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 갇힌 죄수
詩囚(시수)
시선(詩仙)이란 단어는 들어 보았어도 ‘시수’(詩囚)란 단어는 생소할 것이다. 당나라 시기는 말 그대로 ‘시(詩)의 시대’였고, ‘당시’(唐詩)는 당나라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만큼 많은 시인과 시가 출현했다는 반증이다. 그 숱한 시인 가운데에서도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는 대단히 특이했다. 이들은 시를 창작하느라 공무(公務)를 잊는 것은 물론 자신을 학대하기까지 했다. 생활이 어렵고 힘든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시 때문에 삶이 고단했던 것이다. 그렇게 창작된 시도 어두웠다. 마치 감옥에 갇힌 죄수처럼 말이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이들을 두고 ‘시수’라 표현했다. 원나라 때 문인 원호문(元好問)도 「논시」(論詩)에서 “맹교의 궁핍과 시름은 죽어서도 쉬지 못하니, 이 높고 넓은 천지에서 시에 갇혔구나”라고 했다. 가도는 글자 하나하나를 다듬고 또 다듬어 ‘퇴고’(推敲)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시대는 바뀌었고 세상은 달라졌지만 이들의 창작 태도와 정신만큼은 창작하는 사람들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다만 그 정신을 본받으려는 사람이 없을 뿐. ‘시수’는 고통스럽게 시를 창작하는 시인을 비유하는 특별한 단어가 되었다.
「논시」(論詩) 외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1021/pimg_720298193912661.jpg)
* 맹교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1021/pimg_720298193912662.jpg)
* 가도
중국사의 오늘 :
422년 10월 22일(북위 명원제 태상 7년 9월 신유)
명원제(明元帝)가 교산(橋山, 섬서성 황릉현)에 행차하여 사람을 보내 황제(黃帝)와 요(堯) 임금의 사당에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 선비족 출신인 북위 황제들은 한족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자신들을 황제(黃帝)의 후손으로 자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