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성의 동문

   夷門(이문)

 

전국 시대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의 성문 중 동문은 이문이라 불렸다. 이 이문을 관리하는 사람은 후영(侯嬴)이었는데, 말하자면 강호의 고수와 같은 존재였다. 위나라의 권력자 위 공자 무기(無忌)는 이 후영을 자신의 상객으로 모시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수레를 몰고 후영을 찾아갔다. 이때 위 공자는 수레의 왼쪽 자리를 비워 놓은 채 후영을 기다렸다. 여기서 허좌이대’(虛左以待)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나왔다. 글자 그대로 왼쪽을 비워 놓고 (사람을) 모시다란 뜻이다. 귀한 사람을 모시거나 대접할 때 취하는 극진한 예절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문의 문지기 후영은 죽음으로 위 공자를 도왔다. 훗날 이문은 의로운 선비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고, 의미가 확대되어 은혜를 알고 이를 갚는 의로운 사람 또는 신의를 비유하는 말이 되었다.

 

사기』 「위공자열전

 

 

 

 

 

중국사의 오늘 :

38620(동한 광무제 건무 144월 신사)

공자의 후손 공지(孔志)를 포성후(褒成侯)에 봉했다. 역사적으로 유가를 국책 이념으로 받든 것은 한 문제 때 시작되었고, 공자의 후예에게 작위를 준 것은 서한 평제 때 시작되어 거의 모든 왕조가 이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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