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의 집

   子雲宅(자운택) 또는 子雲居(자운거)

 

자운은 한나라 때의 유명한 학자로 논어를 모방한 법언(法言)이란 저술을 남긴 양웅의 자다. 양웅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다른 집안과 원한 관계 때문에 사천 민산(岷山)으로 이사하였고, 이때부터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게 되었다. 집에 돈도 없고 하다 보니 찾아오는 손님도 없었다. ‘자운의 집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양웅택’(揚雄宅), ‘양자택’(揚子宅), ‘양자거’(揚子居) 등으로도 쓰인다). 집에 먹을 것도 없고 돈도 없어 찾아오는 사람 없는 한적한 집이란 뜻이다. 하지만 양웅은 이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유유자적 시와 문장을 지으며 술과 더불어 즐겁게 살았다. 후대 시와 문장에서는 늘 지식인의 가난한 생활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때로는 촉, 즉 지금의 사천성 지역을 가리키기도 했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가 훌륭하긴 하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정말 오르기 힘든 경지이기도 하다.

 

한서(漢書) 양웅전(揚雄傳)

 

 

 

 

 

중국사의 오늘 :

1291(원 세조 지원 28)

원 세조 쿠빌라이가 수리 전문가 곽수경(郭守敬)에게 남북 대운하의 북단인 통혜하(通惠河) 개착을 명령했다. 이 공사는 만 2년 만인 1293년에 완공되었다. 통혜하는 통주(지금의 북경 통현)에서 대도 적수담(積水潭, 지금의 북경 십찰해)에 이르는 대운하 최북단이다. 대도와 통혜하의 수원을 해결하기 위해 길이 30킬로미터의 백부언(白浮堰)도 축조한 엄청난 수리 공정이었다. 이로써 대도에서 항주까지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의 5대 수계를 연결하는 남북 대운하가 형성되었고, 이로써 남북 경제와 문화의 연계를 강화하는 유일한 수운 교통이 완성되었다.

 

 

* 도판은 〈통혜하조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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