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안의 닭, 들판의 꿩

   家鷄野雉(가계야치)

 

이 성어는 남조 시대 송나라 사람 하법성(何法盛)이 동진(東晉) 시기의 사적을 기록한 78권의 기전체 진중흥서에 나온 일화에서 비롯된다. 서성(書聖)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와 한 시대를 살았던 유익(庾)이란 장수는 한때 왕희지와 나란히 거론될 정도로 뛰어난 서예가였다. 그러나 정치와 군사 활동에 쫓겨 서예를 멀리하다 보니 실력이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왕희지는 벼슬에 욕심을 두지 않고 산천을 떠돌며 비석에 새겨진 역대 서법과 서체를 연구하는 등 늘 서예와 함께 하는 삶을 꾸렸다. 이런 왕희지의 글씨는 천하의 명성을 독차지했고, 부잣집 자제는 물론 일반 백성까지 그의 서법을 배우고 싶어 했다. 급기야 유익의 아들과 조카조차 가문의 서법을 버리고 왕희지를 흉내 냈다. 심기가 불편해진 유익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지금 내 자식과 조카 놈까지 집 안의 닭은 외면하고 들판의 꿩을 좋아한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 후 가계야치는 서예에서 서로 다른 그 나름의 풍격, 즉 스타일을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진중흥서(晉中興書) 영천유록(潁川庾錄)

 

* 왕희지

 

 

 

 

 

 

중국사의 오늘:

7001111(당 무측천 구시 원년 신축)

재상 적인걸이 죽었다(607년생, 향년 94). 691년 재상에 임명된 이래 세 차례 재상을 맡아 무측천의 정치를 보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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