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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토토 ㅣ 창가의 토토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권남희 옮김 / 김영사 / 2019년 6월
평점 :

너는 사실 참 착한 아이야
초등학교 때 필독서로 <창가의 토토>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토토의 학교에서 제일 부러웠던 건 국영수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학교 시간표였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면 20대가 되어 이 책을 다시 읽은 나는 고바야시 선생님과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의 주인공 토토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정말 난감한 학생이다. 고작 초등학교 1학년을 문제아라고 낙인찍어 말하는 것도 뭣하지만 수업 분위기를 흐리는 산만한 학생임은 틀림없다. 생각 만해도 심란한 아이에게 “너는 사실 참 착한 아이야.”라고 빈말로라도 할 수 있을까? 교육자의 자질이 부족한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심리학부생이지만 타인의 TMI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내게 어린 아이가 4시간동안이나 조잘거린다고? 상상 만해도 끔찍하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하지만 고바야시 선생님은 이전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갈 곳 없어진 토토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하라고 기꺼이 시간을 내준다. 고바야시 선생님은 어린 아이도 한 사람의 인격체로서 온전히 존중해주었기에 토토의 이야기에 경청하며 눈높이를 맞춘다. 이 에피소드를 읽고 나니 멘토링을 했을 때 아이들에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짜증냈던 과거의 내가 부끄러워진다. 그전에도 그 후에도 토토의 얘기를 이렇게 제대로 들어준 어른은 없었다(p35)는 저자의 진술은 진정한 어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바다에서 나는 것과 산에서 나는 것’을 도시락 메뉴로 정한 교장선생님의 센스는 그가 얼마나 쉬운 언어로 원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고민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도오에학교 아이들은 국영수를 잘하기 위해서가 아닌 몸도 마음도 건강한 어린이로 자라기 위해 학교를 간다. 학교에 가기 싫어 투정을 부리는 아이도 없다. 모두가 학교에서 즐겁게 뛰어 놀며 산과 들, 그리고 바다에서 세상을 배운다.
고바야시 선생님의 훌륭함은 책을 읽는 내내 감탄하게 된다. 사실 이성이란 걸 중요시 한다는 성인의 입장에서 아이가 사고치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태연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지갑을 찾겠다며 정화조를 퍼내는 토토를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끝나면 전부 원래대로 해놔야 한다니(p78)!. 어른들은 대부분은 토토가 하는 짓을 보았을 때,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하거나, “위험하니까 그만해”라고 하거나, 반대로 “도와줄까?” 했을거(p79) 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어른들은 자기의 상식으로 세상은 재단하고 옳은 것과 그른 것을 판단하는 오류에 빠진다. 자신의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아이들의 행동을 수습하기 위해 가식적인 척 도와주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판단을 믿고 지켜보진 않는다. 그 어려운걸 해내시다니! 이런 교육자가 더 많아야 할 텐데, 정말 존경스럽다는 찬사가 절로 나온다.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글씨와 말에 너무 의지한 현대 교육이 가슴으로 자연을 보며 신의 속삭임을 듣고 영감을 느끼는 감각을 쇠퇴시킨 게 아닐까?(p134)” 라며 안타까워하던 고바야시 선생님은 직접 선진교육을 받아들여 ‘리드미크’를 도입한다. 마음에 운전 기술을 가르치는 놀이(p130) 리드미크는 선생님의 교육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예이자 아이들이 학교 수업이 즐겁다는 인상을 주는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대안학교인 ‘도모에’의 수업방식이 모두를 흡족하게 할 순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도모에는 지상낙원이지만 학부모들에게는 평범하지 못한 자신의 아이, 그 기질을 눌러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자유분방해지는 아이를 보며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고바야시 선생님의 교육은 너무 훌륭하지만 만약 이런 학교가 있다면 나는 내 아이를 보낼 수 있을까? 내 아이가 너무 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 건 사실이다. 종종 전학을 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내부적 여건과 무관하게 전쟁의 어둠이 덮치며 토토의 도모에는 더 이상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창가의 토토>가 이렇게 어려운 책이었나? 마지막 페이지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10년도 더 전에 읽었을 때는 느끼지 못한 먹먹함이 몰려왔다. 누가 봐도 문제아인 토토에게 “너는 사실 참 착한 아이야”라고 격려해주고 불길에 휩싸인 학교를 보면서 “다음에는 어떤 학교를 만들까?” 라며 미래를 그리는 선생님의 교육을 향한 순수한 열정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도모에 초등학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고바야시 선생님의 사랑을 먹고 자란 아이들이 훌쩍 커 그의 교육이 얼마나 훌륭한지 산증이이 되었다. 비록 토토는 선생님과 약속한 교사가 되진 않았지만 전 세계에 도모에 학교의 존재를 알려 교육의 새로운 지평선을 열었다. 나는 교육자는 아니지만 고바야시 선생님처럼 아이를 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아이들을 한 사람의 인격체로 존중하며 꿈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이바지 하고 싶다. <창가의 토토>는 표면상 아이들의 필독서지만 그 못지않게 어른들의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나쁜 아이는 없다. 어른들이 귀찮아서 포기한 아이만 있을 뿐. 어렸을 때 읽었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창가의 토토, 누구라도 이 글을 본다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