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의) 대나무를 모조리 죽간으로 만들어도 다 기록할 수 없다.
罄竹難書(경죽난서)
수 왕조 말기, 양제(煬帝) 양광(楊廣)의 폭정이 브레이크 없는 폭주 열차처럼 그 종착점을 향해 달리고 있다. 농민 봉기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그중에서 적양(翟讓)이 이끄는 와강군(瓦崗軍)이 가장 빠르게 세를 키워 가고 있었다. 이때 장수 이밀(李密)이 와강군에 합류하면서 그 기세는 더욱 커졌다. 이밀은 적양의 신임을 얻어 금세 전군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각지의 봉기군과 수 왕조 내의 문무 관리에게 합류를 권했다. 이어 이밀은 수 왕조의 수도 낙양(洛陽)으로 진격하기로 결정하고 그에 앞서 수 양제를 토벌하는 명분을 쌓기 위해 격문을 발표했다. 이 격문에서 이밀은 수 양제의 10대 죄상을 열거한 다음 “남산의 대나무를 모조리 베어 죽간으로 만들어도 양광의 죄상은 다 기록할 수 없으며, 동해의 물을 다 끌어와도 그 죄악을 씻어 낼 수 없다”고 했다. 618년 수 양제는 강도(江都)에서 피살되었고, 이밀은 당나라에 항복했지만 이내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살해되었다. ‘경죽난서’는 기록할 일이 너무 많아 다 적을 수 없을 때 쓰는 성어이다. 권력 기관의 권력 남용이 도를 넘고 있다. 역사는 그 자체로 기억이며, 그 기억을 토대로 공소시효 없는 심판을 단행한다. 기억만큼 두려운 일도 없다.
『구당서』(舊唐書) 「이밀전」(李密傳)
* 「수 양제가 강남에 행차하다」
중국사의 오늘 :
640년 10월 11일(당 태종 정관 14년 9월 을묘)
당 왕조에서 서주(西州, 신강성 투루판)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당 왕조에서 서역 지역에 설치한 군정 기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