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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지키다
오사 게렌발 지음, 이유진 옮김 / 우리나비 / 2018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사 게렌발의 ‘시간을 지키다’의 첫 인상은 구질구질이었다. 책의 색감도 어둡고 표지의 주인공은 우중충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내가 책을 선택했다면 절대 읽고 싶지 않은 책이었다.
2017년 스웨덴 만화협회 유르훈덴상 수상작이란 반짝이는 스티커도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달 독서 모임 선정 작품이었기에 마뜩잖은 마음을 뒤로한 채 읽었다.
책을 펼치기도 전에 예상했듯이 이 책의 내용은 우울하고 암울했으며 슬펐다.
나는 시간이 가는 게 정말 좋다. 아팠던 일들에서 날마다 조금씩 멀어지니까.
나는 시간이 가는 게 정말 좋다. 날마다 한 걸음씩 죽음에 다가가니까 (p8).
시간이 흘러간다는 건 주인공에게 있어 아팠던 과거와 멀어지는 동시에 세상의 끝을 의미한다. 좋다는 걸까 두렵다는 걸까. 한 편으로는 좋고 한 편으로는 싫다는 이중적인 감정이 시간의 흐름을 통해 단적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다.
죽는 건 두렵지 않지만, 자신이 떠난 후 남은 사람들의 슬픔부터 걱정하는, 살아가는 이유가 ‘자신’이 아니라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가.
엄마한테 가장 큰 관심사는 너희거든! 너희만큼 관심이 가는 건 없어! (p17)
주인공에게는 아이들이 세상의 전부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세상의 전부일 수가 없다. 비록 주인공의 관심사가 오랜 시간 자신의 부모님이었을지라도, 이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다. 자식이 부모님을 받아들이고, 부모님 생각이 어떤지 이해하고, 부모님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생각해보기, 도대체 내 부모는 그런 사람들이었는지(p19)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는 건 보통은 자식들의 일이 아니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하지만 주인공의 삶은 부모의 무관심으로 일관되었다.
이제 마무리해야 한다는 걸 안다. 계속 나아갔어야 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기한이 이미 오래 전에 지났다는 것도.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로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다 (p21).
현실의 시간에서는 철두철미하지만, 주인공의 감정의 시간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이제 그만 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젠 지난 일이니까 그만 놓아줘야 한다는 것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 내 맘대로 되는가. 떨쳐내고 싶지만, 끝끝내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우리가 괴로운 건 이 문제가 언제까지나 내 마음의 짐이 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놓지 못하는 내 자신이다. 주인공에게 부모란, 그런 존재다.
스톡홀롬에 십 년 넘게 살고 있는데도 단 한 번도 주인공을 찾지 않은 그녀의 아빠는 친구들과의 여행을 위해 스톡홀롬을 찾는다. 뮤지컬과 축구, 경마장에 갈 겨를이 있어도 주인공을 보러 갈 여유는 없다. 자신을 만나는 것을 꺼리는 아빠의 반응에도 주인공은 나같이 힘든 딸이 생긴 불운이 아빠 잘못은 아니었다(p29)며 자신을 위로한다. 하지만 그녀의 일기는 솔직했다. 그날 그녀의 일기에는 자살하고 싶다고 쓰여 있다(p38).
아이슬란드에서 열리는 만화전시회에서 만난 그녀의 남편 비엔과의 인연은 오묘하게 들어맞았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환영하고 부족함을 채워주는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주인공은 늘 자신이 자리를 너무 많이 차지하는 방해물이라는 느낌이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리고 늘 허전하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산 그들의 인연은 스무 살이 아닌 서른 살이었기에 사랑이 시작될 수 있었다. 사랑에는 타이밍이 있다는 것. 그 사랑을 쟁취했다는 점에서 주인공은 썩 나쁜 인생을 살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놓지 못했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거슬리는 그것을.
주인공의 아빠는 다른 집 아이들을 좋아했다. 그래서 자신이 손주를 안겨준다면 아빠에게 인정받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좋은 할아버지가 되지 않았다.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서랍 속에서 그동안 현상해서 보냈던 사진들이 모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는 자신의 집과 작별인사를 고했다(p84).
아빠는 단체 여행으로 태국에 갈 수 있고, 골프 여행으로 스페인에도 갈 수 있고, 축구 여행으로 잉글랜드에도 갈 수 있어. 비행기로 전 세계를, 원한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구. 하지만 우리를 보러 오려고 카트리네홀름에서 빨간 신호등을 둘씩이나 지나는 일은 무척이나 버거운 일이지 (p88).
주인공은 자신의 집과 작별을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와 손주들을 가족으로 엮는 일은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을 테다. 하지만 시도했고, 또 시도했고, 또 시도했다.
어떻게든 그녀의 아빠를 12월24일에 자신의 집에 오시게 하려는 주인공의 피나는 노력은 눈물겨울 지경이었다. 고작 눈이 많이 와서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아빠의 변명에 38년 동안 억눌렀던 분노가 폭발했다. 그리고 24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녀의 아빠는 왔다.
아빠가 수년 동안 어땠는지 아세요? 아빠에게는 늘 저보다 아빠 형제자매들이 더 중요했어요. 제가 아빠 형제자매들이나 그쪽 자식들 중 누구랑 싸우기라도 하면, 아빠는 늘 그쪽 편을 들고 제 편은 안 들어줬잖아요! 아빠는 제 편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요! (p143)
그러니까 너는 이제 나와 연락하고 싶지 않다는 거구나. 그러니까 의절하자는 거지? (p144)
부녀의 관계는 끊임없는 평행선이었다. 절대 만날 수 없는 관계.
한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고, 반년이 지났다. 가을이 오고 다시 크리스마스가 왔다.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한 책임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그녀의 불안감은 끝이 났다. 그리고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p155).
그녀의 이름 오사. 석벽처럼 굳건한 책임감 많은 아이다. 그녀는 늘 혼자였고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용감하고 자유로울 수 있었다 (p184).
이제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가슴이 찡했다. 읽는 내내 주인공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지막 장을 넘길 때 그녀를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분명 그녀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환경이 그녀를 애정 결핍으로 만들었고 그녀는 불행했다.
지금 그녀는 든든한 남편과 토끼 같은 자식들이 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 시간은 여전히 곱씹고 곱씹을 만큼 남 부러울 것 없는 그녀의 삶에 남겨진 큰 상처다. 그리고 이 상처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것이다.
이 책의 이야기를 단순히 ‘가정’에만 한정한다면 어쩌면 답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놓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놓는다 하더라도 후회할 그런 것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 한두 개쯤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