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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법원 - 사법농단, 그 진실을 추적하다
권석천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평점 :

한 젊은 판사가 사표를 냈다.
일평생을 엘리트로 살아온 그는 출세가도의 상징과도 같은 법원 행정처에 발령받고 법관복을 벗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판사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강요당한 것이다. 풍문으로만 떠돌던 판사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법관은 독립된 개체다. 누군가에 외압에 의해 재판의 공정함을 흐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의를 수호하는 판사들은 법관의 독립성이 무엇을 위해 생긴 것인지 간과하고 판사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했다. 엘리트 조직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발한 책 <두 얼굴의 법원> 은 양승태 사법농단의 진실을 파헤치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지난 7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보석 석방되었다.)
유능하지도 무능하지도 않기 위한 선택.
유능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스스로를 옭아맨다. 부당한 지시에도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제 선택을 합리화시킨다. 살기위해 어쩔 수 없다는 선택은 종국에는 도덕적 무감각으로 이어진다. 판사 이탄희는 법원 행정처에 소속되어 소심한 반항을 하기에는 무능한 사람으로 비추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유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 조직을 위해 일할 것을 알기에, 좋은 판사가 되고자 했던 꿈을 접었다. 그에게 사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직 논리에 종속된 다른 판사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출세가도가 보장된 젊고 능력 있는 판사가 돌연 사직을 청했다. 누구라도 의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사상초유 대통령의 탄핵을 눈앞에 두고 법원 내부에서는 차기 정권을 위한 인사 선임에 적임자로 그를 보며 회유하려 든다. 광범위한 압박에 결국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만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가고 은폐되었던 진실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난다. 여기서 사법농단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어떤 부분에까지 진행됐는지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본다. 한 편의 정치소설을 보는 듯 한 느낌이었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 하다는 걸, 양승태 사법농단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탄희가 10년간 일했던 법원은 법정과 판사실만 존재하는 세계였다. …(중략)… 이탄희가 2017년 맞닥뜨린 법원은 그가 알던 법원이 아니었다. 법원행정처가 법원 위에 군림했다. 판사들을 통제하고, 뒷조사하고, 이중·삼중으로 일을 시켰다(p116).
법원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대법원장이나 판사들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은 중대한 약속 위반이 아닌가. 공적 가치냐, 조직논리냐는 갈림길에서 이탄희는 공적 가치를 택했다(p117).
누군가의 전화 한통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판결이 뒤바뀐다면? 사법농단의 일은 높으신 분들의 다른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판사가 독립적인 존재로 대우받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켜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살다보면 우리도 법원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그 누구라도 외압이 아닌 사건 그 자체로 판단을 받아야 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사건의 진행을 늦추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교환하는 행위는 신성한 법원에서는 결코 이뤄져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 나온 수많은 인사들, 그들만 타락했으며 법관으로서 명예를 실추했다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선배들이 그러한 관행을 당연하다 여겼기에 그러한 시스템이 자리 잡았겠는가? 문제의 시초는 한 젊은 판사의 양심선언에서 시작되었지만 달리 말하면 이탄희 판사 이전까지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는 소리다.
‘내가 유죄가 선고되는 것은 곧 법원에 유죄가 선고되는 것이다.(p292)’
이번 사태에 관해 더더욱 견딜 수 없는 건 자신들이 탄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선 판사들이다. 평생을 누군가를 심판만 해봤지 심판 당해본 적 없는 이들은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를 비판하며, 법을 잘 알기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그들의 태도에는 반성이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법원과 자신을 일체화시켜 십자가라도 든 예수처럼 행동한다. 양승태 전대법원장의 위 발언은 뿌리깊은 그들의 사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얼굴의 법원>의 저자 권석천 위원은 법조부 출입 기자로 그 누구보다도 법원행정처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 내가 법원과 법조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의 8할은 그 시절, 그 심의관들로부터 배웠다(p393)고 회고할 만큼 지금의 그를 만든 곳이 법원행정처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테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의 자신과 인연이 있던 법원행정처의 비리를 만 천하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책이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더 컸으리라.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는 양심과 용기가 이 책의 모태가 되었다. 이 책을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자신의 치부를 까발리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전직 대법원장이 아니라 인간 양승태로 법정에 서서 스스로를 방어하길 바란다(p292)는 권석천 위원의 바람처럼 부당함을 당연시했던 과거를 정정당당하게 심판 받길 바란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북토크에 갔었다. 뉴스를 통해 대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던 내게 담담하게 발언하는 이탄희 전 판사의 고백은 충격이었다. Q&A 시간에 판사 복을 벗고 왜 소위 전관 변호사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저 요즘 잘나간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의 소신이 참 멋있어 보였다. 집에 와서 이탄희 변호사의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정말 멋진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못했을 것이다. 조직 논리에 종속되어 노예처럼 부당함에 목소리 내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는 심정으로 아마 살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그의 용기와 결단력이 더더욱 빛나보였다.
벌써 2년이 지났다. 국정농단, 사법농단, 2017년은 여러모로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해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그때와 비교해 더 투명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가?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