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형체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형체 있는 시이다.
詩是無形畵, 畵是有形詩(시시무형화, 화시유형시)
북송 때의 예술가 곽희(郭熙) 등이 편찬한 예술 평론서인 『임천고치』(林泉高致) 「화의」(畵意)에 나오는 멋진 구절이다. 이 구절에 이어 곽희는 “철학가는 이치를 많이 말하는데 이런 말들이 나의 스승이다”라고 했다. 고대 서양에도 이와 비슷하게 “시는 소리 없는 그림이요, 그림은 소리 있는 시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느 쪽이든 비슷한 사유의 경지를 보여 주는데, 시와 그림은 표현 방식이 다를 뿐 원리는 서로 통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소동파는 “시와 그림은 본래 하나의 규율로 통하니 솜씨와 참신함”이란 예술적 견해를 제기한 바 있다. 이 같은 예술론은 동양의 문예 평론이나 역대 시화 창작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말은 마음의 소리요, 글은 마음의 그림이다”는 명구는 말과 글을 당사자의 심경(心境)과 연계시켜, 글과 말이 궁극적으로는 그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임천고치』(林泉高致) 「화의」(畵意)
중국사의 오늘 :
1438년 7월 18일(명 헌종 성화 19년 6월 을해)
악명 높은 감찰기구인 서창(西廠)의 책임자로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태감 왕직(汪直)이 어사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갔다. 왕직은 얼마 뒤 귀양지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