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지에서 한 발짝도 넘어오지 마라.
不敢越雷池一步(불감월뇌지일보)
진(晉) 명제 때 사람인 유량(庾亮)이 온교(溫嶠)에게 보낸 편지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유량은 명제 황후의 오라비로 조정의 실세였다. 당시 서부 변방이 편치 않았는데 유량은 대신 온교를 강주자사로 추천했다. 얼마 뒤 유량은 역양태수 소준(蘇峻)이 모반을 꾀한다는 밀보를 접했다. 유량은 바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소준을 조정으로 불러 대사마에 임명함으로써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 그를 잡으려 했다. 대신들은 모두 반대했지만 유량은 자신의 권세로 밀어붙였다. 그의 고집은 결국 이를 눈치 챈 소준의 선제공격을 초래했다. 이에 온교는 적극적으로 소준을 대적하자고 유량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유량은 서부 변방이나 잘 지키라면서 “뇌지에서 한 발짝도 넘어오지 마라.”라고 경고했다. 수도 건강이 소준에게 함락당했고 유량은 하는 수 없이 온교에게 몸을 맡겼다. 온교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받아들인 뒤 차분히 대비하여 소준의 공격을 물리치는 한편 몇 차례 전투 끝에 소준의 반란을 완전히 진압했다. 이후 ‘불감월뇌지일보’(不敢越雷池一步)는 일을 처리함에 너무 소심해서 일정한 범위를 넘지 못하는 행동이나 사람을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보온교서」(報溫嶠書)
중국사의 오늘 :
1711년 12월 6일(청 성조 강희 50년 10월 임오)
대명세(戴名世)의 『남산집』(南山集) 사건이 터졌다. 강희제에 대한 불경스러운 내용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대명세가 처형되었고, 그가 인용한 글의 저자인 방효표(方孝標)는 부관참시되었다. 청나라 역사상 최초의 문자옥(文字獄) 사건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