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말의 쌀
五斗米(오두미)
유토피아 무릉도원을 노래한 「도화원기」(桃花源記)라는 불세출의 명작을 남긴 시인 도연명은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간 사람이었다. 자는 원량(元亮)이고 송나라가 들어선 다음 이름을 잠(潛)으로 고쳤다. 집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스스로를 오류선생이라 부르기도 했다. 시상(柴桑, 지금의 강서성 구강) 사람이다. 주(州)의 좨주를 시작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참군을 거쳐 팽택령에 임명되었으나 ‘쌀 다섯 말’(五斗米)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 전원으로 돌아가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살았다.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썼다. 이후 ‘오두미’는 아주 박한 녹봉을 가리키는 단어이자 도연명의 정신을 기리는 대명사 같은 비유가 되었다.
소동파는 “도연명은 벼슬하고 싶으면 벼슬하고, 은퇴하고 싶으면 은퇴했다. 그렇다고 스스로를 고상하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살림이 펴면 닭을 잡고 술을 빚어 손님을 불렀다”는 말로 그의 삶을 요령 있게 표현했다.
『송서』(宋書) 권93 「도잠전」(陶潜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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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 위는 도연명, 아래는 도연명의 시집.
중국사의 오늘 :
1975년 4월 2일
중국의 혁명가이자 공산당 창시자인 동필무(董必武)가 북경에서 죽었다(1885년생, 향년 90세) 동필무는 중화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 등을 지내고 장정(長征)에 참가하였다. 중일전쟁 때 국민참정원으로 중경에서 국공 교섭에 관여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 화북인민정부 주석, 최고인민법원장, 중앙정치국위원, 국가부주석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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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판은 동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