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첨하는 무덤

   諛墓(유묘)

 

당나라 때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문집에 나오는 일화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친 한유(韓愈)는 그 문장력으로 인해 많은 청탁을 받았다. 특히 돈깨나 있고 힘깨나 쓰는 집안에서는 비문, 즉 묘비명을 한유에게 청탁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묘비명을 짓는 대가가 만만치 않아 금덩이를 싸 가지고 한유를 찾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한유가 죽은 사람을 칭찬하는 아부성 문장에 아주 능숙했기 때문이다. 이왕 죽고 없는 사람에게 험한 말보다야 칭송하는 말이 낫겠지만 한유의 칭송 일변도 묘비명은 그 정도가 지나쳤던 모양인지 후대 문인에게 두고두고 유묘諛墓라는 조롱거리를 제공했다. 예나 지금이나 돈과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한 비굴한 자세는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다.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열사들은 국립묘지로 가지 못하는데 친일 하고 독재한 나쁜 자들은 버젓이 국립묘지의 명당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현실도 유묘조성에 열을 올렸던 그때 그 풍조보다 나을 게 없다. 그건 그렇고 그런 자들을 위한 유묘의 묘비명에는 대체 뭐하고 쓰여 있을까?

 

이의산문집(李義山文集유차(劉叉)

 

* 한유

 

 

 

 

 

 

중국사의 오늘:

1858118

2차 아편전쟁 기간, 상해에서 영국의 전권대표와 천진조약을 보완하는 중영통상장정선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해관에 대한 주권을 잃은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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