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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이름 붙이기 -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평점 :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 자연에 이름 붙이기 :::
캐럴 계숙 윤 / 지음
정지인 / 옮김
이토록 경이롭고 깊은 감동을 주는 과학책을 만나기는 쉽지 않으리라. 책을 읽는내내 가쁜 숨을 멈추고, 조심스레 한장 한장의 페이지를 넘기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서 기분 좋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 책은 미국에서는 이미 2009년에 출간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작년에 엄청난 인기를 얻었던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통해 '이보다 나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친 책은 없다'고 알려지면서 많은 독자들의 관심으로 뒤늦게 <자연에 이름 붙이기>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저자인 캐럴 계숙 윤은 과학자 부모 밑에서 실험용 생쥐와 함께 놀고 동네 숲을 마음껏 뛰어다니며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자신을 '과학의 젖'을 먹고 자랐다고 표현할만큼 과학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알려준다. 저자는 예일대에서 생물학을 공부한 뒤 코넬대에서 생태학 및 진화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2년부터 뉴욕타임스에 과학 칼럼을 연재해왔다고 한다.
이 책은 분류학자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 인물을 바탕으로 과학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법은 물론이고 인간이 절대적이라고 믿는 어떤 지식 체계가 얼마나 쉽게 부서질 수 있는 것인가와 같은 '과학 너머의 이야기' 까지 아름다우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는 측면에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와 <자연에 이름 붙이기> 이 두 책은 많이 닮아있다.
그리고 저자의 탁월하고 거침없는 스토리텔링은 어떤 분야를 깊고 넓게 알면 어려운 지식 이야기도 이렇게 쉽고 재미나게 풀어 표현해 낼 수 있구나 하고 감탄하며 읽게 된다.
우리는 생명의 세계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만 맡겨두는데 너무 익숙한 나머지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의 생명에게 눈길도 주지 않게 됐다. 수많은 야생의 생물들이 자기 좀 보라는 듯 눈에 띄는 모습으로 끈덕지게 우리 앞에 나타날 때도 우리는 그 존재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
우리는 모든 것 중 가장 큰 것을, 바로 야생의 자연 자체를 잃을 위험에 처해있다. 생명이 사라지고 있다. (...) 우선 나는 내 물고기들을 되찾고 싶다. (...) 비록 과학을 대단히 존경하는 사람이기는 해도 나는 물고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해야겠다.
Prologue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 기이한 사정 p44
과학적으로 생물들의 진화 과정과 유전자를 면밀히 조사하면, 물고기는 존재하는 카테고리가 아니란다. 굉장히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보고, 만지고, 알고, 먹기까지 하는 물고기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 비슷한 어류계는 분명하게 우리 눈앞에서 매일 살아 숨 쉰다. 그런데 왜 과학자들은 물고기의 존재를 죽여버린 것일까?
이 책은 물고기가 과학적으로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인간의 인식 체계가 과학으로 점차 넘어가게 된 흐름을 설명하며, 그 답과 우리의 현주소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는 분류학 초창기인 18세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분류학의 거대한 역사적 변천사를 아주 흥미진진하고 스펙타클하게 이끌어 간다. 분류학이란 인간이 나무, 물고기, 사자 등과 같이 생물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분류하고 체계화한 것을 말한다. 이 분류학은 카오스 상태인 자연에서 어떤 질서를 찾아내고 그것을 개념화하고 보편타당한 기준을 바탕으로 생명의 지도를 만들고자 했던 과학자들에 의해 발전해왔다.
분류학은 과학적 분류의 아버지인 카롤루스 린나이우스가 이명법을 만든 뒤 학문의 하나로 자리 잡는데, 찰스 다윈이 혜성처럼 등장해 진화라는 개념을 내놓으면서 패러다임을 뒤흔들어버린다. 이후 수리분류학, 분자분류학, 분기학으로까지 이어진다.
탐험의 시대였던 18세기에는 린나이우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생명의 세계를 수집하고 체계화하고 정리하여 자기만의 자연사 컬렉션을 꾸리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던 때였다. 가터뱀 두 마리, 수많은 따개비나 길이가 30㎝가 넘는 개구리, 고래의 음경과 같은 이색 생명체를 전시할만큼 당시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었고 생명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자는 이 자연의 질서에 대한 감각, 인간이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세계를 '움벨트'로 지칭하면서, 움벨트가 분류학 창시의 원동력이었다고 설명한다.
독일어에서 유래한 움벨트는 말 그대로 인간이 과학적 지식을 배제하고, 자신의 세계를 인식하는 일종의 감각이다.
쉽게 예를 들면, 다수의 어린이는 미취학 시절 공룡 박사가 되는 때가 있다. 온갖 공룡에 대해 술술 말하고 그림만 봐도 누가 누구인지 찰떡같이 구분한다. 어린 시절 공룡 덕후가 되는 이유도 과학적 지식이 뇌에 범벅이 되기 전에 이 인간적 감각을 가장 많이 활용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유년 시절이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우리는 강아지라는 존재를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배우고 나면 거리에 영역 표시하고 있는 저 털복숭이가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구분을 한다. 다리가 네 개인 책상을 보고도 강아지와 헷갈리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영재성이 이 움벨트에서 나타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러나 18세기부터 21세기까지 과학기술은 눈부시게 발전해왔고 생명에 이름 짓는 일에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거듭 일어났다. '생명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한 뒤 이름을 짓고 분류를 하던 린나이우스 시대의 분류 개념은 다윈이라는 진화론자가 등장하면서 막을 내린다.
다윈은 8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따개비를 연구하면서, 이 미미해 보이는 생물에서 드러나는 복잡한 체계에 의문을 가지게 되고, 결국 종이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 진화하고 유동적으로 변화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이는 기존 분류학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후의 분류학은 '인간의 주관성'을 어떻게 죽여서 '과학적인 학문'으로 한층 가까이 다가가느냐가 미션이 되었다. 기존에는 겉보기에 유사한 것들만 비교가 가능했고, 당연히 비슷한 것들은 한 카테고리로 분류했기 때문에 종을 초월한 비교 분석이 어려웠다. 하지만 분자를 통한 분류학은 동식물의 조직을 비교하는 것까지 가능케 했다. 버섯과 고래도 비교가 가능해졌다. 이렇게 분류학이 조금씩 직관을 벗어나 진정한 과학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저자는 생명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하는 것과 관련해 생물학에만 천착하지 않고, 인류학과 인지심리학, 생태학을 넘나들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민속분류학이나 인지심리학 연구 결과를 보면, 분류학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인류는 생존을 위해 뇌의 특정 부위에 생물을 분류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움벨트의 재발견인 셈이다.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움벨트는 과학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치부됐지만, 저자에게는 다시 되살려내야 할 그 무엇이 되어버렸다. 생명 세계를 지각하면서 이름 짓고 분류하는 일을 과학자의 소임으로 던져버리고 더는 움벨트를 작동시키지 않고 생명의 세계와 단절된 현대인들의 위험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 세계에 닻을 잘 내리기 위해서 지구의 여섯번째 멸종 시대의 한가운데 들어선 인류가 움벨트에 눈떠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분기학자들이 진화적 분류 체계의 연구를 통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움벨트를 작동시켜 물고기를 물고기로 보는 우리는 '물고기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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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통틀어 믿어왔던 진실의 이면을 목격한 한 과학자의 진솔한 고백이기도 한 이 책은,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유, 더없이 인간적인 감정이 곳곳에서 묻어나 깊은 감동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느끼게 해준다.
이제 우리는 살갗에 와닿는 바람이 느껴지는 야외로 나가, 주변에 살아 숨쉬는 동물, 식물, 곤충들을 눈으로 보면서 잠자고 있던 생명의 경이를 직접 느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두 책을 모두 옮긴 정지인 번역가의 적확한 표현과 아름답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들은 책을 읽는데 크게 한 몫을 한 것 같다. 저자의 감정까지 단어 하나 하나에 깊이 새겨놓은 듯해서 정말 가슴 벅찬 감격의 순간을 느낄 수 있게 해주어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결코 쉽지 않은 낯선 분야의 책이지만, 매혹적인 과학사 또는 분류학이 궁금하거나 과학적 지식을 넓히고픈면 이 책을 과감히 선택하여 롤러코스트를 타는듯한 재미와 깊이있는 통찰을 함께 느껴보시길 바란다.
이름을 알고 싶은 마음은
그 존재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다. (...)
이름을 모르면 스쳐 지나가지만
이름을 알면 마음속에, 머릿속에 스며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