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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랑카랑 카이사르 ㅣ 앗,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1
믹고워 지음, 이희주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2년 7월
평점 :
절판
카이사르는 기원전 45년과 44년에 원로원과 민화가 카이사르에게 안겨준 특권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1. 종식 독재관으로 임명했다. 카이사르는 이제 임기가 6개월로 제한돼 있던 독재관 자리에 죽을 때까지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2. 독재관이면서도 집정관을 겸임할 수 있게 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 공화정 체제인 양 꾸밀 수 있었고, 집정관만이 가진 권리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3. 개선장군의 임시 칭호인 '임페라토르' 를 언제나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카이사르가 이 칭호를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임페라토르'라는 말은 '황제' 를 가리키는 말로 군어져 갔고, 이후이 로마 황제들도 이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4. '조국의 아버지' 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에 이어 두번쨰 건국자라는 싱징성을 갖게 되었다.
5. 개선장군이 개선식 날 입는 자줏빛 망토를 평소에도 입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언제든 필요할 때면 개선장군만이 갖는 영웅의 영예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6. 평소에도 월계관을 쓸 권리를 주었다. 카이사르 자신이 스스로 최대의 약점이라고 생각한 대머리를 감출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개선장군의 영예도 함께 누리면서.
7. 원로원 회의장에서 집정관보다 한 단 높은 곳에 앉을 권리를 주었다. 로마의 최고 지도자는 1년마다 바뀌는 집정관이었는데, 그보다 윗자리에 앉으니, 그럼 뭘까요?? 저도 몰라요.
8. 극장이나 경기장에서 관중석 중앙의 특별석에 앉을 권리를 주었다. 아, '로열 박스' 라는 게 여기서 생겨났군!!
9. 유피테르 신전 입구에 서 있는 왕정 시대 왕들의 입상 사이에 자신의 입상을 놓을 수 있는 영예를 주었다. 앗, 로마인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왕의 반열에 카이사르가? 혹시?????
10. 원로운 회의에서 가장 먼저 발언할 권리를 주었다. 어느 누가 감히 카이사르보다 먼저 말할 수 있었을꼬!!!!!!!!!!!!!!!!!1
11. 국가의 공작자를 임명할 권리를 주었다. 공화국 초창기부터 공작자 임명권을 가지고 있던 민회는 단지 승인만 해주는 형식적인 기관이 되고, 카이사르가 모든 걸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민중파의 대표 주자를 자처하던 카이사르는 어디로 간 거지??????????
나는 이 책을 읽고 카이사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글을 읽으실때 카이사르를 모르실탠데............ 그럼 카이사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카이사르 :
카이사르 갈리아 정복 시 자신이 참전했다는 표시로 늘 진한 붉은색 망토를 입고 전투에 나갔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비록 갈리아를 정복했지만, 이후에는 보복적인 정치보다는 복속한 켈트족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켈트족에게 정치적 자율권을 주고 농경을 전파해 경제를 일으켰으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켈트족은 적극적으로 로마 시민화하기도 해 반발을 없애고 충성을 다짐받았다.
갈리아 정복은 카이사르에게 여러 면에서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정복에서 얻은 약탈로 부유해졌으며 오랫동안 변방지역을 괴롭혀왔던 켈트족을 복속시켜 로마에서 인기가 치솟았다. 더불어 그는 7년 동안 전투로 단련된 노련한 군인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어 그 누구보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복속된 갈리아 켈트족들의 충성과 넓은 영토도 카이사르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었다. 문필에도 재주가 있었던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정복기를 <갈리아 전기>로 남기기도 하였다.
갈리아에서의 승승장구로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 귀족들로부터 더욱 경계를 받았다. 협의롤 통해 로마 정치를 이끌어가던 귀족들은 카이사르의 독주가 장차 귀족권을 약화시키고 1인 독재의 시대를 불러 올 것이라 우려하였다.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카이사르를 견제하려고 나섰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즈음 삼두정치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현재 이란 북동부지역)와의 전쟁 중에 전사하고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3명이 이끌던 삼두정치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로마 귀족들이 먼저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폼페이우스를 자기편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혼인으로 이루어진 인척 관계가 끊어지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결별하고 귀족 세력과 손을 잡았다. 원로원의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즉시 군대를 해산하고 갈리아 총독에서 물러나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카이사르에게 무장해제하고 죽으러 오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는 몇 차례 귀족들과 협상을 하려했지만,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을 믿고 있던 귀족들은 이를 무시했다. 이 와중에 카이사르의 편을 들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있는 갈리아로 도망쳐온다. 카이사르는 협상의 테이블은 이미 깨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내전을 불사하기로 한다. 그는 갈리아에서 단련된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갈리아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사들 앞에서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는 유명한 연설을 한다. 이 말은 내전만은 피해보려 했던 카이사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후 마지막 결단이 로마진격이었던 것이고 그 결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카이사르 군대의 재빠른 움직임에 로마귀족들과 폼페이우스는 당황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맞서지 않고 로마를 비운 채 국외로 나가 전열을 가다듬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폼페이우스와 로마 귀족들의 오판이었다. 그들은 카이사르보다 몇 배나 되는 군대를 가졌으면서도 제대로 한번 맞서지 못하고 카이사르의 군대에 밀렸다.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히스파니아(현재 스페인지역)와 그리스에서 카이사르 군대에 대패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지만 피난 중 암살당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건너가게 되고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홈페이우스가 이집트로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려 했던 것은 그를 지지했던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이미 전세가 카이사르 쪽으로 기운 것을 보고 폼페이우스를 배신했다.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부하에게 암살당했다. 이집트로 건너와 정적이긴 하지만 옛 친구이자 한때는 사위이기도 했던 폼페이우스의 시신을 본 카이사르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을 다투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손을 잡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내쫓고 그녀가 권력을 독점하도록 도왔다. 그 와중에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둘 사이에는 아들이 태어났다.
폼페이우스라는 강력한 정적이 사라지고 귀족권이 약화된 로마로 돌아가면서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 아들을 빈객으로 대동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로마와 이집트의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꿈은 카이사르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정적이 사라지고 귀족권이 약해진 로마는 카이사르 1인 천하가 되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 자리에 안토니우스를 앉히고 자신은 그 위의 종신 독재관 자리를 차지하였다. 집정관은 명목일 뿐 로마의 정치는 이제 카이사르 1인의 손에 의해 좌우되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은 카이사르였지만 그는 황제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전 시대 귀족들이 각자의 이권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정체되곤 했던 개혁들 하나 하나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운명의 날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회랑 앞에서 14명의 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옷섶에 숨겨두었던 단도를 꺼내 무차별적으로 카이사르를 찔렀다. 카이사르는 총 23곳에 상처를 입고 토가자락을 휘어감은 채 쓰러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쓰러진 장소는 그의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의 동상 앞이었다.
쓰러지기 전 카이사르는 암살 귀족들 사이에서 총애하였던 두 명의 브루투스를 보았다. 죽기직전 그는 ‘브루투스 너마저’ 라고 신음을 뱉었다. 카이사르가 말한 브루투스는 두 명의 브루투스 중 데시무스 브루투스였을 것이라는 것이 후세 학자들의 추측이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 공개된 유언장에서 데시무스 브루투스가 옥타비아누스에 이어 2번째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측을 한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본 데시무스 브루투스는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 고개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하자 그동안 그를 지지했던 민중의 분노는 거셌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가 암살이 정당하다고 주장했지만 성난 민중들에게 공격당했다. 암살파와 카이사르파는 종신독재관을 제외하고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그대로 받들기로 합의하였다. 카이사르는 화장되었는데, 그의 유해는 때마침 내린 비에 모두 씻겨 내려가 버렸다. 그 때문에 카이사르는 무덤조차 없다. 이후 로마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 옥타비아누스의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하게 되고 암살파들과의 내전에 돌입하였다. 키케로, 브루투스 등 암살파가 모두 제거된 이후에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패권을 놓고 내전을 벌였다. 카이사르가 마련한 1인 독재 정치는 이후 옥타비아누스가 정권을 획득한 후 초대 황제가 됨으로써 결실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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