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대화 - 관상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
토머스 키팅 지음, 엄무광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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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키팅 신부님은

미국 트라피스트 수도회 사제로,

스펜서에 있는 요셉 수도원에서 수도원장으로 활동,

1975년 향심 기도 운동을 시작,

1984년 국제관상지원단을 창설,

2018년 선종하셨다.


이 책은 향심 기도로 영적 여정을 시작한 사람들이

이 여정을 진지하게 지속하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여행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쓰여졌다.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부터

신부님의 생애가 궁금했다.


문장 하나에 담긴 의미를 곱씹으며

그 의미를 깨닫기까지

내가 걸어왔던 여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결코 짧지 않은 그 여정을 겪고서야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었는데

신부님은 어떤 경험과 성찰로

거기까지 다다랐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입부를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문장 하나에 걸려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했으니.


다행히 신부님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당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으셨고

덕분에 말씀으로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특별히 성 안토니오 성인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대목에서 악마의 그 방법이

내가 종종 겪는 갈등과 관련이 있어 보여 오래 머물렀다.


악마는 '의례적인 전략'인,

영적 여정에 오른

초보자들의 약점이 무엇인지 시험해보고

이 약점을 집요하게 이용하여 영적 여정을 포기하고

이전 생활로 돌아가도록 설득하는 것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나의 '이전 생활'은 고립되고 외로운 모습이다.


그런데 변화하려고 할 때마다

편하게 느끼는 이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이대로의 모습이 싫어서 변화하고자 했지만

익숙하고 편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다행인건 변화하려는 나를

돕는 이들이 주위에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의도치 않았다 해도

덕분에

내 생애 그 어느 때보다 잘 지내고 있다.


짧은 순간 스친 생각들을

글로 옮겨 적지 못했던 것이 안타깝다고 느껴질만큼

신부님의 글 속에서 공감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일독으로는 이해의 부족함이 느껴지는 책.


성찰로 침잠하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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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묵상 노트 - 주님 부활을 기다리는 40일의 여정
가톨릭출판사 편집부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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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새 달력을 받으면

빨간 날들의 분포를 확인하고,

가족들의 생일을 기록해둔다.

그러고나서 그해 재의 수요일과 부활절

날짜를 확인한다.

대림시기보다 사순시기를 더 기다리는

나는 사순시기의 성가도 더 좋아한다.

어릴 땐 주일학교에서 배운대로

대림과 사순 시기에

습관이나 태도 중 고치거나 억제해야 할 것들을 골라

그것들을 하지 않음으로써

희생을 실천해야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실천들이 일시적인 변화에 그치고,

궁극적으로 그 희생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나눔이나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 생활을 잠깐 바꾸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겠다는 깨달음.

그후론 희생이 아니라

대림과 사순 시기에 더 나누고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또, 일상에 치여 가까이 하지 못했던

성경을 조금 더 챙겨 읽는 시기로 삼았다.

성경 통독 후 하고 싶었던 것은

성경 쓰기다.

아이 첫영성체 준비하며

마르코 복음을 필사했다.

그런데 필사를 하며 느낀 건

나는 묵상을 더 하고 싶다는 것!

<매일미사>를 챙겨

매일 복음 묵상을 하거나

묵상을 도와주는 글이 실린

교회 내 잡지를 구독하기도 했었는데

이번 사순 시기에 준비한 것은

<사순 묵상 노트>다.




재의 수요일부터

주님 부활 대축일까지

복음을 묵상하고,

생각할 거리들에 대해서도

내 생각을 적어보고,

실천 사항을 하나씩 행해보도록 이끌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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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조앤 치티스터 지음, 박정애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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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조앤 치티스터 수녀님은

1936년 미국에서 태어난

베네딕도회 수녀로

40년간 평화, 인권, 여성, 교회 쇄신을

주제로 다룬 세계적인 강연자이자 영성 작가.

수녀님의 저서

<조앤 수녀님의 동물 친구들>을 읽은 적이 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코헬렛 3장 1절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는 구절을 통해

코헬렛의 지혜를 헤아려본다.

태어날 때,

잃을 때,

사랑할 때,

웃을 때,

수확할 때,

울 때 등

사람이 살면서 맞게 되는 때마다

묵상할 거리들을 제시한다.

그중 '치유될 때'를 읽으며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겠다는 다짐을 할 때,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희망 그리고 기쁨을

주는 일에 손을 뻗을 때 치유가 시작된다는

말씀에 공감했다.

그러나 그렇게 다짐하기까지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다.

또, '뿌릴 때'를 읽으면서

오래 전 함께 봉사하시던 신부님께서

우리의 봉사는 씨를 뿌리는 작업이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는 수확하는 것을 보지 못해.

그냥 씨를 뿌리는 거야.

그러면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싹을 틔우겠지.

우리는 씨만 뿌리면 돼."

봉사하며 항상 신부님의 말씀을 새겼는데,

씨를 뿌리며 경험하는 좌절과 손해까지도

각오해야한다는 책의 구절을 읽으면서

사명감을 가지고 봉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수녀님의 글에서는

깊은 침묵이 느껴졌다.

깊은 침묵 중에

깊은 묵상 중에

근본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지혜의 말씀을 얻은 듯 느껴졌다.

결국 사람이 얻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

내가 갈고 닦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갈망하게 하는 물음들을 던져준다.

다시 일독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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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다가올 세계
프란치스코 교황.도메니코 아가소 지음, 이재협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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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겪는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

가장 소중하게 다가온 가치는 세 가지다.

첫째는, 보다 유연해지고

우선순위를 새롭게 하고

중요한 가치를 다시 생각하라는 말씀.

둘째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지키는 일에

더 이상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는 말씀,

셋째는, 자녀들을 위한 가정 교육에 대한 말씀.

특히, 팬데믹을 거치면서

사람 사이가 멀어지고

자연스럽게 가족과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쓸데없는 만남,

사회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못했던 태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눈이 생겼달까.

운신의 폭이 좁아졌지만

그래서 답답하지만,

더욱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느낌이 든다.

덕분에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삶의 퍼즐을 이리저리 맞추고 있다.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우선 배치하고,

주변의 것들을 소중한 것 주위에

그 모양을 맞춰 끼우는 것이다.

그러자면 우선순위가 낮지만

필요한 일들은 약간의 변형이 필요해진다.

조율과 버림.

팬데믹 기간 동안(!)

그런 고민을 하는 시간을 보낸 것이

내게는 가장 큰 수확이라 여기고 있다.

앞으로의 삶을 꾸려가는 초석을

다지는 기회였다.

내년에는 성대한 성탄 미사에

참례할 수 있을까.

힘든 시간이 지나가기를.

 

***

28) 저희는 이제 어두운 순간, 암흑 같은 터널을 직면하고 걸어가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저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우리는 지쳤고, 낙담했습니다. 상처받았고 희망조차 잃었습니다. 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당신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라고 초대하십니다. 그 십자가는 현세의 모든 역경을 받아들일 용기를 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자신 안에 갇히지 말고 보다 유연해지라고 권하십니다. 우선순위를 새롭게 하고, 어떤 가치를 중요시할 것인지 다시 생각하며, 모든 것이 붕괴된 듯 보이는 이 시대에 굳건함을 주는 연대와 희망을 일깨우고 그것이 작용할 수 있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굳은 신앙과 사랑의 열정으로 이 어려운 순간을 살아낼 수 있도록 힘을 냅시다. 그러면서 다른 이를 선의로 바라보고, 고통받는 이를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의 시선을 단련합시다. 왜냐하면 분명 우리 곁에는 '다리 저는 이들', 곧 지쳐 쓰러진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인류의 한 존재로서, 몸을 굽혀 이 형제자매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모든 이를 비출 반짝이는 새 빛, 그 빛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그들이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도우라고 부르심받았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쓰러져 있는 이를 외면하고 고통으로 누워 신음하는 이를 망각한다면, 그 빛으로 걸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빛은 이기적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지금 중대한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코로나19보다 더 치명적인 바이러스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바이러스는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이기주의라는 바이러스는 확신을 통해 전염됩니다. 내가 이익을 얻으면 내 삶이 더 나아지고,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이러한 확신은 사람을 차별하고, 노인을 필요 없다고 여기며, 가난한 이를 소외시키고, '불편한 사람'을 추방하려는 마음을 만듭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불의와 기회의 불평등, 가장 약한 이들을 보호하지 않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기주의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방법인가요?

연대의 항체(백신)를 만드는 것입니다.

'연대의 항체'란 무슨 뜻인가요?

우리를 정면으로 강타한 팬데믹은 우리에게 '공동 취약성'이라는 개념을 알려 주었습니다. 곧 온 인류는 하나로 묶여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도록 했습니다. 이를 인지해야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구의 몇몇 지역에는 이미 빈곤을 겪고 착취를 당해 내일이 불확실한 삶을 오래전부터 매일 체험하며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과학 기술의 힘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확신이 허구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이제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우리가 하는 행동의 결과가 이웃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더욱 명백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연대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연대할 수 있다면 이 불안한 시대를 극복하고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형제애는 필수적인 것입니다. 혼자서는 결국 모두가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돕는다면 모든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55) 우리는 우리를 현혹하는 거짓된 것들과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에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또한 소유욕에서도 자유로워져 가치 있는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가치가 없다고 드러난 것과 진정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면서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환영받는 장소, 새로운 형태의 환대, 형제애, 연대가 가능한 공간을 만들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먼저 희망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92) 본당에서 우리는 더 약한 형제를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큰아들'과 같은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된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열정은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세상의 소금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기쁨도 줍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향하는 오솔길은 열정적 믿음을 통해서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성찰하는 즐거움을 맛보고,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삼천년기의 현실에 시선을 둔다면, 우리는 세상 안에 머물면서 세상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와 손주들이 건너갈 종교의 다리, 영적 다리, 인류의 다리를 건설하고 다가올 인류를 위한 기쁨의 길을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힘을 내서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사실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 백성은 종탑 아래로 피신하지 않으며, 이웃을 도우러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궁핍한 이에게 베푸는 물질적 자서뿐 아니라 믿음의 자선을 통해서 말입니다.

열정적이지 않은 믿음, 핑계 대는 마음, 번민하는 믿음을 가진 이들, 혹은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과 깊이 연결된 신앙인들이 품고 있는 희망과 열린 마음을 통해 베푸는 사랑(자선)은 이러한 이들에게 유익한 섭리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섭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강압적 시선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이의 샘, 모든 이의 의미, 모든 이의 마지막 목적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저는 하느님께서 어떻게든, 아주 작은 그의 선한 의지를 통해서라도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해 힘쓰신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위로가 되고 용기가 납니까! 이것이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108) 자연환경이 파괴되고 있으며, 매일 너무나도 많은 음식이 버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식량 시스템을 우려합니다. 이는 지속 불가능한 시스템입니다.

저는 이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기술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속 가능하고 다양한 농업의 증진, 소규모 농업인과 천연 자원을 보호하는 시장 시스템을 위한 투자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기후를 오염시키고 자연을 해치는 거대한 농업 프로젝트는 빠르게 확산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전히 많은 지역에 물이 부족합니다. 개인위생을 위한 생활용수나 농업용수는 물론이고 마실 물도 부족합니다. 물 부족을 겪는 이들과 그것을 관리하는 소수의 권력자들 사이에는 또 다른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110) 오늘날 이미 이러한 생각과 활동을 표현하려는 다양한 대중적 움직임이 '아래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몇몇 기관과 단체에서도 그렇고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구체적인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지구를 더 이상 우리가 착취할 것을 보관하는 창고가 아니가, 지속 가능한 개발을 통해 사랑하고 존중해야 할 신성한 앞마당으로 생각하려는 움직임입니다.

책임감 있는 소비가 중요합니다. 천연 재료를 이용하고 재생할 수 있는 에너지에 기반한 생산 체계가 구축되어야 합니다. 한편, 특히 환경 운동 분야에 있어 젊은이들이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젊은이들을 후원하고, 만약 필요하다면 그들이 올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생태,환경적 감각을 갖출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의 유익을 위한 선택을 하도록 말입니다. 환경을 위한 개인적 생활 양식과 공동체적 활동을 제안하고 이러한 활동이 사회,정치적 영역에서 놀이 문화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명은 성경과 가톨릭 교리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의무를 온 세계에 전해야 합니다.

이는 매일 하는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즉각적으로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이지만, 때로는 눈에 띄지 않는 노력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피조물을 훼손하지 않고, 파괴하지 않고, 피해를 입히지 않는 문화를 형성하고 널리 퍼뜨려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된 개인적,정치적 선택과 진보된 과학 기술을 이용해 '녹색 경제'를 지향하는 경제적 전환을 바탕으로 지구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우리 공동의 집은 우리를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릴 것입니다.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과 환경에 대한 관심, 개인과 집단에 대한 관심, 그리고 사적인 영역과 공적이 영역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적이고 생태적인 전환이 필요합니다.

사고방식과 시선의 변화, 무엇보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나 자신, 타인, 사회, 피조물, 그리고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는 영적 전환이 필요합니다.

'웰빙'을 추구합시다. 편안하고 즐거운 생활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구와 조화를 이루며 '잘 살아'갑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만드신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 다시 놀라움과 감탄을 자아내려는 의지를 되찾읍시다.

161) 최신 기술은 이 모든 현상을 야기하는, 반복되는 금융 위기를 해결하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최신 기술은 약한 이들, 노인, 병자, 가난한 이들을 '쓰고 버리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효율성의 문화를 거부할 가능성을 지닌 수단입니다.

경제적 불평등 사회, 디지털 불평등 사회, 교육 불평등이 너무 높아 성장하지 못하는 사회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합니다. 기술의 자리가 점점 확대될수록 기계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세상이 나아갈 방향을 건전하게 제시할 수 있으며, 꿈꾸고 희망할 수 있습니다.

170) 가정이 이렇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가정 안에서 생명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의 첫 관습을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가정에서 물건의 올바른 사용, 질서, 청결, 우정, 지역 생태계 존중, 피조물 보호 같은 것들을 배웁니다.

가정은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법을 배우고, 있는 그대로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장소입니다. 건전하고 넓은 마음을 키우고, 거만하지 않게 양해를 구하는 법을 배우는 장소입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고, 공격성과 이기주의를 자제하는 법을 배우며, 폐를 끼치는 행동을 했을 때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는 법을 배우는 장소입니다.

이런 작은 일상의 진실한 표현을 배우는 평온한 가정생활은 생명 나눔의 문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존중하는 문화를 건설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찬미받으소서>, 213항 참조).

174) 많은 것이 폐쇄된 이 시기에 가족의 화목함은 섭리를 체험하는 기회가 됩니다. 부엌에서 요리한 음식으로 길러진 화목함은 모든 폐쇄된 것을 극복하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정신적,인간적으로 열린 마음을 갖도록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화목함으로 우리는 환대의 다리, 만남의 다리, 사랑의 다리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가족과 함께하는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은 특히 인간을 포용하는 학교를 만드는 시간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176) 자녀들은 부모님과 노는 시간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있는 법을 배우고, 규범의 중요성과 타인을 존중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로써 자녀들은 외부 현실, 곧 세상과 만나는 순간에 자신에게 도움이 될 자신감을 얻습니다.

또한 자녀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부모에게 도움이 됩니다. 부모가 살아가는 인생의 단계에 엄청난 가치를 준다는 점과 부모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그러합니다.

자녀들에게는 엄마와 아빠가 모든 것입니다. 일, 여행, 성공, 걱정과 같은 나머지 것들은 그 뒤에 따라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우리가 매일 빠질 수 있는 자아도취의 유혹과 자존감이 낮아질 위험에서 보호하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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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 작은 꽃, 작은 붓, 작은 길의 영성 가톨릭 클래식
성녀 소화 데레사 지음, 안응렬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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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가톨릭출판사의 가톨릭 클래식 시리즈

- 준주성범, 신심 생활 입문, 단테의 신곡,

이름 없는 순례자 - 로 새롭게 개정하여 펴낸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은,

제1부 예수의 아녜스 원장 수녀에게 보낸 글

제2부 성심의 마리아 수녀에게 보낸 편지

제3부 곤자가의 마리아 원장 수녀에게 보낸 글

을 엮은 책이다.

나의 수호성인이기도 해서

청소년 시절에 소화 데레사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는 소화 데레사 성녀의 희생적인 태도가

가장 크게 다가왔었다.

수도회에서 자신이 하지 않은 잘못도

기꺼이 침묵함으로써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었다.

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기처럼 순수하다고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 다시 읽은 자서전에서

소화 데레사 성녀의 새로운 모습들을

곳곳에서 발견했다.

어릴적 가족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 덕분인지 사랑을 표현하고 받는 과정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또한, 무조건적인 희생을 바라기 보다는

불의하다고 느낄 땐 그것을 상대방에게

표현했다는 것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다시 자서전을 읽음으로써

성녀의 보다 당당하고 주도적인 면을

발견하게 되다니 행운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의 수호성인으로부터

긍정적인 힘을 듬뿍 전달받은 느낌!

가톨릭 클래식은

현대인의 감성에 맞는 문체로 개정했는데

글이 독자의 마음에 닿는 거리를

좁혀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수호 성인 소화데레사 성녀의 자서전을

앞으로는 곁에 두고 재독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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