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 - 그리스도인의 묵상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지음, 서명옥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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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타사르는 1905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태어났고, 1929년에 예수회에 입회, 1936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아드리엔 폰 슈파이어를 만나 영적으로 교류하다 1945년에 함께 재속 수도회를 설립했다. 1988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그를 추기경에 서임했지만 수여식 이틀 전에 선종했다.

<발타사르와 함께 말씀 안에 머물기>는 묵상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책에서 밝히듯 묵상에 이르기 위한 준비법을 소개하지 않는다. 발타사르는 침묵을 근간으로 하는 수동적이라서 적극적인 묵상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묵상법이라 역설한다. 특히 '성모 마리아는 모든 묵상과 관상의 원형'이라고 밝히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묵상 안에서 따라야 할 본보기가 바로 성모 마리아라고 한다. 얼마 전부터 비로소 알게 된 묵주기도의 은총과 성모님의 순명에 대해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데 책에서 성모님의 삶(태도)처럼 묵상하라는 대목을 만나 새롭게 또는 다시금 성모님에 대해 묵상해 보고 싶어졌다. 덕분에 망설였던 <완독 챌린지>에 참여하기로 다짐하게 되었다. 마침 10월에 함께 읽는 책이 <철학자, 믿음의 여인을 묵상하다>로 성모님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묵상 중 일어나는 세상에 관한 생각들을 떨쳐내려고 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함을 알린다. 세상사에 대한 사회나 나의 판단을 멀리하고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써 묵상 중에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그 계획을 알아차리는 것이 또한 묵상 중 침묵이 필요한 이유다. 아마도 내가 침묵하여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자하는 갈망이 클 때, 그때가 그분이 말씀으로 활동하기 가장 좋은 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눈을 감고 고요하게 머무를 때 한동안 풀리지 않았던 고민과 무거운 마음이 한 말씀으로 스르륵 풀렸나 보다.

"곧 자신의 모든 지상적인 것을 아버지로부터의 사명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그분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기도 안에서 그분과 관계를 유지하는, 신인의 내적 자세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마치 커튼이 올라가듯이, 이 단계 어디에서나 우리는 그 중심을 볼 수 있다. 그때 이것이 필수이다. 멈추는 것! 커튼이 올라간 것은 은총이며, 그 본 것을 파악하고 그것이 자신을 꿰뚫게 하라는 초대이다. 이는 그것으로 성취되길 바라는 갈망(결코 향유하고 소유하려는 의지가 아닌)이 열리는 가운데 일어난다. 우리에게 이것이 허락된 것, 우리가 진열창을 통해 과일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맛보고", "시식"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쁨, 심지어 압도적인 기쁨일 수 있다.(87쪽)"

묵상하며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 궁금한 이들, 무엇을 청해야하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도움이 될 책이다.

***

29) 그리스도교적으로 요구되는 침묵은 근본적으로 인간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오히려 믿는 이(신자)는 자시닝 들어가야 할,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되는, 조요하고 숨겨진 "골방"(마태 6,6)을 언제나 이미 자신 안에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 안에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아마도 철부지 "작은 이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는"(마티 18,10),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를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43) 그리스도인으로서 묵상하는 이는 오직 그에게 선사된 신적인 영을 통해서만 하느님 말씀의 광대함을 깨달을 수 있다. 그에게 전달되는 하느님의 영을 통하지 않고,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내면이 무엇이닞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1코린 2,10 참조)?

이것은 묵상하는 이가 묵상하고자 하는 장면으로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자주 반복된 묵상 지침을 고려할 때 즉시 명확해진다.

66) 묵상하는 이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게 도덕적 적용을 하기 위해 일찌감치 예수님에게서 떠나야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더 잘 보고,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자기 상황의 변화 또한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변화는 결국 나 자신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나,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내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다. 곧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시는 분의 시선에서]......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 4,12-13 참조)

79)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러저러한 "기도의 단계"에 올라섰다고 "어떤 교만이나 허영심에서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두드릴 수 있고 또 두드려야 하지만, 우리가 두드린다고 해서 반드시 열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두드림에는 그러한 마법적인 힘이 들어 있지 않다. 이러한 말씀의 외견상의 침묵은 세 가지 관점 모두에서 집중적인 가르침이다.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다."는 점, 그리고 [감각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1베드 1,8) 속에서도 그 "변용"은 주님께 달린 것이라는 점, 그런 다음에는 이제 우리가 그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다.

87) 곧 자신의 모든 지상적인 것을 아버지로부터의 사명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그분의 뜻을 파악하기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기도 안에서 그분과 관계를 유지하는, 신인의 내적 자세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마치 커튼이 올라가듯이, 이 단계 어디에서나 우리는 그 중심을 볼 수 있다. 그때 이것이 필수이다. 멈추는 것! 커튼이 올라간 것은 은총이며, 그 본 것을 파악하고 그것이 자신을 꿰뚫게 하라는 초대이다. 이는 그것으로 성취되길 바라는 갈망(결코 향유하고 소유하려는 의지가 아닌)이 열리는 가운데 일어난다. 우리에게 이것이 허락된 것, 우리가 진열창을 통해 과일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맛보고", "시식"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쁨, 심지어 압도적인 기쁨일 수 있다.

134) 묵상에 세상을 포함시키는 것은 결코 산만함의 성격이 아니며, 본질적인 것에 대한 집중에 속하는 일이다. 바로 그분의 계시 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집중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집중은 우리가 묵상 가운데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고 노력할 때만 일어난다. 세상이 그 자신을 보는 방식도, 우리가 세상을 보는 데 익숙한 방식도 결코 묵상에 알맞지 않다(그것이야말로 정말 산만함일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세상을 보는 방식이 알맞은 방식이다. 곧 세상이 하느님에게서 달아나려고 하는, 하느님으로부터의 멀어짐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행위로 세상을 되찾아 오시는, 그분의 칠밀함[하느님과의 가까움] 안에서, 바로 그분 아들의 파견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묵상에 알맞다. 삼위일체이시며 당신 사랑의 삶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그분 안에서""우리는 살고 움직이며 존재"(사도 17,28)한다. 내가 모든 이["내 형제들 가운데 가장 작은 이": 마태 25,40 참조)에 대한 그분의 헌신을 고려하지 않고는 결코 하느님의 헌신을 묵상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 묵상과 나의 일상적인 세상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전제 조건이다.

161) "따라서 그리스도교 묵상은 온전히 삼위일체적이며 동시에 전적으로 인간적이다. 아무도 하느님을 찾기 위해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성에 등을 돌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을 찾기 위해 모든 이는 성령 안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서 보시는 것처럼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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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추얼, 하루의 리듬
안셀름 그륀 지음, 황미하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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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특별한 하루를 위한 리추얼 모음집으로,

나만의 고유한 속도, 고유한 평온에 이르는 방식을 찾아가도록 마중물이 되어주는 책이다.

책에 소개된 리추얼 중, '이것이 바로 나다'하고 나 자신에게 말해주는 것, 스스로에게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 생의 끝을 떠올리며 공간과 물건과 작별하면서 사는 것에서 위로와 안정감을 느꼈다. 저자의 리추얼은 나로 향하지만 결국 하느님과 연결된 나를 발견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된다.

책을 읽으며 떠올려 본 내가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하느님과 영적으로 만나기 위해 마련했던 리추얼에는 성경쓰기와 묵주기도, 영적도서 읽기, 그리고 아침에 하루를 봉헌하며 올리는 화살기도가 있다. 그 외에 안셀름그륀 신부님처럼 스스로에게 하는 말, 관계 안에서 나를 지키는 방법들도 나의 리추얼로 만들어 보고 싶다.

만약 아직 리추얼이 하나도 없다면 리추얼 백과사전인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리추얼, 하루의 리듬>에서 마음에 드는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보는 것도 좋겠다.

***

56) 요즘에는 정해진 일정표에 매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역시 시간의 신비를 꺠닫기를 원하며, 계절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알아 가려고 합니다. 자신 안에서 삶의 충만함을 펼치기 위해서입니다.

95) 복잡한 생각은 잠시 내려놓고, 들이쉬고 내쉬는 숨에 집중하세요. 숨을 내쉬면서 지금 당신을 사로잡는 것들을 내려놓으세요. 그저 당신이 숨을 쉰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당신은 이렇게 내면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나다."

이 말을 하면서 당신은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적으로 바로 선 당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남들의 기대를 충족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나는 단순하고 주도적으로 산다.'

그리고 자주 이렇게 말해 보세요.

"이것이 바로 나다."

아침에 알람 시계가 울릴 때마다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세요. 그러면 오늘 당신을 기다리는 일들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당신은 내적으로 자유롭게 서게 될 것입니다. 직장에서 상사와 대화하거나 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이렇게 말해 보세요. 그 순간, 당신은 자유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자유를 그 모임 내내 유지할 수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당신은 그 모임을 다르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도 달라질 겁니다. 언젠가는 이 내적 자유가 당신의 살이 되고 피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연습하는 것, 당신 자신에게 "이것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21)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감추고 싶은 마음, 환상, 감정, 열정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런 것들을 시인하지 않고 억누른다면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융은 모든 사람 안에 어두운 면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좋은 면만 내보이고 어두운 면은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나 감춰진 이 어두운 면들은 내 마음속 그림자 영역에서 자리를 넓히려 하고 종종 불쾌한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억눌린 공격성은 우리의 표정에서도 드러납니다. 그리고 억눌린 욕구는 남에게 불편함을 주거나 선을 넘는 행동으로 표출되기도 합니다.

그림자와 같은 어두운 면은 우리가 화해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우리는 '자기 비난', '죄책감', '자기 비하'를 일삼았던 자신과 화해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망상적인 자아상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 헛된 자아상과 결별해야 합니다. 감추고 싶었던 자기 자신과 화해하면서 스스로 "괜찮다."라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167) 다른 사람들의 어떤 모습에 화가 난다면, 그 모습들을 당신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삼아 보세요.

'나는 왜 그 사람의 태도에 화가 나는 걸까? 혹시 나에게도 그런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에게서 당신을 비추는 거울을 발견한다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마세요. 그 거울을 통해 비치는 당신의 본모습과 그동안 억눌러왔던 행동 방식, 깊은 내면의 욕구들을 하느님께 솔질하게 내보이세요. 그리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바로 그 연약하고 감추고 싶었던 부분들 안으로 온전히 흘러갈 수 있도록 마음을 활짝 열어 보세요. 하느님의 사랑이 당신의 모든 면을 감싸안을 때, 진정한 치유과 통합이 시작됩니다.

만약 누군가의 태도가 당신 인내심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여 화가 난다면, 외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당신의 내면에 굳건히 머물기 위해 애쓰세요. 물리적으로 그 사람 곁에 있어야 하더라도,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과 건강한 거리를 두세요. 이러한 내적인 분리를 통해 당신은 그의 태도에 흥분하거나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는 당신의 평화를 지키는 동시에, 타인의 행동에 대한 당신의 반응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지혜입니다.

258) 방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고 이렇게 생각하세요.

'나는 언젠가 모든 것과 작별할 것이다. 죽음의 순간에 나는 이 방에 있는 것들을 가져갈 수 없다. 내가 떠나면 다른 사람들이 이 방에서 살 것이다. 이 방에서 나는 무엇을 하며 안정감을 느꼈던가? 나는 이 공간에서 무엇을 체험했는가? 무엇이 내 마음에 각인되었는가? 나는 여기서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인가?'

당신이 모든 것을 견뎌 내는 모습을 그려 보세요. 당신은 참된 자아와 함께 하느님께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당신의 진짜 모습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래 생각하셨던 대로 말이지요. 그러나 그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것, 완전히 자유로운 것도 당신의 참된 모습입니다. 당신은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당신을 내적으로 구속하고 편협하게 하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느님께 이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가운데 내적 자유에 대한 무언가를, 그리고 자신에 대한 무언가를 지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작별하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여기'가 당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주의 깊게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지금, 여기'는 언젠가 사라지고 영원한 순간에 이른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순간에 이르게 되면 '소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존재'만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 안에서 존재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이제 당신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람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음을 압니다. 나는 내가 체험하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지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순간을 다시 내려놓습니다. 나는 내가 인지하는 것에 감사하지만, 그것을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다. 나는 언제든 내가 체험하는 것들과 작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339) 독자 여러분도 알맹이 없는 낡은 의식들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을 찾아나서길 권합니다. 나아가 여러분의 삶에 깊은 신뢰와 순수한 기쁨, 진정한 자유, 그리고 따뜻한 사랑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의식들을 발견하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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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레오 14세 - 최초 공식 전기
도메니코 아가소 지음, 이재협 외 3인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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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미사에서 레오 14세 교황님의 "나는 아무런 공로없이 선출되었다."는 말씀을 듣고 그후로 여러 날 동안 그 말씀이 문득 떠오르곤 했다. 레오 14세 교황님이 종들의 종인 교황직을 수락하고 앞으로 행할 일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말씀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1955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1977년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서 수도 생활을 시작하고, 1982년 로마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2014년 주교품을 받았고 2023년 추기경으로 서임된 후 2025년 주교급 추기경으로 승격되었으며, 2025년 제267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20년간 페루에서 선교생활을 했다.

교황명을 레오로 선택한 이유는, 레오 13세 교황님이 사회 문제를 다루셨기 때문이고, 오늘날의 교회도 인간 존엄성과 정의, 노동의 가치를 지키는 데 새로운 도전이 되는 또 다른 산업 혁명과 인공 지능 발전에 대응하기 위해 사회 교리를 교회의 유산으로 내놓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셨다. 레오 14세 교황님의 행보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앞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서전 <희망>을 읽고 뒤늦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삶과 신앙 여정에서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레오 14세 교황님의 최초 공식 전기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웠다. 교황님에 대한 이해가 교황님을 따라 걷는 내 발자국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전기이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레오 14세 교황님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레오 14세 교황님의 전기를 읽을 때에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서전을 읽을 때에도 똑같이 느낀 감정은 존경심이었다. 오랜 세월 한 마음으로 충실히 살아온 그들의 발자취에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면서 부지런히 살고 있지 않은 나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워졌다. 두 교황님의삶은 내 신앙의 여정은 어떠했고, 앞으로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 살피는 마중물이 되어 주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아 작성한 후기입니다.]

***

69) 그리스도가 남도록 나 자신은 사라지는 것. 그분이 알려지고 영광을 받으시도록 나 자신은 작아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 교황이 온몸으로 체득한 선교 사명의 정수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 숱한 영웅이나 슈퍼맨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진리를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201) 평화를 이루려면 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제 교황명을 선택할 때 무엇보다 레오 13세 교황님을 떠올렸습니다. 최초의 위대한 사회 회칙 <새로운 사태>의 교황님이시죠. 우리가 살아가는 격변의 시대에, 교황청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노동 현실과 사회를 점점 더 분열시키고 갈등으로 몰아가는 온갖 불균형과 불의를 보고도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풍요와 궁핍이 대륙과 대륙,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심지어 개별 사회 내부에서도 깊은 격차를 만드는 전 지구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정부를 책임지는 이들의 사명은 조화롭고 평화로운 시민 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가정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남녀 간의 안정된 결합에 바탕을 둔 가정은 "작지만 진정한 사회이며, 모든 시민 사회보다 우선하는" 삶의 터전이기 떄문입니다. 더 나아가, 태아부터 노인까지, 환자부터 실업자까지, 시민이든 이주민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 특히 가장 연약하고 무력한 이들의 존업성이 지켜지는 터전을 마련하는 일에서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210) 저는 아무런 공로도 없이 뽑혔습니다. 저는 지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앞에 한 형제로 나아와, 하느님 사랑의 길을 여러분과 함께 걸어가며 여러분의 믿음과 기쁨을 위하여 봉사하는 종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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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들
앙리 드 뤼박 지음, 곽진상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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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앙리 드 뤼박은 1927년 예수회에서 사제품을 받은 후, 1929년부터 리옹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 교수로 재직했다. 1964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 위원으로 임명되며 정통성을 인정받았고, 공의회 내내 신학을 쇄신하는 데 기여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3년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하며, 그를 당대의 가장 뛰어난 신학자 중 한 사람이라고 공표했다.


역설은 서로 대립하는 의견이나 주장을 의미한다. 처음 책 제목을 봤을 때 무엇에 대한 역설인지, 왜 역설이라고 일컫는지 궁금했다. 저자 앙리 드 뤼박 추기경은 신학의 역설을 역설 그대로 아니 신앙을 통해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합리주의자들이 상징을 하나의 개념처럼 풀이하여 이해하는 것은 상징 속 내포된 진리를 파괴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제자들이 가져온 오병이어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하자 모인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어놓아 오천 명이 먹고도 몇 광주리가 남은 것으로 해석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에는 '아, 그렇게도 이해할 수 있겠구나' 머리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기적의 신비가 사라져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그리고 <역설들>에서 합리주의자들이 성경 속 상징을 잘못 이해하는 오류로 인해 거룩함의 의미를 경감시키고 사라지게 한다는 대목을 읽으면서야 그 개운하지 않은 마음의 실체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저자가 전하는 역설들을 모두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바보처럼 믿는 신앙이 어쩌면 가장 신앙적인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11) 신학은 역설을 신앙의 근본적 특성으로 인식하고 수용한다.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역설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역설은 그리스도 신앙 이해의 열쇠다. 드 뤼박은 신학의 일반적 정의로 알려진 '신앙의 이해'를 넘어 '신앙을 통한 이해'를 더 강조한다. 신앙을 통한 이해를 더 강조한 것은 신앙 진리가 내포한 역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그 역설적 진리의 깊이를 탐구하여 그 안에 담긴 심오한 의미를 파헤치기 때문이다.


15) 그렇다면 그리스도 신앙의 근본적 역설성은 우리 신앙인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이는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생활과 신학의 정통성을 식별하는 기준을 제공한다. 그리하여 드 뤼박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오해하거나 잘못 대하는 여러 사조에 강력히 저항하는 것이다. 특히 합리주의적 실증주의 아래서 그리스도교 상징을 비현실적인 것, 실재하지 않는 것, 환상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오류에 강력히 맞선다. 개인이나 세상의 종말에 관한 실재 역시 감추어진 신비이며, 이 신비들이 상징적인 표상들로 표현되기 때문에 상징을 통해서만 그 참된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합리주의자들은 이러한 상징을 하나의 개념처럼 이해하면서 상징 속에 내포된 진리를 파괴한다.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축소한다. 그러나 신앙인은 개념 속에 가둘 수 없는 '거룩한 신비들', 예컨대 하느님의 거룩함, 교회의 거룩함에 대한 상징적 표현을 중시하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포착하려고 노력한다. 성사는 비현실적이라는 의미에서 상징이 아니라 상징이 지시하는 그 실재를 실제로 보여 주는 한에서 성사이기 때문이다('거룩함의 의미가 경감되고 사라지는 내적 이유들'을 보라).


121) 지금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당황스러운 역설은 이것이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마태 5,37)

오늘날 바오로 사도는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썼던 것처럼, "내가 여러분에게 진리를 말한다고 해서 여러분의 원수가 되었다는 말입니까"(갈라 4,16)라고 말하며 놀라지 않을 것이다.


247) 나는 여기저기서 신약 성경 저자들 사이의 신학이 서로 불일치한다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신학이 서로 일치하는 것에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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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의 비오 신부
존 A. 슈그 엮음, 송열섭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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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은 못 박히신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의미한다.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의 비오 신부님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오상을 지니고 50년간 수도생활을 하셨다.

그는 병자를 낫게 하고 여러 기적을 보여주었으며,

200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이 책은 수도회 형제들, 마을 이웃들 그리고 비오 신부님을 만났던 신자들의 증언이며,

그 증언은 신부님이 몸소 보여주신 신앙과 고통받는 이들을 도운 기적으로 채워져 있다.

어쩌면 우리가 쉽게 인정할 수 있는 기적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오상과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나는 기적처럼 보이는 기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고 본받아야 할 모습은

오상 때문에 겪는 고통, 악마에게 공격받는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에게 기적을 바라는 이들을 뿌리치지 않고 마음을 다해 그들을 돌보신 신부님의 삶 자체일 것이다.

기도생활을 더욱 열심히 하고 싶은 이들,

사순과 부활 시기를 영적 도서와 함께 준비하고 싶은 이들에게 권한다.

***

57) "우리가 하느님을 향할수록 영혼의 가치가 높아집니다. 우리의 내면을 하느님이 원하는 것들로 채우면서 우리의 영혼을 가꾸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그분 생각입니다. 그분의 사명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통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인류 구원이라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비오 신부님도 기꺼이 고난의 길을 선택하셨지요.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 안에서 비오 신부님이 신학자이며 철학자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은 58년간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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