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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ㅣ Project LC.RC
이서영 지음 / 알마 / 2020년 5월
평점 :
나는 왜 러브크래프트 소설을 좋아하는가
처음 이 시리즈가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대하며 펀딩에 참여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나의 평가는, "맛은 있는데 내가 원한 맛은 아니다"이다.
내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배경, 인물, 작가의 문체 등이 코스믹 호러의 분위기와 어우러져서 내가 원하는 분위기의 공포를 잘 표현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전시대에 비해 엄청난 과학적 성과를 이루었으나 여전히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무지의 영역이 더 넓었던 시대. 인간이 모든것을 지배한다고 자신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알지 못하는 곳에 대한 공포를 여전히 갖고있는 인물. 고전소설을 읽는듯한 문체. 그리고 나는 이 모든것 중 19세기말 ~ 20세기 초라는 시대적 배경이 가장 중요한 장치라고 생각한다.
1900년과 달리 현대인의 인식범위에 들어오지 않는 공간적 배경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깊은 정글 속이나 남극, 태평양 한 가운데처럼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상상의 영역으로 남아있었던 공간은 현대인에게 있어서는 마음만 먹으면 그 자리에서도 눈으로 볼 수 있는 공간에 불과하다. 여기서 현대를 배경으로 한 코스믹 호러를 즐기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드러난다. 1900년의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것이 현대의 인간에게는 공포가 되지 않으며, 우주조차 인지가 가능한 범위에 속한다. 또한 우리는 현대의 지구라는 공간에 그러한 공포를 느끼기 어렵다. 현대의 지구는 우리의 생활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대인인 주인공이 우주적 존재에 대해 극단적인 공포를 느끼는 것을 보며 호러소설의 느낌을 즐기기는 어렵다.
이런 점에서 내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우모리 하늘신발>이었다. 이 작품이 내가 이 시리즈에 기대한 이상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다. 공간적 배경을 한국으로 바꾸면서 시간적 배경을 1900년대 초중반으로 설정하여 러브크래프트 소설과 유사한 환경을 갖추었다. 그러나 <우모리 하늘신발>도 인물이나 사건은 러브크래프트 소설에 등장하는 광기, 절망 등의 요소가 없어서 아쉽기는 했다.
그리고 코스믹 호러의 공포적 요소를 오컬트적 요소와 모호하게 섞어서 현대인, 특히 한국인에게 잘 어울리는 공포의 맛을 잘 살렸던 <외계신장>도 정말 좋았다. 특히 <외계신장>은 메시지가 분위기와 매우 잘 어우러져서 별 생각없는 사람도 자연스럽게 메시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호러소설로는....
아무튼 내가 이 시리즈를 평가하는데 주안점을 둔 요소는 바로 이것이었다. 얼마나 러브크래프트 소설의 분위기를 잘 살리면서 공간적 배경을 바꾸거나, 현대소설이 갖고있는 흥미로운 구조를 가져오는 등의 변주를 해내는가.
그러나 나의 기준에서 이 시리즈는 후자는 달성 했지만, 전자는 거의 살리지 못했다고 느꼈다. 몇가지 아쉬운 점의 예시를 들자면 이 시리즈의 정체성에는 러브크래프트의 인종차별적, 남성중심적 시각을 뒤집는 것이 포함된다. 나는 이 점이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속 분위기를 재현하는 것의 걸림돌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몇몇 작품은 이러한 요소가 크게 강조되어 호러소설의 분위기보다는 메시지가 더 큰 존재감을 드러내어 호러소설의 재미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결국 러브크래프트 소설 특유의 맛을 원했던 사람에게는 MSG가 빠진 라면과 같은 맛을 내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그래서 차라리 시대적 배경을 과거로 돌려 주인공을 러브크래프트적으로 비뚤어진 인물을 삼되, 그의 부조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비틀어서 메시지를 전달했으면 어느정도 맛도 지키면서 의미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두번째 한계점은 문체이다. 여기서 문체가 한계라는 것은 문체가 나쁘다거나, 유려하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유려해서 분위기를 해쳤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얼마 전 출판된 <블랙톰의 발라드>를 읽으면서도 느꼈다. 현대 소설을 쓰는 작가의 유려한 문장으로 전해진 코스믹 호러적 광기는 그다지 광기로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찢어지는 오디오의 사운드를 듣고싶은데 오디오의 성능이 좋아서 이를 부드럽게 마사지 해줄 때 느낄 수 있는 느낌이었다.
원조의 맛은 아니지만
그런데 이러한 한계점이 비단 러브크래프트 소설에만 있는것은 아니다. 여러 명작을 재가공한 2차 창작물 등이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러브크래프트와 교류하던 작가들이 쓴 소설만 봐도 이러한 어색함이 느껴진다. 호러소설 뿐만 아니라 헐리웃에서 재탄생한 여러 셜록홈즈만 봐도 원조의 맛은 별로 느낄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 시리즈를 러브크래프트 소설이라기보다는 현대의 관점으로 쓴 크툴루 신화라고 보고싶다. 러브크래프트 소설은 그의 성격과 분위기가 묻어나는 것이지만, 크툴루 신화는 여러작가가 참여해서 만들어가는 세계관이다. 본인이 러브크래프트가 아닌 이상 누구도 러브크래프트 소설은 쓸 수 없다. 그러나 크툴루 신화는 누구나 쓸 수 있다.
러브크래프트 소설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 작품을 추천하기는 망설여질 것 같다. 그러나 크툴루 신화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권해볼 만 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꼽는 시리즈 재미 상위권은 <외계신장>, <우모리 하늘신발>이다. 세트를 한번에 구매하는것이 고민되는 사람은 이 두 권을 먼저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