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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구약편) - 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ㅣ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김동문 지음, 신현욱 그림 / 선율 / 2018년 1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기만 하고 질문은 하지마세요.”
아이들에게 성경을 읽히고 싶은 것이 부모마음이다. 하지만 제일 두려운 것 한 가지가 있다. 이 녀석들이 그냥 읽기만 하면 되는데 질문을 한다. 사람 곤란하게 말이다. 성경은 읽히고 싶지만 질문은 사절. 아이들의 질문에 당혹했던 순간, 이런 것들이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히고 싶지만 읽히지 못하는 이유중의 하나 일 것이다. 왜 어른들의 눈에는 의심이 생기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아이들은 의문을 품고 왜? 뭐예요? 라고 물어오는 것일까?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자라면서 그 의문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성장에 따른 앎의 체계인 것일까? 아니면 믿음이 자라고 깊어지면 도(道)를 깨치듯 알게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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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사기(詐欺)치지 마세요..”
성경을 읽다 의문이 생기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하여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라,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며, 부끄러운 일도, 믿음이 부족한 일도 아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나라의 비밀이다. 모스부호처럼 해독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탁월한 지식을 가진 학자도 성령의 충만한 아이보다 성경을 더 잘 이해하지 못할 수 있는 즉 세상의 지식으로 깨달아지는 책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책을 가지고 너무 많은 사기(詐欺)친다. 읽기만 하면 자연스레 통달하고 기도가 깊어지면 하늘의 지혜로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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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모른다고 말하세요.”
우리는 성경의 1차 독자가 아니다.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까?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익숙한 눈으로 그냥 다 아는 척 흘려가 버린 것들. 이제는 그 성경을 “낯설게 읽기”를 권한다. 아니 “낯설게 읽기”보다 “ 솔직하게 읽기”를 권한다. 그렇게 읽어 나가도록, 성경에 대하여 무리하게 아는 척해 어깨 근육이 뭉친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는 책 한권이 있다. 그것이 바로 김동문 선교사님의 글과 신현욱 목사님의 그림으로 이루어진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 선율출판>이다. 자 이 책을 읽어보자. 그리고 자신 있게 웃으며 “이거 저 잘 모릅니다. 빨리 신약편도 출판해주세요.”라고 함께 압력을 모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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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중근동의 눈으로 읽는 성경>”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누구나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에서 장년에 이르기까지 힘들이지 않고, 책 읽기를 싫어하는 아이일지라도 “하하”“어머”“그랬구나”“ㅋㅋㅋ”을 연발하며 읽게 될 만큼 흥미진진하다. 그렇다고 성경의 거룩성을 해치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런 책 절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며 가지게 되는 흥미는 단순한 재미가 아니다. 성경으로 가까이 이끄는 흥미다. 이 책을 읽으며 입술이 초생달이 되는 이유는 깨달음에서 오는 미소다. “ 그래 나 이 부분 궁금했어.” “이런 배경을 가졌구나.” “아... 이런 뜻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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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신약편의 출간을 염두에 두고 구약의 내용만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 방대한 내용속 우리들의 궁금증이 어디 한 두가지겠냐만은 소제목에서 알 수 있듯, ‘낮은 자의 하나님을 만나는 ’으로 통일성을 엮고 있다. “낮은 자의 하나님”은 이 책에 소개된 부분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성경 66권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 “낮은 자의 하나님”이다. 그런 까닭에 저자 김동문 선교사님은 그 “낮은 자의 하나님”을 익숙한 통념으로 흘려버리지 않고 낯설게 읽기를 하면서 더 깊이, 더 가까이 만나길 소망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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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보자. 세상에 이렇게 귀여울 수가!!!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작은 문이 열려 있다. 그 문 앞에는 양의 옷을 입은 아이가 앉아 있다. 감은 눈이 여간 평화로워보이지 않는다. 눈으로 덮인 산. 그 하얀 산에 빛이 들고, 그 반사된 빛이 방안 깊숙이 들어와 있다. 하지만 이상하다. 그렇게 등 뒤에서 빛이 비취면 양 앞에 그림자가 생겨야 하는데 그림자가 없다. 아마도 완전한 빛이신 하나님께서 이 양 뒤에 서 계시는가 보다. 정(淨)함만 있는 밝음이 책을 펼치기도 전에 입술 끝이 올라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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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18개의 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그 각각의 이야기들 하나하나 다 소개하고 싶지만 두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는 “성막의 아이러니”편이다. 아이들에게 성막에 대하여 설명을 했던 적이 있다. 친절하게 성막 모형도 만들었다. 동영상도 보여주면서 엄청 열심히 설명했던 것 같다. 그것이 다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웅장하고도 거룩한 cg가 깔리고 연기가 올라가는 엄숙한 그 성막의 동영상을 보면서 나를 압도시킨 그 웅장함이 과연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도 있었을까? 현대의 교회건물이 익숙한 아이들이 광양의 성막을 바라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도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의 생각과 똑같지 않을까? 이 책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대 이집트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은 대부분 신의 능력은 신전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생 각했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당시 이집트의 대표적인 신전인 카르낙 신전은 폭이 800미터, 길이가 1.5킬로미터였다. 이런 신전이 이집트 곳곳에 있었는데 대리석 화강 암 석회암 등의 돌로 정교하고 화려하게 만들어져 그 웅장함을 더했다. 이렇게 웅장한 신 전을 보면서 신의 능력이 그 웅장함만큼 강력하다고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성된 성 막을 보면서 받았을 충격은 어떠했을까? .... 완성한 성막은 ..... 자신들이 매일 모았던 이집 트 신전에 비해 960분의 1 정도의 크기였다.” p100-101
왠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심과 불안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나 역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지. 그리고 여러분들이 상상한 성막 이집트의 신전보다 작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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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회는 대부분 카페를 갖고 있다. 그 카페의 이름들도 대표적인 몇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로뎀나무”다.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도망가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간구하는 부분에서 나온다. 쉬기 좋은 카페. 그 카페의 이름은 로뎀.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쉬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설교에서 듣고 성지 순례등 여행을 통해 알고 있겠지만 이 로뎀 나무는 뜨거운 태양을 쉬게 해 줄 수 있는 가지 울창한 나무가 아니다. “너무나 비참했던 로뎀나무 아래”에 소개되고 있는 이야기는 우리들의 눈은 쉴 수 없었던 로뎀나무에 주목시키지 않고 엘리야와 함께하신 임마누엘 하나님에 머무르게 한다.
“로뎀나무를 찾은 엘리야가 선택한 것은 쉼이 아니었다. 우리는 로뎀나무 아래의 엘리야 를 보면서 쉼이나 회복을 떠올린다. 그러나 엘리야에게 로뎀나무는 비참함의 장소였고 죽음의 장소였다. 엘리야는 낮잠을 자고 잠시 쉬면서 회복을 기대하고 로뎀나무를 찾아간 것이 아니다. 절망이 극에 달해 죽음의 장소로 선택한 곳이 로뎀나무였다. 그러나 하나님 은 절망과 죽음의 잘이에 찾아오셔서 구운 떡과 물을 주면서 참 안식을 누리게 하셨다. 엘리야에게 ”왜 절망하느냐 왜 죽으려고 하느냐“고 묻지 않으셨다. 절망한 엘리야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 .... 생의 끝자락에 있던 엘리야에게 주신 하나님의 안식이었다. 죽음의 장소로 선택한 로뎀나무가 안식의 장소로 뒤바뀐 것이다.”p206-207
이 모든 의미를 알고 교회카페 이름을 로뎀나무라 지은 것이라면 그 장소에는 이런 생명의 역사가 회복의 역사가 함께 하는 곳이 되지 않을까?
이뿐 아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에 대한 잘못사용된 용례에 대한 바른 가르침과 음탕한 여인인 고멜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가 머무는 사회적 약자임을, 바른 십일조관과 안식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개념을 쉬운 그림으로 읽는 이들에게 자상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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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다. 성경전체가 이렇게 나온다면 현대인들이 외면하는 성경이 아니라 즐겨 읽게 되는 책이 되지 않을까? 신약편이 기대된다. 아무쪼록 이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오해하고 있었던 잘못된 지식들은 바로 잡아지고 아이들의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아니 솔직히 “엄마도 몰랐어.” 이야기하며 자녀들과 함께 읽어나가며 성경의 세계에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