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읽는 새로운 언어, 빅데이터 - 미래를 혁신하는 빅데이터의 모든 것 서가명강 시리즈 6
조성준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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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나를, 넌 어떻게 알고 있니?

 

요즘 핸드폰을 하다보면 내가 얼마 전 구매하거나 검색한 물건들이 광고 추천 상품으로 떠있다.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광고가 아닌 나의 검색 기록을 토대로 나만을 위한 맞춤광고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데에는 빅데이터의 영향이 크다. 우리는 서비스의 수혜자이면서 동시에 서비스의 원천이 되는 데이터의 제공자인 것이다(p25).

 

시대의 흐름은 무수히 많은 데이터를 수집해 통계를 내 해석하여 사회가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는 개인정보보호라는 보수적인 시각에서 자신의 정보조차 제대로 제공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세상을 읽는 새로운 언어, 빅데이터>의 저자 조성준 교수는 우리의 일상은 모두 데이터화되고 있다(p264)면서 빅데이터의 실익을 공론화시켜 토론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려면 우리부터 빅데이터가 무엇인지, 내 삶을 어떻게 변화시켜 줄 것이며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얻은 결과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기도 한다. 단순히 데이터의 결과를 분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좋은 데이터는 시대의 트랜드를 만들어내지만 남들이 한다고 해서 너도나도 의식 없이 달라드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렇기에 적절한 교육의 필요성을 그 누구보다도 주창한다. 특히 요즘 빅데이터 교육의 진입장벽이 낮아진 만큼 직접 분석 능력을 길러보길 추천한다.

 

책에서 언급한 아마존의 미래형 배송 시스템은 경악스러웠다. 단지 내가 검색해봤다는 이유만으로 드론이 가장 적잘한 상품을 추천해 선배송, 후결정이라니.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이 됐다.

 

나의 정보를 억류할 수만은 없다. 21세기를 살면서 석기시대 사람처럼 살 수는 없지 않는가. 하지만 정보제공자인 우리의 권리도 상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시당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다 내보이고 싶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빅데이터는 분명 실생활에 유용하다. 이건 반박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기술발전의 산물을 너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그 논의가 한 발짝씩 늦는 감이 있다. 이 책을 통해 빅데이터의 유용성과 문제점을 두루 생각해보며 미래 사회에는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상상해 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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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법원 - 사법농단, 그 진실을 추적하다
권석천 지음 / 창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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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판사가 사표를 냈다.

 

일평생을 엘리트로 살아온 그는 출세가도의 상징과도 같은 법원 행정처에 발령받고 법관복을 벗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판사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강요당한 것이다. 풍문으로만 떠돌던 판사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법관은 독립된 개체다. 누군가에 외압에 의해 재판의 공정함을 흐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의를 수호하는 판사들은 법관의 독립성이 무엇을 위해 생긴 것인지 간과하고 판사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했다. 엘리트 조직의 부끄러운 민낯을 고발한 책 <두 얼굴의 법원> 은 양승태 사법농단의 진실을 파헤치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자고. (지난 7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보석 석방되었다.)

 

유능하지도 무능하지도 않기 위한 선택.

 

유능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스스로를 옭아맨다. 부당한 지시에도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제 선택을 합리화시킨다. 살기위해 어쩔 수 없다는 선택은 종국에는 도덕적 무감각으로 이어진다. 판사 이탄희는 법원 행정처에 소속되어 소심한 반항을 하기에는 무능한 사람으로 비추고 싶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유능한 사람이 되기 위해 조직을 위해 일할 것을 알기에, 좋은 판사가 되고자 했던 꿈을 접었다. 그에게 사표는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조직 논리에 종속된 다른 판사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출세가도가 보장된 젊고 능력 있는 판사가 돌연 사직을 청했다. 누구라도 의아할 수밖에 없는 상황. 사상초유 대통령의 탄핵을 눈앞에 두고 법원 내부에서는 차기 정권을 위한 인사 선임에 적임자로 그를 보며 회유하려 든다. 광범위한 압박에 결국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만 발 없는 말은 천리를 가고 은폐되었던 진실은 점점 수면 위로 드러난다. 여기서 사법농단이 어떻게, 어떤 식으로, 어떤 부분에까지 진행됐는지 논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본다. 한 편의 정치소설을 보는 듯 한 느낌이었다. 현실은 소설보다 더 하다는 걸, 양승태 사법농단이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탄희가 10년간 일했던 법원은 법정과 판사실만 존재하는 세계였다. (중략)이탄희가 2017년 맞닥뜨린 법원은 그가 알던 법원이 아니었다. 법원행정처가 법원 위에 군림했다. 판사들을 통제하고, 뒷조사하고, 이중·삼중으로 일을 시켰다(p116).

 

법원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대법원장이나 판사들을 위해 존재한다면 그것은 중대한 약속 위반이 아닌가. 공적 가치냐, 조직논리냐는 갈림길에서 이탄희는 공적 가치를 택했다(p117).

 

누군가의 전화 한통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판결이 뒤바뀐다면? 사법농단의 일은 높으신 분들의 다른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판사가 독립적인 존재로 대우받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켜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살다보면 우리도 법원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할 수도 있다. 그 누구라도 외압이 아닌 사건 그 자체로 판단을 받아야 한다. 정치적인 이유로 사건의 진행을 늦추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교환하는 행위는 신성한 법원에서는 결코 이뤄져서는 안 된다.

 

 

이 책에서 나온 수많은 인사들, 그들만 타락했으며 법관으로서 명예를 실추했다 말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선배들이 그러한 관행을 당연하다 여겼기에 그러한 시스템이 자리 잡았겠는가? 문제의 시초는 한 젊은 판사의 양심선언에서 시작되었지만 달리 말하면 이탄희 판사 이전까지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않았다는 소리다.

 

내가 유죄가 선고되는 것은 곧 법원에 유죄가 선고되는 것이다.(p292)’

 

이번 사태에 관해 더더욱 견딜 수 없는 건 자신들이 탄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선 판사들이다. 평생을 누군가를 심판만 해봤지 심판 당해본 적 없는 이들은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를 비판하며, 법을 잘 알기에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그들의 태도에는 반성이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법원과 자신을 일체화시켜 십자가라도 든 예수처럼 행동한다. 양승태 전대법원장의 위 발언은 뿌리깊은 그들의 사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두 얼굴의 법원>의 저자 권석천 위원은 법조부 출입 기자로 그 누구보다도 법원행정처 사람들과 가깝게 지냈다. 내가 법원과 법조에 대해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의 8할은 그 시절, 그 심의관들로부터 배웠다(p393)고 회고할 만큼 지금의 그를 만든 곳이 법원행정처라 말해도 과언이 아닐테다. 그렇지만 그는 과거의 자신과 인연이 있던 법원행정처의 비리를 만 천하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그 증거가 바로 이 책이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더 컸으리라.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는 양심과 용기가 이 책의 모태가 되었다. 이 책을 어떤 마음으로 썼을까. 자신의 치부를 까발리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전직 대법원장이 아니라 인간 양승태로 법정에 서서 스스로를 방어하길 바란다(p292)는 권석천 위원의 바람처럼 부당함을 당연시했던 과거를 정정당당하게 심판 받길 바란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 북토크에 갔었다. 뉴스를 통해 대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던 내게 담담하게 발언하는 이탄희 전 판사의 고백은 충격이었다. Q&A 시간에 판사 복을 벗고 왜 소위 전관 변호사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저 요즘 잘나간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의 소신이 참 멋있어 보였다. 집에 와서 이탄희 변호사의 인터뷰를 찾아봤는데 정말 멋진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마 못했을 것이다. 조직 논리에 종속되어 노예처럼 부당함에 목소리 내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살얼음판 걷는 심정으로 아마 살지 않았을까. 그렇기에 그의 용기와 결단력이 더더욱 빛나보였다.

 

벌써 2년이 지났다. 국정농단, 사법농단, 2017년은 여러모로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해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그때와 비교해 더 투명한 사회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가?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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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아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2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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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현명한 오디세우스는 어디 갔는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뛰어난 서사시로 명성이 자자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기원전 8세기의 인물임에도 그가 남긴 작품은 대대손손 찬사를 받아 2019년 현재까지도 이어졌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아무리 영웅이라 해봤자 고작 인간은 신들의 장기 말이라는 다소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교훈을 얻었는데 오디세우스는 도저히 모르겠다. 신의 가호를 받은 인간은 그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홀로 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교훈인가? 지혜롭고 현명한 오디세우스를 내놓아라!!

 

오디세우스, 그는 아테나 여신의 비호를 받는 영웅으로 트로이 전쟁의 승전보를 울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집으로 곱게 간다면 무탈했을 그의 인생은 호기심과 교만이란 불운으로 인해 망망대해를 떠도는 불쌍한 영혼으로 전락하고 만다. 트로이 전쟁에서의 10, 귀향길에서의 10, 무려 20년이란 세월동안 집에 돌아오지 못한 그는 갖은 고통을 받으며 고향을 그리워하는데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자업자득이다. 신들의 이야기만 막장인줄 알았는데 영웅들의 이야기 또한 별반 다를 바 없는 듯하다.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지만 제대로 읽어본 사람은 드문 대서사시의 시작을 진형준 교수의 축역본으로 읽으니 술술 읽힌다. 막장스러운 내용과 별개로 고전이 가독성이 좋다니! 가독성마저 좋지 않았다면 오디세우스를 욕하다가 중도하차 했을 것 같다.

 

기원전을 배경으로 하는 옛날이야기를 현대식으로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수지만 읽다보면 대환장하는 에피소드가 너무 많다. 열입곱 살이나 된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그 나이 먹을 때까지 왕권을 바로세우지 않고 뭐했는가! 영웅도 자식만큼은 제 맘대로 할 수 없다는 대목을 보여준 건가, 자기 어머니가 위협당하고 가문의 재산이 축나고 있는데 그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 아테나 여신이 겨우겨우 사람답게 만들 때까지 아버지만 기다리며 두려워할 뿐, 뭘 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디세우스의 실착은 호기심이다. 하지 말라면 좀 하지 말라고!! 신들이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 에피소드는 여지없다.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한다. 조언을 해줘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나 그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혼자만 살아남는다. 아마 나의 처지가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을 군사1일 확률이 높다보니 이 부분에서 더 분노하나싶다. 거인 키클롭스와의 에피소드는 누가 정녕 악인인가? 남의 집에 쳐들어가 음식을 훔친 것도 모자라 선물을 내놓으라고 강짜를 부리다니! 다시 말하지만 지혜롭고 현명한 오디세우스를 알려주세요. 물론 중간 중간 기지를 보여 목숨을 부지하는데 애당초 하지 말란 걸 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이 너무 많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당도했을 때 오죽했으면 그를 수호했던 아테나 여신이 그대는 참으로 꾀가 많은 사람이야! (중략) 자기 고향에 돌아와 있으면서도 말을 꾸며내고 있다니!(p128)” 라며 경고했겠는가. 더군다나 20년 넘게 강제로 수절한 아내를 믿지 못하고 시험이나 하고. 정말 너란 남자..... 최악이야.

 

물론 이 모든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일 뿐 당대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우리가 막장드라마 보듯 재밌게 봤을 것 같긴 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며 끝까지 귀향의 의지를 보인 강인한 영웅 이야기, 얼핏 들으면 참 멋진데.....

 

왜 오디세우스가 지금까지도 읽히고 사랑받을지, 왜 수 많은 화가들이 오디세우스를 그렸는지 생각해보며 읽는다면 인간이 좋아하는 막장 스타일의 이야기가 참 변함없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내가 아무리 호메로스를 혹평한다 해도 이미 수많은 평론가들이 찬사를 보낸 검증된 이야기인 만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전이 두려워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화컬렉션으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우리 함께 오디세우스를 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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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 프라도 차오, 빌바오 - 유쾌한 스페인 미술관 여행
최상운 지음 / 생각을담는집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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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에서 세비야까지, 스페인 미술관 기행

 

지금까지 내게 있어 스페인의 예술은 비주류라는 인상이 강했다. 예술에 문외한이기도 했거니와 스페인 미술의 황금시대는 이탈리아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예술가들을 적극 초빙한 후 이룩해 낼 수 있던 결과라 여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스페인의 많은 예술가들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그런데 스페인의 진정한 예술을 알고 느끼려면 황금시대의 개막 이후를 살펴봐야 한다는 걸 느꼈다. 특히 스페인의 국민화가 고야는 고전을 넘어 근대의 개막을 알린 선두주자였다. 많은 사랑을 받는 화가인 만큼 고야의 작품은 스페인 전역에 퍼져있는데 어느 미술관에서 어떤 고야를 만날 수 있는지 최상운 작가의 <올라, 프라도, 차오, 빌바오>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유럽의 3대 미술관이라 불리는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는 고야의 옷 벗은 마하옷 입은 마하두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고급스러운 책 속지를 꼽을 수 있는데 덕분에 실제 미술관에 가지 않고도 작품의 생생함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책에 삽입된 마하부인의 고혹스러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같은 모델을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해낸 그의 천재성에 감탄한다. 같은 표정, 같은 포즈인데 옷의 유무로 모델의 포스가 달라지니, 막눈인 내가 보더라도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당시 왕실의 비정한 권력을 적나라하게 담은 카를로스 4세 가족 초상화는 정치권력의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가족이지만 바스라질 것 같은 위태위태한 모습을 시선을 통해 표현해낸다. 고야의 거인’ ‘52과 같은 작품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만큼 프라도 미술관은 스페인에 간다면 꼭 들려야 할 대표 관광지이다.

 

같은 도시에 위치한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에도 볼거리가 넘친다. 책에서는 각 층마다, 각 전시실마다 친절하게 대표 작품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건 드가의 춤 추는 댄서였다. 자연 풍경이 아닌 사람을 표현하는 인상파 작가의 작품이 얼마나 몽환적인지 이 그림을 통해 느껴볼 수 있다.

 

 

 

도시 자체가 가우디의 걸작으로 꾸려진 바르셀로나는 건축물의 천국이다. 사그리다 파밀리아의 웅장함에 압도되며 그 정교함과 섬세함에 감탄하게 된다. 구엘 공원에서 휴식을 취하며 바르셀로나의 전경을 내려다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다. 바르셀로나에서는 어디를 가더라도 가우디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도시다. 카사 밀라의 독특함과 여러 개성있는 건축물들의 조화는 바르셀로나를 더 빛나게 해준다. 바르셀로나 거리가 미술관 그 자체였다면 호안 미로 미술관은 현대 예술의 거장을 만나볼 수 있다. 스페인이 아닌 카탈루냐의 화가로 기억되고 싶었던 그는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건물 입구부터 특별함이 넘치는 호안 미로 미술관은 회화, 조각, 태피스트리, 판화, 데생 등 다양한 종류의 예술 작품을 한데 모아 볼 수 있다.

 

스페인 북쪽 빌바오 지역에 위치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인구 35만의 작은 도시에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해 빌바오 효과라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훌륭한 미술관의 존재만으로도 관람객의 발길을 끌 수 있다는 걸 증명해낸 것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그 외관부터 상당히 공을 들였는데 물고기에 영감을 얻어 프랭크 게리가 건축했다. 관내 전시된 작가들의 이름만으로도 구겐하임 미술관의 쟁쟁함을 느낄 수 있다.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안셀름 키퍼, 앤드 워홀과 같은 작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바스크 지방 작가들의 그림도 걸려있다. 제프 쿤스의 튤립, 루이즈 부르주아의 마망과 같은 작품이 외부에서부터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국적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만큼 스페인여행에서 빌바오는 빼놓지 말고 들려야 할 도시가 되었다.

 

감히 스페인의 예술을 비주류라 여겼다니, 고야, 피카소, 가우디와 같은 분들이 얼마나 통탄하겠는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설프게 갖는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를 느꼈다. 작품을 즐길 수 있는 상세한 설명과 그림이 어우러진 <올라, 프라도, 차오, 빌바오>는 스페인 예술에 대해 가졌던 잘못된 편견을 완전히 뒤엎었다. 도시 곳곳에 이토록 아름다운 작품들이 즐비한 곳을 미처 알지 못했다니! 스페인 미술의 진가를 알고 싶다면 우선 이 책으로 시작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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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가 - 문화재 약탈과 반환을 둘러싼 논쟁의 세계사
김경민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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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국외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중학교 때 교과서에 직지이야기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왜 우리의 것인데 돌려주지 않는 거지? 그때의 나는 어렸고, 문화재가 단순히 예술품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저 상식적으로 우리의 것을, 다른 이들이 소유를 주장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김경민 박사의 <그들은 왜 문화재를 돌려주지 않는가>는 문화재 약탈의 근원을 살펴보고 왜 문화재가 우리에게 돌아오지 못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국제사회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 한다.

 

한때는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이라 불렸을 만큼 약탈의 대가였던 영국의 사례를 분석하고 문화재의 현 소유국인 시장국의 입장을 알려준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주로 문화재를 약탈당한 원산국의 입장인 만큼 그들의 논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풍부한 사료와 논리적인 분석으로 왜, 유독 영국이 문화재 반환에 회의적인지 그 주장을 설파한다. 현재 파악되기로는 7,638점의 우리나라 국외문화재가 영국에 있다. 과연 그 문화재들은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한다.

 

고대 이집트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유적을 발굴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고고학자의 발굴은 어디까지가 연구이고, 어디까지가 약탈과 파괴인가?

약탈 문화재를 전시하는 박물관은 도덕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옳은 공간인가? (p9)

 

저자가 책의 서문에 넣은 위의 질문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궁극적으로 잘 표현했다. ‘문화재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고대 시대의 유물들을 현재 그 땅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민족과 문화가 다를지라도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있다할지라도 그것이 유물을 발굴할 권리와 상통하는가? ‘무덤의 저주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듯 무덤의 주인이 원치 않을지라도 그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덤을 발굴할 정당성이 있는가? 세계의 유수 박물관의 전시를 즐기면서 이에 대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서 문화재 반환에 대한 문제는 단순히 원주인이라 주장하는 원산국과 현 소유국인 시장국의 문제만으로 생각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도의적 차원을 넘어 다방면으로 고려해야하는 복합적인 문제인 만큼 단순히 우리 것이기에 우리가 소유해야 한다는 차원의 사고를 넘어서야겠다 생각했다.

 

사실, 근대적인 의미의 문화재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은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중세시대만 할지라도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 가치 있어 보이는 것들이 그다지 인정받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르네상스 시대로 옮겨오면서 예술은 곧 교양의 지표가 되었고 이때 사회, 정치적 목적으로 예술품을 모으는 것이 더 활발히 시행되었다. 이에 정점을 찍은 건 문화재 약탈을 주도한 영국의 제국주의가 전 세계로 마수를 뻗치면서부터다.

 

영국의 문화재 약탈사

 

영국은 정복국의 문화재를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대영제국의 위상을 드높이는데 이용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정당하게 수집해 온 것이겠으나) 반출해온 문화재를 박물관에 전시하여 영국 땅을 벗어난 적 없는 일반인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제국주의의 위대함을 전하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시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아닌 것들을 열등하게 여겼으면서도 이전 문명의 화려함은 취했다. 프랑스와 식민지 개척을 두고 벌인 자존심싸움의 연장선은 문화재였다. 문화재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원산국을 대신해 문화재를 연구하겠다며 타국에 발을 들인 학자들의 목적이 순수했을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만, 제국주의의 선봉에 선 강자들에게는 항상 그럴싸한 명분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봤던 영화 인디아나 존스가 제국주의적 시선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건 새로운 충격이었다.

 

 

티푸의 호랑이, 베닌 브로즈, 코이누르 다이아몬드 등 현재 영국의 박물관을 가득 채우는 건 대부분 영국 고유의 문화재가 아닐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이 다 합법적으로 절차로 취득했다기엔 영국은 언제나 강자였고 그들은 약자를 탈취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실효성이 없는 국제법의 허점과 영국박물관법을 이유로 문화재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실제 그들은 문화재 반환을 논의하는 국제협약에 서명하지 않고 있다. 이는 영국만의 문제점이라 볼 수는 없다. 대부분 19세기를 호령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일관된 모습이나, 유독 영국 정부는 그 반감이 심할 뿐이다. 또한 국제법적인 협의에 이르게 될지라도 소급적용 될 수 없는 법망을 피해 약탈의 주요 시기였던 19세기 혹은 그 이전에 반출된 문화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문화재에 대한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데 전 세계를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바라보는 문화국제주의와 원산국에 돌아가야 한다 바라보는 문화민족주의다. 돌려받을 것이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문화민족주의의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로 타국의 문화재를 소유한 국가들은 인류 공동의 유산을 최상의 상태로 지켜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이유로 여전히 자신들만이 그 일을 해낼 수 있다는 제국주의적 시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국외 문화재의 미래

 

우리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우리에게도 돌려주어야 할 문화재가 있다. 총독부 박물관이 남기고 간 실크로드 컬렉션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역시 약탈 문화재의 일종이라 볼 수 있으니, 받아야 할 문화재가 있는 우리의 여론은 반환에 대해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일정 부분에 대해선 시장국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리 큰 논란은 아니리가 생각한다. 다만, 우리의 문화재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비단 우리의 것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약탈 문화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문화재 반환 문제는 공식적인 절차와 법적 소유권의 개념이 아닌 상호 이해를 통한 양보와 협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p335)고 말한다. 문화재야말로 주요 시장국 입장에서 그리운 제국주의의 향수이기에 그때의 영광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쩌면 냉혹한 이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이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이것이 과연 옳은지는 모르겠다. 이 근간에는 결국 제국주의를 과오로 보지 않는 그들의 주장을 암묵적으로 인정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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