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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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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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삶(P323)이 생각했던 대로 흘러가는 게 거의 없다.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은 있어도 잘하는 것은 딱히 없는 것 같다. 욕망 충천은 여전한데 사기는 세월의 잔인함에 무디어지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삶은 나에게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 수없이 묻기만 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무작정 어디론가 가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버거운 삶이 끈덕지게 붙잡고 있을 뿐이다. 죽지 못해 사는 나머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등바등하며 살 궁리를 해 본다. 그 와중에 평소에 좋아해서 주문은 했지만 오랫동안 묻어두었다가 이제 읽는다. 자기계발서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인생이라는 것은 암묵적 지식으로 가득찬 시공간이기 때문에 활자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막힌 골목길에 들어선 기분이라 익히 검증이 된 경우에는 한 번 쯤은 기웃거려도 괜찮다고 본다. 또한 이러다가 그냥 죽는 건 아닐까?’라는 시간의 불확실성에 목이 마르기 때문에 샘을 파야 할 입장이라는 게 한몫 했다.

 

이 책은 플로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줄기차게 훌륭한 삶, 품격 있는 인생에 관하여 청년과 불혹(不惑)들에게 고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신과 그들에게 질문한다. 비록 디테일하지는 않아도 작가의 인생사를 두서없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두서없이 썼다는 것은 진정성 있으며 가식이 없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매우 다양한 신변잡기적이면서도 중후한 애기를 담고 있다. 때로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등장시켜 삶과 죽음의 철학적 의미와 생물학적 의미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특히 보편적 진리는 아닐지라도 지남차가 될 수 있는 자신만의 인생 비법은 담고 있어서 매우 좋았다. 말미에 숱한 고비를 넘기며 이어져온 가족사의 굴곡에선 나 자신의 가족사를 투영하며 가슴 뭉클하게 한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이나 넬슨만델라처럼 나이가 든 후에도 철학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켜 품위 있게 나이를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하려고 한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젊은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하려고 한다(P76 참고). 그의 인생철학을 듣고 있노라면, 그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마치 또 하나의 꼰대를 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그러지 않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성찰하려고도 한다. 아웃사이더같지만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 경계에서 신자유주의를 타파하고 민주국가의 공동체주를 통한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려는 실천적 지식인이다. 현실 정치에서도 끊임없이 민주당을 비판하면서도 마음적으로는 지지하는 자칭 어용지식인이다

 

작금에 쉰다섯에 이르기까지 그를 키운 것은 '행운(P299)'이라기보다는 8할이 호기심과 의심, 그리고 거리감이다.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론이다. 세상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p89). 삶뿐만 아니라 늙어감, 죽음에 대해서도 그렇다. 거리감은 때로는 냉소적이거나 회의적으로 비칠 수 있지만 그만큼 자신과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회적, 개인적으로 생활 사건이 주는 스트레스를 거리감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 스스로 의미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견고한 성을 쌓고 시간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는 기존의 보편적 지식에 대해도 호기심으로 대면하고 끊임없이 회의하고 비판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리로, 왔던 자리로 간다. 하지만 본래의 그가 아니라 더욱 단단한 지식의 둑을 쌓은 상태다. 그는 주체사상을 읽었어도 주사파는 아니고 반민주 시대에 자유주의 교육을 받았어도 자유주의자는 아니라 민주주의자이고 진보주의의 삶을 추구한다. 찬 이성 더운 가슴의 소유자(p91)!

 

그가 거리감을 드러내는 초절정은 결과보다 과정에 이르는 방법론이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하면서 나도 정답은 모른다.. 내 나름이 방법이 있을 뿐(276)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독자뿐만 아니라 모든 대상과 모든 가치에 대해서 거리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더 보여 주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진보주의를 포함하여 어떤 가치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기 어렵다. 심지어 자신의 말이 옳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절대가치의 상대성, 오류의 상존성을 항상 염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을 경계해야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어떤 훌륭한 가치도 과정 속에서 사람을 더 훌륭하게 만들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다. 그런 가치는 사람을 단지 수단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멀게는 제너바를 죽은 도시로 만든 기독교 개혁가 장 칼뱅, 캄보디아 혁명가 폴포트가 그랬고 가깝게는 통진당의 비례대표 후보 선출과정이 그랬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에게서 소크라테스와 헤겔의 방법론이 보인다.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은 사랑, , 놀이이다(p61).더 나아가 연대(連帶)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신! 늙어서도 품격 있게 나이를 먹는 비결이다. 특히 연대는 기쁜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이다. 연대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친우, 가정 내에서도 필요하다. 혼인한 후에도 구애는 계속되어야 한다. 자녀가 행복을 느끼는 능력을 지닐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것 없이는 삶을 완성할 수도 최고의 행복을 누릴 수도 없다(p62). 앞의 세 가지는 나 홀로나 소규모 관계에서도 충실히 이행할 수 있지만 나머지 하나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의 세 가지는 본능에 충실하면 해결될 가능성이 높은 개인적 가치이지만 마지막 것은 최고의 이성적인 이타적, 집단적 가치이다. 앞의 세 가지가 진화하는 것이 연대이다.  

 

연대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지금 이곳의 행복이 그들의 것이리라.”(P264)

 

  그의 삶을 관통하는 일관된 가치는 연대이다. 사회적 연대의 가장 차원 높은 형식은 정치이다(p189). 연대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 진보주의이다. 나눔, 봉사, 평등, 생태보호를 추구하는 정파가 진보정당이다. 진보주의에 대한 개념정의는 여러 갈래지만 그가 믿는 진보성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인 자원이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p251)을 의미한다. 유전적으로 근친성이 없는 타인의 고통에서 함께 느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것으로 진보적인 것이다.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새롭게 나타난 행동방식이다. 진보주의는 사회문제를 주체의 계급 문제가 아니라 행위의 문제라는 것이다. 가령, 사형제 대하여 살인은 응징이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찬성하는 것은 보수라는 논리이다.  

 

보수주의가 엄연한 정치공간에서 (진보)정치를 잘하려면 다른 사람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는 비루함과 야수성을 인애하고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는 정치인 시절 분열과 갈등의 화신이라는 비난만 받았을 뿐이다(p92). 마흔에 박사학위 논문 집필을 그만두고 하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는 일로 인생대전환을 하였지만 정치의 일상이 즐겁지 않았다. 지금은 글도 쓰고 TV 연예프로에 나와서 많은 젊은이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지만 한때 그는 정치권에 몸담았다가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연대하기로 마음먹었다. 인생이라는 너무 짧은 여행에 그리 길게 남지 않아서 더 절실한 마음으로 자문하면서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서 글 쓰는 일로 돌아왔다. 1980년 초여름에 계엄사 합수부 조사실에서 맞지 않으려고 맹렬하게 글을 쓰다가 자신이 글 쓰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서 태어난 글쟁이, 지금은 글로 먹고 산다

 

버나드 쇼처럼 지성적 자아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능력을 가진 마지막 시간까지 무슨 글이든 글을 쓰면서 살고 싶다(p228).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고 품격 있게 나이를 먹자. 이것에 비추어 보아, 내 인생의 가장 큰 잘못은 무엇인가? 그는 스무 살 무렵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p62). 그래도 그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고딩시절에 구체적으로 무얼 하면서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내가 세상에 온 데에는 무슨 특별한 목적이나 이유가 있는 걸까?(P68)’ 남은 삶은 어떻게 살 것인가?(P72) 나는 어떤 일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그의 나이 쉰다섯이 되었을 때에 나는 어떤 모습일까? 또다시 돌고 돌아 많은 인생 질문에 허우적거리고 있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자신이 일상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쪽으로 직업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바람직하다(p171)는 그의 말에 용기를 얻는다. 유독 잔인했던 무더위 등쌀에 더욱 성가셨던 여름을 벗어버리려는 즈음에 삶의 버거움에 대한 많은 질문을 던지며 하루하루를 넘긴다. 질문이 싸일수록 날마다 대면하는 라는 존재는 여전히 수캐마냥 헐떡이는 존재지만 복날은 무사히 피해 동장군이 설칠 때 쯤 이맘때를 얘기해 보고 싶다. 그 때가서 인생을 평가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헬렌 켈러와 설리반의 관계처럼 품위 있는 노년을 위한 내 마음의 바이블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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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영어 2.0 - 7.9급 공무원 및 경찰 시험 대비
강수정 지음 / 빛과소금(CH기획)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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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영어는 수험생들만을 괴롭히는 과목이 더 이상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에 누구나 끼고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영어라는 언어가 우리말처럼 우리의 일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영어를 강건너 존재하여 나와는 무관한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막상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책을 고르려고 서점에 가면 수많은 영어책이 바다를 이루고 있는데. 어떤 것을 골라야 하는지 난감하다. 영어를 회화 위주인지, 시험용인지 등의 어떤 목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선택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일에서 그렇치만 영어책에서도 잘못 선택된 것은 금전적, 시간적 손해일 뿐만 아니라 영어의 길을 잘못된 오솔길로 인도할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신중함이 요구된다.

 

강수정 시리즈 영어는 다른 기존의 영어책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취하고 있다. 즉 '살아 있는' 영어를 구사하고 있다. 일본식 영어 문법을 탈피하여서 기존의 5형식 체계를 완전히 탈피하였다. 또한 기본 원리에 충실해서 고등학교 때 영어 좀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이들에게는 구멍난 부분들을 메꾸어 줄 수 있다. 특히 '공통영어'는 영어에 대한 입문서(?)로 삼기에는 매우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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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자크 랑시에르 지음, 허경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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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이다. 이론적인 면에서나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는 우리의 현대사를 보더라도 명확하다. 우리 헌법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87년의 6월 항쟁의 숭고한 정신으로 탄생한 현행 제9차 헌법에는 '실질적 민주주'의 정신이 녹아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원칙이 준수되는 '과정'상의 민주주의 뿐만아니라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도출된 '결과'도 민주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 직선제 이후에도 국회에서는 수 십번의 날치기가 있었다. 그 때마다 날치기하는 다수당은 항상 민주주의를 이유로 내세우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였다. 반대로 소수당은 날치기는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라고 규정하였다. 같은 민주주의를 두고 서로 아전인수식의 주장을 하였다. 무식하고 가난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런 정치상황에 혼란에 빠지고 자신들의 이해타산에 따른 지지와 반대를 한다. 이처럼 민주주의가 정치놀음의 장난감이 되어 버린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2차 세계 대전 때에 히틀러도 민주주의를 통해서 권력을 잡았고 독일이 패망하는 날까지 민주주의에 의해서 독일을 이끌었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혼란한 독일을 재건하기 위해 등장한 히틀러의 배후는 자본주의자들이었다는 것도 놀랄만한 사실도 아니다. 세계를 대혼란으로 빠뜨리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데 일조한 것이 자본을 배경으로 한 민주주의자들이라고 한다면 민주주의가 매우 취약한 정치 논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다만 그만큼 민주주의라는 정치 논리는 얼마든지 정치 권력에 이용당할 수 있다는 단점이 많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민주주의 자체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이제는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그만큼 민주주의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매일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이 매우 당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현재의 모습을 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의 피가 흘렀다는 것을 모른다. 또한 그 역사만큼이나 얼마나 많은 종류의 민주주의의가 있는 것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땅에 민주주의는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되면서 봇물이 터지듯이 매우 다양한 형태의 민주주의가 한 꺼번에 그것도 일시에 등장하였다. 그래서 어떤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이고 오류가 적은 민주주의이고 인간을 위한 민주인가에 혼란을 빠드리고 말았다. 모든 형태의 민주주의는 정치의 실험장에서 도마에 놀랐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라는 그 개념을 알기 위해서 책을 한 두권 접하면 얼마나 그 난해함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아무나 쉽게 말하는 민주주의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가 있어서 언제든지 기득권의 지배 논리에 이용당할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자, 가난한 자 그리고 국가의 역학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논쟁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전체주의의 대립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民意라는 아주 그럴 듯한 포장에 자유주의, 전체주의도 민주주의를 차용하면서 가난하고 무식한 백성들을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민주주의는 시대 환경에 따라서 다양한 사상과 결합을 하여 다양한 모습을 띨 수밖에 없었다. 원래 자본주의 내에서 민주주의는 대립되는 논리였던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프랜차이즈인 '평등'을 차용하였지만 그대로의 개념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입맛에 따라서 각색을 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평등은 기회의 균등을 말한다. 그런데 기회의 균등이라는 것은 부르주아의 자유, 가진 자들만이 누리고 가난한 자들은 누릴 수 없는 형식적인 평등이다. 사회적 성공의 '기회'는 '교육'이 있어야 하지만 가난한 자들은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으로는 사회적 약자에게는 기회만 있을 뿐이고 실제로 돌아오는 몫은 없다. 이는 조선시대에 일반 백성도 과거를 볼 기회가 주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백성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기도 힘든 판에 어느 세월에 공부를 하고 과거에 급제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자유주의가 말하는 평등은 어리석은 국민들을 눈속임 하기 위한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평등'은 자유주의자가 말하는 기회의 평등, 산술적 평등이 아니며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민주주의에 내재된 평등은 양자를 절충한 기하학적인 평등을 말한다.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공동 영역을 공유하고 이 영역을 탈정치화시켜 국가의 일반적 성향을 거부하는 공적인 활동이다.(p154) 이는 '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의 평등과도 궤를 같이 한다. 

더구나 민주주의는 그 시대의 사회적 환경과 관련되면서 기득권의 논리로 자유민주주의라는 변태적 형태의 민주주의를 도출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나치 시대에 많은 헛점을 보인 민주주의는 수많은 사람의 피를 불렀다. 이에 화들짝 놀란 법학자와 철학자들은 진일보한 민주주의를 만들어 냈다. 현재 우리 법학계와 헌법재판소분만 아니라 민주주의 고향인 프랑스에서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이고 이것이 진짜 민주주의이다. 즉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사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공영역의 확대 과정이다. 여기서 공공영역의 확대는 소위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에 대한 국가의 잠식을 의미하지 않는다.(p114) 민주주의는 공공영역에서 인간의 평등을 공동 생활의 다른 분야, 특히 자본주의적 부의 무제한성이 지배하는 분야로 확대하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여기서 개인의 자유는 사회 내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만의 자유가 아니라 향유해야 할 권리를 갖지 못하는 인간들의 권리이며 동시에 자신들이 가지지 말아야 할 권리를 향유하는 시민들의 권리를 말한다. 

민주주의라는 체제는 단순히 조악한 통치형태나 정치생활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p87) 형식적 민주주의가 혐오스럽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한다면 그 민주주의는 공동체 내에 존재하며 잘 정돈된 통치구조와 대립되는 하나의 생활양식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구조만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형태의 구조를 수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개인들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니다. 민주적 과정에서 통치는 서로 대립하는 특수성 사이에서 대화와 토론이라는 논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다움이라는 보편성을 끊임없이 사용하는 과정으로 인간의 주체화라는 틀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즉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은 각각의 위치를 끊임없이 변동하는 과정을 거친다. 민주주의에서 통치자는 통치받는 것처럼 보이고 통치받는 자는 통치자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에서 통치자는 공공의 차원이나 권력을 사유화하여서는 안된다. 최악의 정부는 바로 권력만을 지향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능숙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정부를 의미한다.(p155)  

현재 우리 헌법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낸 차선의 선택이라고 중,고등학생 시절에 끊임없이 세뇌당하였다. 실제로 대의제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자들 내에서 권력을 양분하기 위해서 정치적 타협의 결과물이다.(p155)  대의제는 공공영역을 담당할 권한을 가진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선거라는 과정을 거친다. 제한선거에서 출발한 대의제는 민주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방향 전환이 되었다가  다시 민주주의에 의해서 재정복되어 보통선거라는 하나의 통합된 형태로 발전하였다. 제한선거는 일정한 자격을 가진 사람만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 보통선거는 누구나 선거권을 가지기 때문에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선거는 경제적 많은 경제적 비용이 필요하다. 선거에는 상당한 액수의 비용이 필요하여 실질적으로는 경제적으로 부를 축적한 자들만이 당선의 접근 가능성이 높다. 결국 대의제는 권력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조건에서만 민주주의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시스템이다. 결국 선거는 형식적 평등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 원래 대의제는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p119) 대의제라는 선거를 통해서 지배층은 생명의 위협이 없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대의제의 본질을 이미 간파한 장자크 루소는 시민정부론에서 간접 민주정을 반대하고 직접 민주정을 주장하였다. 현재 스위스와 같은 일부 선진국에서는 직접 민주정치를 하고 있다. 

고대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고대 아테네의 일부 지식인들에게도 민주주의가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하나가 플라톤이다. 그는 아테네 시민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도 당시 소피스트의 인기를 압도하지 못하였다. 민주주의가 증오시되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민중의 통치하에서는 모든 질서가 파괴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p21) 여기에서 '질서'라는 것은 현재의 권력 분점 상태를 의미한다. 신분과 권력의 특권이 사라지고 권력에 접근성이 민주화된다면 자신들의 현재의 프리미엄은 세습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이는 군사 독재 시절에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자를 빨갱이로 매도하였던 자들의 논리이기도 하다. 그들은 항상 민주화 운동은 사회질서를 해치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나쁘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면서 민주적 절차를 통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가 시행되자 이번에는 새로운 논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에 반대되는 민주주의는 포퓰리즘이라고 한다. 사실 포퓰리즘은 민주적 정당성과 과두제적 정당성이 악화된 모순을 은폐할 수 있는 아주 편리한 용어이다.(p167) 이를 통해서 자유주의자들은 지배적 합의사항에서 모든 것들을 제어하게 된다.  

실제로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지 않다.(p156) 민주주의를 표방한 국가에서는 대규모 민영 언론 사주들이 언론의 공적 기능을 활용하여 대중매체를 장악하였다. 이들은 끊임없이 정치적 반대자들의 사상을 검증하려고 한다. 기득권층은 모든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논리로 정치적 상대방을 이데올로기의 덫을 씌우려고 한다. 권력은 자신들이 독점 상태에 있는데, 권력의 분점을 요구하는 실질적 민주주의에 광신적 반응을 보이며 민주주의에 증오를 표방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 교과서도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조작하려고 한다.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화를 주장하던 자들을 이데올로기의 덫을 칠해서 빨갱이로 몰아부치던 자들이 권력을 잡자 자신들이 마치 이 나라의 민주화의 화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들에게 자본의 무한한 축적은 곧 신앙이고 그 수단으로 토론이라는 정치를 몰아 내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와 역사에 비친 눈이 꽤나 무서웠는가 보다.

해방 이후와 미완의 혁명 '4.19'와 1987년의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민주주의'는 항상 맨 앞에 섰다. 그 때의 민주주의는 친일 '독재'와 군사 '독재'에 항거하는 의미로써의 민주주의였다. 그 당시에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포함하는 의미의 민주주의였다. 지금처럼 소수의 독점 대기업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유'는 당연히 '민주주의'의 하부 개념이었다. 당시 지식인과 민중들은 지금같이 탐욕스러운 '자유주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무절제한 자유, 합법을 가장하여 타인의 것도 빼앗는 자유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오로지 자유가 부족했던 시대는 당연히 민주주의가 최상의 가치였다. 이제 장기 집권이나 군사 독재는 흔적만 남기고 갔지만 그 때의 잔존 세력은 여전히 활기를 치고 있다. 그들은 독재시절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자유민주주의, 가짜 민주주의를 당시의 구호로 만들려고 한다. '민주주의'에 '자유'라는 이름을 덧붙여서 역사를 각색하려고 한다. 그들은 동북공정으로 역사를 조작하는 중국과 수많은 역사서를 조작하며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일본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아니 그들보다 더 나쁘다고 보아야 한다. 두 나라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지만 독재의 흔적들은 국가를 학대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을 만끽할 경제적 여유도 없는 가난하고 무식한 국민들은 '자유'는 무조건 좋은 줄만 알고 뇌화부동하고 있다. 가짜 민주주의가 최고의 굿판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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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문재인의 운명
문재인 지음 / 가교(가교출판)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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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바다를 생성의 어머니라고 한다. 바다는 원시의 모든 생명이 시작된 곳이며 바다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녹아서 융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는 선하고 악한 것, 온순하고 거친 것, 진실되고 거짓된 것을 포함하여 어떤 존재도 거부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바다를 향해서 가고 강물도 예외는 아니다. 강물은 육지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을 보고 느끼며 껴안고 바다로 간다. 여기에는 인류의 오랜 세월 동안의 치욕과 영예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강물을 역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지만 그 흐름은 평탄하지만은 않다. 수면은 도도하게 조용히 흐르기도 하지만 때로는 굉음을 내면서 천지를 요동치게 한다. 어느 순간에라도 깊은 곳에서는 소용돌이가 온갖 잡스러운 것들을 뒤섞여 놓고 갈등을 아우르면서 어떤 것도 강물의 위대함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강물의 진면목이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의 피상적인 면보다는 그 강물 속에 잠재된 측면을 통찰하여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하였다. 역사는 매순간이 정과 반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반목이 물결을 이룬다. 그  역사의 강물, 대한민국의 강물에 조각배 하나가 나타났다. 그 배는 기름이 있어야 가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지지'라는 민주주의가 있어야 만이 앞으로 갈 수 있는 배였다. 돈과 권력을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론조작이나 매수의 힘이 아닌 국민의 힘이 없는 경우에는 곧바로 침몰하는 배였다. 그 배의 선장, 노무현은 가난하여서 공부에 매달리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가고 온갖 고문과 인권 유린의 군부독재, 잔인한 기득권에 항거하였다. 그는 줄곧 아웃사이더였으며 매번 총선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으나 차차 그의 진정성은 세상에 알려지고 수많은 조그마한 노란 돼지 저금통이 모여서 참여정부라는 깃발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그는 '강물처럼'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다.(p464) 그것은 말로만 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토론과 설득이라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다.

강물은 아무리 굽이쳐도 결코 바다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간다. 눈, 코, 입을 베어가는 겨울 바람이 아무리 세차게 불어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간다. 그 곳에서 추위는 혹독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다가오는 감각은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사람은 추위라는 감각을 항상 외적인 피부로만 느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 두 명의다. 감각적 현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심리적 상태에 달라지는 경우가 흔하다. 예컨데 만물이 소생하는 봄은 왔으나 봄이 왔다고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시인 이상화는 온몸에  햇살이 내리쬐고 보리밭은 가뿐하며 나비, 제비가 깝치는 봄이 찾아 왔으나 들을 빼앗겨 봄도 빼앗겼다고 했다. 자연의 봄에는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만은 그렇지 않다. 이런 기분이 들게 하는 역사적 사건이 이 땅의 역사에서는 비일비재 하게 일어났다. 30년 전에 독재자의 저승 행차로 정치적 봄이 온 것으로 생각하여 '서울의 봄'이라고 지칭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정권의 교체가 이루어지고 민주 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서 권력을 위한 권력이 아닌 국민을 위한 권력이 행사 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일시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역사의 시계는 거꾸로 가고 서민을 위한 권력자는 서민의 배신을 당하고 서민의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의 음모에 빠져서 갈귀갈귀 찢겼다. 그 때야 살아 있는 권력자의 본 보습을 보기 시작하였지만 기차는 이미 떠난 후였다.  

눈보라가 북방과 남방에서 세차게 몰아 치는 겨울 밤은 혹독하다. 남방에서 부는 신자유주의 바람과 북방에서 부는 '핵'을 통한 협박의 바람이 만나는 길목에 자리잡은 노무현은 한 나라의 지도자라로서 온갖 고뇌를 짊어지면서도 때로는 비분강개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냉정한 마음으로 양날의 칼을 바로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가난한 민주주의에 부는 수구의 외풍과 진보의 내홍은 서럽게만 다가왔다. 사회 밑바닥에 흐르는 도도한 보수적 풍토와 여론을 주도하는 강고한 수구세력과 욕하고 외면하는 진보세력에 노무현은 망망대해에 외로이 떠 있는 외로운 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존재로 혼자 살아남는다는 것은 신체적, 정신적으로도 힘들 뿐만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을 떼는 것조차 어렵다. 특히 심리적인 극복 의지는 바람 앞의 초불처럼 나불거릴 뿐이다. 이 때는 정말로 온 가족이 함께 항 수 있는 따끈따근한 아랫묵이 절로 절실하다. 이런 때에 바로 옆에 자신과 함께 자신의 길음에 보조를 맞추거나 최소한 자신에게 응원을 보내 주는 존재는 전투에 임하는 장군에게 千軍萬馬의 가치 이상이다. 즉 친구의 존재는 치열한 경쟁과 어둠의 세력과 생사를 벌이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존재이다. 공자는 인생에서 자신을 알아 주는 진정한 친구가 3명 이상이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정도였다. 바보 노무현은 자신 보다 여섯 살이나 어리고 고시 5년 후배인 문재인을 한치의 망설임 없이 '노무현의 친구'라고 불렀다(p31).

바보 노무현의 친구의 인생에서 노무현은 무엇인가? 또 하나의 30년 지기의 '운명'은 우리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외나무 다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친구의 눈에 비친 바보 노무현을 본다. 바보 노무현은 자서전 '운명'을 출간하였지만 자신이 직접 탈고한 것이 아니어서 정치적 현황이나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때에 그의 심적 상태나 마음가짐을 알 수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비록 친구의 눈이라는 간접적인 매개체를 통해서 비쳐지는 그의 모습이지만 지금은 이것만이라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노무현의 친구는 중, 고등하교 6년간 무척 많은 책을 읽었다. 학교 성적에 악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하지밤 독서를 통해 세상을 알게 되었고 인생을 알게 되고 사회 의식도 생겼다. 가난했던 시절은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대학 시절 그리고 시위 전력으로 사법 시험 차석으로 합격하고도 판사에 임용되지 못하고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변호사가 되게 한 모든 과정들이 결국은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기 위해 미리 정해진 운명적 수순처럼 느껴졌다.(p193.)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친구의 삶은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명이다.(p441) 동업자로 변신한 친구는 대우조선 사건과 탄핵 사건에서 그의 의뢰인이 되었고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거치면서 그의 영원한 동행자가 되었지만 그를 먼저 보내는 이별의 아픔도 맛보았다. 친구에게 좀더 가깝게 다가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도 너무 많았다.  

참여 정부는 시민사회의 힘으로 출범한 정부였다. 바보 노무현은 대선 때 소속 정당인 민주당의 뒷받침보다는 시민 사회의 지지에 힘입어 당선되었다.(p303) 바보 노무현은 모든 권력적 수단을 포기했다.(p279) 오로지 도덕적 신뢰 하나만이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밑천이었다. 도덕적 가치를 기반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고 참여정부의 생명을 유지하여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덕적 가치라는 것은 모래알 같은 것이다. 모래는 언제든지 바람에 날리고 자취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국민의 믿음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도덕은 바람에 날아가고 마녀 재판 식의 비난의 목소리만 그 자리를 채울 뿐이다. 특히 그가 지역 구도 타파를 위하여 선거제도의 개혁을 전제로 한나라당에 제시한 대연정, 대북정책에서 6자회담 성사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수용한 이라크 파병은 시민사회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였다. 거기에다가 보수언론의 무자비하게 언론을 자유를 악용하는 보도 행태와 재임 초의 다수당의 횡포는 그의 도덕적 자부심과 도덕적 기반을 붕괴시키기 위하여 온갖 음모와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자신이 기르던 똥개가 아파도 모든 것은 노무현 탓으로 돌렸다. 민주주의와 서민들을 위해서 개인의 영달을 뒤로 하였지만 깨끗하지 못하다는 누더기를 뒤집어 써야만 했다. 자신들의 모든 잘못을 전 정부 탓, 북한의 탓, 세계 경제의 탓, 탓, 탓으로 돌리는 현재의 정부와는 전혀 반대의 상황의 연출되었다.
 
인생을 뒤돌아 보면 원칙에 입각하는 선택이 가장 최선의 선택이다.(p99.) 그 땐 용기가 없어서 바로 눈 앞의 이익을 외면하기 힘들어도 나중에 보면 권칙에 충실한 것은 번번이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으로 드런난다. 당장 불리해 보인다고 하여 우리의 추구하는 가치까지 내버린다면 패배는 말할 것도 없고 다음 해에 오는 봄바람을 맞이할 수 있다는 희망조차 사라진다. 원칙의 충실함은 나의 빈 틈을 줄일 수 있기도 하다. 가치와 명분의 상실은 봄에 훨훨 나는 나비, 제비에게도 부끄러워진다. 봄이 오는 것을 싫어 하는 凍土의 세력은 따스한 햇살이 온 세상에 내리쬐는 봄을 싫어 한다. 돈과 권력이 있는 자만이 따스한 벽난로의 여유를 즐기기를 원한다. 날마다 피의사실을 흘리고 다니면서 정작 자신들의 잘못에는 눈을 감아 버리는 이들에게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봄날이 오는 것을 온몸으로 방해한다. 권력을 나누는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우월감이 상실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에게 대항하여 봄날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깨끗해야 한다. 약점이 있으면 협박을 당하거나 자칫 잘못하면 신세를 망치기 십상이다. 人情에 치우쳐서 측은지심을 기대하는 것은 민주화 운동과 오랜 세월을 함계하는 인생의 벗에게도  누를 끼칠 수가 있다. 당장은 힘들거나 어려워도  원칙에 입각해서 가는 것이 나의 약점을 줄이고 장점을 살리는 인생의 정답 중의 하나이다.   

바보 노무현은 흐르는 강물을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흘러 갔지만 우리가 살아 가는 세상에 많은 교훈과 과제를 남겼다. 그의 정신과 가치는 '사람 사는 세상'이란 깃발 아래 남아 있다. 그 세상은 경제적 복지를 넘어서 빈부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똑같은 존엄한 세상을 의미한다. 그가 치열하게 꿈꾼 세상에는 아직도 봄바람은 불지 않고 있다. 우리가 운명처럼 살고 있는 세상은 기상 이변이 잦아지고 있으며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지구 온난화가 원인이라고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구 온난화로 인하여 바닷물이 따듯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현상만 추구하는 책임 회피성으로 보인다. 그 원인은 외부에서 부는 바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는 인간의 문제로 보인다. 해수면 온도의 상승은 남극과 북극의 얼음도 녹이고 있지만 인간의 탐욕은 사그러들 줄을 모른다. 북극해에는 바닷길이 생기고 시베리아의 영구 동토층도 녹고 있지만 소비자인 국민의 마음은 더욱 꽁꽁 얼고 있다. 한여름에 뜨겁게 내리 쬐는 태양도 수명이 있다고 하니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가 보다.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세계가 이러할진데 인간의 세계는 두말할나위도 없다. 역사의 강물도 한층 더 혼란스러워지고 있다. 예전에는 權不十年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權不五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성싶다. 권력의 상실과 동시에 생명이 위태로워진다. 권력을 부리지 않고 진정한 민주주의자를 꿈꾸는 자에게는 정말로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말이다. 그런데 권력을 악용하여 남을 못살게한 동토층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통토층에 고인 물은 녹아서 강으로 모여들고 결국 진실은 드러날 것이다. 역사의 강물은 진실된 것과 거짓된 것을 토해내고 골라내서 바다로 흘러 갈 것이다. 다만 순수했던 한 청년의 운명이 5년의 순행과 4년의 퇴행이 만나는 시점에서 지나간 강물의 자취를 세겨보고 새로운 출발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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