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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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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특유의 일본 감성이 잘 담겨있다. 상실감을 딛고 일어서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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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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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아슬 한 일상 속 펼쳐지는 위태위태한 기묘함

 

중학교 때, 사서 선생님의 추천으로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처음 접했었다. 지금 어렴풋이 기억나는 내용들을 떠올려보면 그때 그 나이의 내가 과연 얼마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을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싶다. 나에게 요시모토 바나나의 이야기는 참 기묘했지만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던 것 같다.

 

요시모토 바바나의 신작 <주주>는 일본 어느 작은 마을 햄버거 가게 이름이다. 정신적 지주였던 엄마를 먼저 떠나보내고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상실감을 극복해내는지를 그린다. 엄마의 죽음은 계기가 되었을 뿐, 주주의 인물들은 다들 어딘가 결핍되었고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그제까지 강아지처럼 들어붙어 한 이불을 덮고 자고, 밤에는 같이 텔레비전을 보며 깔깔 웃었고, 사온 과자를 나눠 먹곤 했는데, 갑자기 이 세상 누구보다 멀어지고 말았다(p30).

 

한때는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될 수 있다. 그저 상황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위로하지만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슬픔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으니 말이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좋은 쪽으로 꾸역꾸역 끼워 맞춰 생각한다면 물론 좋게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자기 최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것이 인생이다. 그저 그뿐이다(p30).

 

아마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이 책을 읽었다면 그저 막장 드라마의 한편이라며 투덜거렸을 거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있냐고. 하지만 우리의 삶의 이야기는 평탄하기 보다는 주주의 주인공 미쓰코처럼, 예측할 수 없는 파도 앞에 무너지고 상대의 마음은 내 마음과 같지 않다. 이게 인생인 것이다. 무난하게 생각해온 인생 계획은 나만의 헛된 꿈으로 물거품이 되고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나 자신 밖에 없게 된다.

 

미쓰코의 아빠는 엄마의 죽음 앞에서 삶의 의미를 잃었다. 미쓰코의 상실은 이전부터 깊숙한 상처로 남았다. 한때는 그녀의 연인이었던 신이치의 무책임함과 사랑과 우정사이를 넘나들었던 아슬아슬한 관계. 그와의 지독한 연결고리를 끊어내고서야 비로소 미쓰코는 진정 해방될 수 있었다.

 

나라면 신이치의 귀환을 환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주를 사랑하는 신이치의 마음을 미쓰코는 받아들였고 남자 신이치와 주주의 신이치를 분리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해졌다.

 

신이치의 상실은 부모님이다. 그의 부모님에게 그의 존재는 무엇이었을까? 어린 아이가 혈육이 아닌 타인의 집에서 자라야만 했던 그 아픔. 그는 성숙함을 배우지 못했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산다. 어떻게 보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기도 하다.

 

 

 

미쓰코의 성장이라 말하지만 바보같이 답답한 면모에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담겨있다. 어떻게든 되지 않는 일들뿐, 그런 것이 인생(p106). 인간은 절망과 슬픔 앞에서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소박한 꿈을 위해, 엄마를 생각하며 주주를 꾸민다. 비록 자신 이후 3대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이 가게가 사라진다 할지라도. 지금 그녀의 삶은 주주를 지켜내는 것이 소명이기 때문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캐릭터는 참 비현실적인 것 같지만 상당히 현실적이다. 삶의 원동력을 주주로 삶은 미쓰코의 또 다른 꿈은 탈출이다. 누군가로부터 당연하게 부여받은 소명은 진정 그녀의 꿈이 아닐 수도 있다. 조용했던 마을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지금은 잠시 유예되었지만 주주는 조만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탐욕스러운 자본이 잠식하면 어쩔 수 없는, 그런 일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녀는 이 상황을 무시하지만 내심 바라고 있다. 더 이상 기름 냄새 앞에서 일하지 않기를.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꿈꾸며 그린 구상에 주주가 빠지기도 한다.

 

시간이 약인가. 아니면 산 사람은 살아야하니까. 상황이 변함에 따라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엄마가 가고 싶었던 가루이자에 기묘한 관계로 엮인 네 사람이 향했고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상실을 털어버린다. 결코 풀리지 않을 실타래는 예기치 않게 자연스럽게 풀리고 우리는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산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며.

 

짧은 책이지만 사실 너무 어려웠다. 짧기 때문에 어떤 부분을 중점으로 읽어야 할지 생각하는 것도 어려웠고 이야기는 말 그대로 기괴했다.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을까?의 해답은 <주주>였다. 주주는 위태로운 관계의 사람들을 엮어주는 아지트 같은 역할을 한다. 주주가 아니라면 뭉칠 수 없는 사람들도 따뜻한 햄버거 스테이크로 웃을 수 있다. 삶은 꽃길보다는 가시밭길이 더 많고 끝없이 무너지지만 견뎌낼 수 없는 상실감을 딛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소박한 일본의 작은 가게를 생각하며 읽는다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진다.

 

요시모토 바나나 특유의 일본스러운 감성을 좋아한다면 믿고 읽어도 되는 소설이다. 기묘함 속에서 찾는 일상의 진정한 가치를 주주보다 더 잘 담을 수 있는 소설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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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술 - 이순신의 벗, 선거이 장수 이야기
정찬주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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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무장의 벗, 선거이와 이순신

 

임진왜란을 대표하는 장수는 이순신이지만 이순신 장군 뒤에는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던 수많은 군사들이 있다. 선거이 장군은 이순신 장군보다는 어리지만 관직에 먼저 나가 함경도에서 이순신과 처음으로 조우한다. 나이와 관직을 떠나 활로써 벗이 된 이 둘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서로 의지하며 우정을 키워나간다. 정찬주 작가의 <칼과 술>은 이순신의 벗, 선거이에 대해 조명하는 소설이다.

 

워낙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명성이 자자하다 보니 초반에는 선거이 장군의 행보만 나오면 그래서 이순신은 언제 만나지? 라는 생각을 했다. 유명한 주인공만 기억하는 세상인 것인가. 침착하고 의리 넘치지는 훌륭한 무관, 그는 이순신이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곁을 지킨다. 인사이동 때에 애매한 상황에 놓인 이순신을 두고 떠나는 마음과 발걸음이 무거워 염려를 놓지 못한다.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선거이. 각자가 제 위치에서 조선의 백성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싸운다.

 

장수는 전투만 해도 모자랄 터인데 적을 앞에 두고 누가 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정치질은 소설 이지만 사실을 기반으로 했을터이니 더 분노를 자아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여러 사정으로 군영에 복귀하지 못한 시절에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을 찾아 백성을 위해 일한다.

 

 

 

장수는 전투만 해도 모자랄 터인데 적을 앞에 두고 누가 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정치질은 소설 이지만 사실을 기반으로 했을터이니 더 분노를 자아낸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여러 사정으로 군영에 복귀하지 못한 시절에도 그는 자신이 할 수 있을 찾아 백성을 위해 일한다.

 

장수의 마지막은 전쟁터, 제 걱정 하지 말고 떠나라는 부인의 말이 진실이 아닐터인데. 전투를 향한 사자후를 외친 그의 열의는 한 줌의 재가 되어 묻혔다. 그의 벗 이순신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따라갔으니 1598, 조선은 충직한 두 장수를 잃었다.

 

선거이 장군의 익살스러움? 아마 자료가 많이 없을 테니 작가의 상상력을 더했겠지만 호탕하지만 지지 않으려는 군인의 절개가 느껴지는 인물이라 더 가슴이 아렸다. 백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 중요한지, 자신의 자존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아는 인물이다. 다만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선거이와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이순신은 잘 상상이 안 간다. 책 초반에는 어? 이런 느낌이 아닌데?? 했는데 읽다 보니 어느정도 적응은 됐다.

 

왜군을 조선 땅에 몰아내는 데에는 이순신 장군의 공이 혁혁했지만 전투는 이순신 혼자 하지 않았다. 훌륭한 부관들과 용감한 군사들, 지지해주는 백성들. 모두가 하나되어 이룬 성과다. 내가 선거이 장군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선동열 감독이 선거이 장군 후손이라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게 전부였는데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을 재조명하니 느낌이 새롭다. 그런데 나부터도 이순신 장군만 쫓아 읽는 습관을 버려야겠다. 임진왜란 앞에서 한 없이 고민한 외로운 무장, 선거이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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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경수사 잘 받는 법
노인수 지음 / 김영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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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면?

 

대부분의 선량한 시민들은 경찰과 인연을 만들 일이 없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기에 수사를 받으라고 연락이 오는 순간 패닉상태에 빠질 것이다. 노인수 변호사의 <당황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검경수사 잘 받는 법>은 그런 사람들에게 사건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며 출석요구서가 날아온 이후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 지 쉽고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세상에 떠도는 형사문제 대책에는 네 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도(), 두 번째 ’ back, 세 번째 돈, 네 번째 부()라는 말이 있다. 일단 사건이 발생했으면 도망을 가서 대책을 강구하고 영향력 있는 지인을 동원해 해결하거나 돈으로 관련 조사관을 매수하고 마지막에는 일단 부인하여 조사관과 협상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p22).

 

일부는 맞고 일부는 아닐 수 있다는 저자는 특히 부()를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수를 할 것인지, 부인 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앞으로의 수사 방향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무조건 부인을 하다가 나중에 자백을 할 경우 가중처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 송사에 휘말린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에 법조계에 종사하는 믿을만한 지인이 있다면 모를까 자기객관화 하지 못한 카터라로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쉽지 않겠지만 우선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를 조언한다. 범행을 부인을 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증거수집이다. 무조건 자신의 상황에서 과몰입하여 억울함을 호소하기 보다는 상대가 어떻게 주장해올지를 예상하여 그에 맞춰 주장을 정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인생이 걸린 일인 이상 전문가의 조언에 인색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비용이 들더라도 변호사와 상담하기를 적극 추천한다.

 

피고소인이 되면, 뭔가 잘못한 죄인이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피고소인이라고 너무 위축될 필요는 없다. 법치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이 이해를 조정하기 위해 법이 정하는 절차를 시작한 것뿐이다(p31).

 

수사를 받기 전에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멘붕인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조사의 시기는 본인이 가장 유리할 때가 좋으며, 때가 맞지 않다면 합법적으로 연장할 수 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조사를 받으러 가야하는지에 대한 조언도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합의를 중요시 여긴다. 내가 아무리 억울하고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송사 3대면 집안의 기둥뿌리까지 사라진다는 옛 말을 강조한다. 끝없는 감성싸움으로 치닫아도 합의를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라고 말한다. 그만큼 송사는 피해자나 피의자(공소장 혹은 약식 명령이 날아오면 피고인)에게 고통이기 때문이다.

 

법률적으로 빠삭하며 변호사를 고용한 사람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상식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정말 꿀팁으로 가득 찬 책이다. 변호사를 고용했더라도 앞으로의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건에 임해야 하는지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을 알고 싶다면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선택과목으로 법과정치를 했던지라 배웠던 내용이 새록새록 떠오르지만 이 조차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법 없이도 살아갈 것 같은 사람도 송사에 휘말릴 수 있다. 그럴 때 당황하지 않고 이 책을 찾기 바란다. 책 말미에는 케이스별로 사건에 휘말릴 수 있는 가상의 이야기가 소개되는데 정말 평범한 사람도 언제든지 출석 요구서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착하게 사는 것만으로 전부가 아닌 세상이다. 법은 최소한의 상식으로 무조건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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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신 - 신은 과연 인간을 창조했는가?
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한음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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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를 향한 외침

 

나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신이 없다고 단언하진 않는다. 신이 있을 수도 있지만 존재한다 할지라도 인간을 갸륵히 여기는 절대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다.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읽고자 하는 사람의 목적은 다양할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은 그의 주장에 반박을 하기 위해, 신을 믿지 않는 자는 동조를 하기 위해, 나처럼 애매한 포지션을 취하는 사람은 무신론자는 어떤 주장을 하는지 궁금해서?

 

과거에 신앙을 가져보려고 나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이성을 중시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무리였다. 내 인생에 신이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결론만 내렸을 뿐이다. 신의 존재는 미지의 영역이기에 확언하지 않지만 무신론자에 가까운 내게 이 책은 사이다를 팡팡 터트려주었다. 내가 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가진 이유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해주었다.

 

<만들어진 신>은 꽤나 거친 언어로 써내려갔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닌지 책 말미에 저자가 따로 언급을 했다. 무신론자, 혹은 나 같은 사람들은 신을 믿진 않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진 않는다. 딱히 그래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종교를 통해 마음의 안식과 평화를 얻는다는데 굳이 헤집어서 타인의 믿음은 잘못된 것이라고 싸울 필요는 없지 않는가? 하지만 도킨스는 이런 무신론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게 한다. 믿는 자들을 향한 방임적인 태도는 결국 그들을 바보취급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집착하는 주된 이유를 종교가 주는 위로 때문이 아니라 교육에 따른 무의식적인 수용, 그리고 대안(믿지 않음)에 대한 인식 부재 때문이라고 말한다(p588).

 

도킨스는 책 서두에 무신론자와 불가지론자는 조직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영향력이 거의 전무하다(p13)며 안타까워한다.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굳이 무신론자들이 조직화되어 무언가를 위해 맞서 싸울 필요가 있을까? 신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면 그만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어느 종교, 종파를 막론하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모여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을 미루어보면 결코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는 분명히 분열을 조장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종교는 정치에 이용당하기 좋은 명분정도로만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이성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 진정 종교 때문에 십자군과 같은 비이성적인 행위에 찬성할 리가 없다 여겼다. 도킨스는 북아일랜드의 분쟁과 인도가 분리될 당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분쟁을 예시로 들었는데 두 집단 간 불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종교가 아닐지라도, 종교가 없었으면 누가 누구를 억압하고 누구에게 복수를 할지 판단할 꼬리표가 없었을 것(p392)이라 말한다. 종교는 단순히 어떤 신을 믿는 사회 활동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집단적으로 미워할 수 있는 꼬리표가 된 것이다.

 

종교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나는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었다. 하지만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걸 도킨스는 꼬집었다. 종교적 집안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집안의 종교에 따라 세례를 받고, 그 종교의 행동지침에 따라 자라난다. 그 아이에게 종교는 어렸을 때부터 당연한 삶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결정한 건 누구인가? 특히 대부분의 종교의 유일신의 교리다. 나는 맞고, 상대는 틀리다는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나누는 안타까운 비극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고 어쩌다 나오는 돌연변이는 정서적 학대를 받는다.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p470) 이라는 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다. 경험한 것이 적은 아이들에게 신앙이라는 사상을 강제로 주입하여 자신들이 무엇을 생각할지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가는 것. 이건 부모의 월권 행위다. 혹자는 종교는 아이의 인성 함양에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의 어느 부분을 보고 아이가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세 위대한 일신교의 창시자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살펴보자면 일단 사기 치는 솜씨가 남다르다. 이집트와 그랄의 왕에게 자신의 부인 사라를 여동생이라 속여 무려 두 번이나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게 한다. 그런데 신의 분노는 아브라함이 아닌 왕들에게 향한다.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의문이다. 도대체 왜? 현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잘못한 것은 엄연히 아브라함이지 않는가? 뿐만 아니라 숭고한 믿음의 절정으로 포장되는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은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세상의 어느 신이 제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고, 또 어느 부모가 그 말에 순종하는가? 현대의 도덕 기준들로 보면, 이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동 학대이자,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에서 발생하는 핍박이자,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때 나오는 것 같은 변명이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다(p365).

 

리처드 도킨스는 분명히 말한다. 그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의 도덕이 어디에서 나오든 간에 성경에서 나오지 않는 다는 것(p371)과 성경이 인상적이고 시적인 작품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당신이 자식들에게 도덕을 함양하라고 줄 만한 책은 아니다(p372)는 것이다,

 

그는 <만들어진 신>을 통해 사람들에게 무신론이라는 선택지가 있음을 알려주고 싶어 한다. 그동안 신을 믿어야만 했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자신의 믿음이 이성적인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종교를 신성시 여기지 않으면 억울하게 마녀사냥을 당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선택할 수 있으며 불안한 마음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존재는 종교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안다. 종교는 너무 많은 특권을 당연시하게 누려왔으며 신성모독이란 빌미로 자신의 입맛에 맞게 사람들을 조종해왔다. 창조와 내세를 생각하는 신성한 존재가 대체 왜 인간의 비행 같은 하찮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p359).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만들어진 신을 읽은 저자라면 쉽게 말할 수 있을 테다. 신을 창조한 건 인간이라는 것을.

 

신은 없으며 종교가 도덕의 뿌리라는 인과관계를 부정하는 그의 명쾌한 설명을 담은 <만들어진 신>, 말 그대로 벽돌책이기 때문에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살면서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할 사회과학서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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