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나아가고 세 번 물러나다.
三爲三去(삼위삼거)
춘추 시대 초나라의 손숙오(孫叔敖)는 세 번이나 영윤(재상)이 되었음에도 이를 영광으로 여기지 않았고, 또 세 번이나 그 자리에서 물러났으나 근심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누군가 그 까닭을 묻자 손숙오는 “내가 세 번 나아가고 세 번 물러난 것이 나 때문인지 다른 연유인지 알 수 없다. 다른 연유라면 기뻐하거나 우려할 일이 없고, 나 때문이라면 당연한 것이니 내가 기뻐하거나 걱정할 일이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손숙오는 작위나 자리 그리고 녹봉이 높아질수록 몸과 마음을 더욱 낮추고 더 많이 베풀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세 번 재상 자리에 오르고 물러남에 있어서 전혀 심경의 동요가 없었던 것이다. 빈 깡통이 요란하다고, 내면은 형편없고 스펙만 화려한 자들이 고관대작을 넘보니 세상이 시끄럽고 비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장자』 「전자방」(田子方), 『열자』 「열부」(說符) 외
* 도판은 손숙오.
중국사의 오늘 :
1979년 4월 3일
산동성 곡부(曲阜)의 춘추 시대 노(魯)나라 고성과 공자의 주요 유적인 공묘(孔廟, 사당), 공부(孔府, 고택), 공림(孔林, 무덤)이 새롭게 정비되어 원상을 회복했다. 동시에 공묘에 2천여 개의 진귀한 비각이 진열되어 또 하나의 비림(碑林)이 형성되었다.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되었던 문화유적에 대한 보호와 정비가 본격화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