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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이들의 하나님: 룻기 ㅣ 일상을 변화시키는 말씀 7
캐롤린 커스티스 제임스 지음, 이여진 옮김 / 이레서원 / 2018년 1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외된 이들의 하나님 : 룻기 / 캐롤린 커스티스 제임스 지음 / 이레서원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룻기는 아름다운 이방여자의 로맨스입니다. 룻기는 착한 며느리 이야기입니다. 이방여자가 이스라엘 민족으로 들어와 복 받게 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룻기를 이렇게만 읽는다면 당신은 룻기의 100분의 1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된다.
그렇다. 이레서원에서 제 3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 룻기가 나왔다. 소외된 이들의 하나님.- 룻기. 룻기를 소외된 이들의 관점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모두가 룻의 헌신과 보아스의 넉넉함에 주목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나오미의 고통”이다. 나오미를 가부장적 제도속에 함몰된 이스라엘의 소외된 이웃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오미를 여자 욥으로 바라보며 시작하는 이 책은 서론을 포함하여 총 9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바르톨로뮤시리즈가 그러하듯 2시간이면 충분히 읽어낼 수 있는 작은 책이다. 2시간이면 충분한 책. 그럼에도 우리들에게 오래도록 울림을 남긴 이 책을 드려다 보자.
최악의 상실을 경험한 나오미
룻기의 첫 다섯 절은 이스라엘 백성인 나오미의 삶에 의미를 주던 모든 것을 텅 빈(empty)상태로 만들어 버린 계속된 비극을 서술한다. 이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욥’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욥과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퍼부으신 고난의 부당함에 대해 항의하며 부르짖는다.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을 의심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과 그들의 항의에 아무런 설명을 해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항의는 우리들에게 복되다.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 침묵하지 않도록, 진실하게 감추임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귀한 본이 되는 까닭이다.
저자는 룻기가 갖는 성경위치를 통해 룻기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해준다. 잠언과 사무엘상 사이에 위치한 룻기를 거시적 관점으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1:1)와 다윗 왕정(4:18-22)을 견고하게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이야기로 미시적 관점으로는 이삭줍기, 계대 결혼, 기업 무를 자에 대한 룻의 재해석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로 바라본다. 또한 제 3의 포괄적 관점으로 곧 신약과 그 이후 시대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포괄적 관점을 제시한다. 하나님은 평범하면서도 사회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각 사람을 통해 일하심으로써 세상을 향한 당신의 목적을 진척시킨다는 것이다.
가부장제라는 렌즈.
가부장제 세계에 있는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종속되어 있으며 나오미의 가치평가는 가족 중 남자 구성원으로부터 비롯된다. 남편에 의해 아들에 의해 평가되는 나오미. 그녀는 0점이다. 나오미의 가치가 되어줄 남편이 없다. 두 아들이 죽었다. 그녀의 가치는 제로다. 나오미의 가치만이 아니라 남겨진 두 명의 불임 며느리 역시 0점이다. 그녀들에게 남겨진 것은 가난에 허덕이고 상처 입기 쉬우며 고통뿐인 두려운 미래만이 보장된다. 사별과 불임을 겪으면서 이 과부들에게 부여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던 모든 것과의 단절. 이들의 사회적 지위는 어느 누구의 보호도 받을 수 없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런데 하나님도 이들을 그렇게 보시는가? 하나님이 보시는 이 여자들과 이들의 가치는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판이한 성격의 견해 그것이 룻기의 근간을 이룬다. 성경에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분명하게 명령하는 데 반해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오늘날에도 신부가 남편 가족에 흡수되어 버린다. 가부장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분명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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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실행 – 헤세드
두 며느리를 자신들의 신과 고향으로 돌려보내려 한 나오미는 앞으로 겪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을 며느리들만큼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피할 수 없을지라도 며느리들만큼은 피하게 해 주고픈 헤세드. 나오미의 며느리를 향한 마지막 사랑이었다. 그 나오미의 헤세드는 나오미를 위한 룻의 사심없고, 수그러들줄 모르는 헌신을 통해 다시금 나오미에게로 닿게 한다. 누가 헤세드의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 아닐까? “당신의 밭에서 이삭줍는 것을 허락하소서”라는 룻의 말에 보아스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 “ 이삭줍기를 허락함”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라는 율법 너머의 본질을 꿰뚤게 한다. 이삭줍기 마당은 치열한 생존의 장소다. 그 곳에서도 룻은 절대적으로 소외된 이방인이며 위험에 놓인 과부이며 젊은 여자다. 보아스를 통한 하나님의 헤세드는 예상외의 풍성한 보리를 통해 나오미를 회복시킨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산 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룻기에는 매 장마다 엘리멜렉과 그의 아들들이 등장한다. 또한 룻이 구원하고자 한 사람은 돌아가신 자기 시아버지 엘리멜렉이다. 엘리멜렉의 기업인 밭의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헤세드는 죽은 자에게까지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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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남성다움이 이룩한 복 받은 연합
보아스는 자기를 희생하더라도 올바른 일을 할 정도로 통이 큰 사람이었지만 룻기가 주목하는 그의 진정한 남성다움은 그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보아스의 행위는 가부장제 속에서의 남성다움의 기준을 뒤엎는 전복적인 것에 있다. 그는 평등을 넘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정의를 모색했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었으며 여성들에게 법적 발언권을 준다. 법이 요구하는 바를 자발적으로 넘어서는 하나님의 헤세드의 실현은 여자를 지으신 하나님의 계획함에 부응하는 완벽한 복 받은 연합의 전형을 보여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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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뿌리에서 새롭게 돋아난 영광 - 일곱 아들보다 나은.
새로운 출발은 언제나 우리가 쓰러진 그 자리로부터 시작된다.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야 한 걸음을 나아갈 수 있다. 나오미의 새로운 시작은 나오미의 고통에 뿌리를 박고 있다. 룻은 나오미에게 받은 헤세드를 최상의 것으로 되갚는다. 자기 아들을 나오미에게 줌으로써 나오미의 텅빈 상태를 되돌린다.“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나오미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헤세드는 중대한 왕국의 임무를 위해 그녀의 고통을 재배치하고 계신다. 오벳의 탄생이다.
보아스를 통하여 진정한 남성다움과 복 받은 연합에 관하여 룻과 나오미를 통하여 제도와 환경에 얽매이지 않는 하나님의 헤세드야말로 복음을 실행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룻기를 통하여 배우게 된다. 한국사회, 한국교회는 가부장제에 함몰된 이스라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까닭에 소외된 이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룻기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외된 이들에게 머무르는 하나님의 헤세드. 그 하나님이 바로 당신과 나의 하나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