 보이고 통치받는 자는 통치자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에서 통치자는 공공의 차원이나 권력을 사유화하여서는 안된다. 최악의 정부는 바로 권력만을 지향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능숙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정부를 의미한다.(p155)  

현재 우리 헌법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차선의 선택이라고 중,고등학생 시절에 끊임없이 세뇌당하였다. 실제로 대의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자들 내에서 권력을 양분하기 위해서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다.(p155)  대의제는 공공영역을 담당할 권한을 가진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선거라는 과정을 거친다. 제한선거에서 출발한 대의제는 민주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방향 전환이 되었다가  다시 민주주의에 의해서 재정복되어 보통선거라는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발전하였다. 제한선거는 일정한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 보통선거는 누구나 선거권을 가지기 때문에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선거는 경제적 많은 경제적 비용이 필요하다. 선거에는 상당한 액수의 비용이 필요하여 실질적으로는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자들만이 당선의 접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대의제는 권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조건에서만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이다. 결국 선거는 형식적 평등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 원래 대의제는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p119) 대의제라는 선거를 통해서 지배층은 생명의 위협이 없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대의제의 본질을 이미 간파한 장자크 루소는 시민정부론에서 간접 민주정을 반대하고 직접 민주정을 주장하였다. 현재 스위스와 같은 일부 선진국에서는 직접 민주정치를 하고 있다. 

고대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고대 아테네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민주주의가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하나가 플라톤이다. 그는 아테네 시민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도 당시 소피스트의 인기를 압도하지 못하였다. 민주주의가 증오시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민중의 통치하에서는 모든 질서가 파괴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p21) 여기에서 '질서'라는 것은 현재의 권력 분점 상태를 의미한다. 신분과 권력의 특권이 사라지고 권력에 접근성이 민주화된다면 자신들의 현재의 프리미엄은 세습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이는 군사 독재 시절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자를 빨갱이로 매도하였던 자들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들은 항상 민주화 운동은 사회질서를 해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나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면서 민주적 절차를 통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시행되자 이번에는 새로운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에 반대되는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사실 포퓰리즘은 민주적 정당성과 과두제적 정당성이 악화된 모순을 은폐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용어이다.(p167) 이를 통해서 자유주의자들은 지배적 합의사항에서 모든 것들을 제어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지 않다.(p156)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에서는 대규모 민영 언론 사주들이 언론의 공적 기능을 활용하여 대중매체를 장악하였다. 이들은 끊임없이 정치적 반대자들의 사상을 검증하려고 한다. 기득권층은 모든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논리로 정치적 상대방을 이데올로기의 덫을 씌우려고 한다. 권력은 자신들이 독점 상태에 있는데, 권력의 분점을 요구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에 광신적 반응을 보이며 민주주의에 증오를 표방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 교과서도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조작하려고 한다.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화를 주장하던 자들을 이데올로기의 덫을 칠해서 빨갱이로 몰아부치던 자들이 권력을 잡자 자신들이 마치 이 나라의 민주화의 화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들에게 자본의 무한한 축적은 곧 신앙이고 그 수단으로 토론이라는 정치를 몰아 내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역사에 비친 눈이 꽤나 무서웠는가 보다.

해방 이후와 미완의 혁명 '4.19'와 1987년의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항상 맨 앞에 섰다. 그 때의 민주주의는 친일 '독재'와 군사 '독재'에 항거하는 의미로써의 민주주의였다. 그 당시에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포함하는 의미의 민주주의였다. 지금처럼 소수의 독점 대기업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유'는 당연히 '민주주의'의 하부 개념이었다. 당시 지식인과 민중들은 지금같이 탐욕스러운 '자유주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무절제한 자유, 합법을 가장하여 타인의 것도 빼앗는 자유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오로지 자유가 부족했던 시대는 당연히 민주주의가 최상의 가치였다. 이제 장기 집권이나 군사 독재는 흔적만 남기고 갔지만 그 때의 잔존 세력은 여전히 활기를 치고 있다. 그들은 독재시절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자유민주주의, 가짜 민주주의를 당시의 구호로 만들려고 한다. '민주주의'에 '자유'라는 이름을 덧붙여서 역사를 각색하려고 한다. 그들은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조작하는 중국과 수많은 역사서를 조작하며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아니 그들보다 더 나쁘다고 보아야 한다. 두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만 독재의 흔적들은 국가를 학대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을 만끽할 경제적 여유도 없는 가난하고 무식한 국민들은 '자유'는 무조건 좋은 줄만 알고 뇌화부동하고 있다. 가짜 민주주의가 최고의 굿판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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