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피에르 크리스탱 지음,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그림, 최정수 옮김 / 마농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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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의 글을 먼저 접한 뒤 그의 생애를 전반으로 볼수 있다. 그래픽 노블을 통해 다시 만나도 좋다. 책의 품질이 좋고, 펀딩하고 오래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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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룸 - 영원한 이방인, 내 아버지의 닫힌 문 앞에서 Philos Feminism 6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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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페트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란 영화를 보았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바뀐 채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마누엘라의 이야기는 내게는 당시 너무 놀라운 이야기였다. ‘다크룸’을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맨 처음 떠올렸던 것도 바로 이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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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스테파니 팔루디는 저자의 아버지이자, 네 번의 이름이 바뀌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개명이 예전보다 쉬워진 시대에 살고 있듯, 이름이 곧 ‘나’를 드러내는 가장 단편적인 ‘정체성’과도 연계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름’을 너머 「내가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게 되면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못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써 내려 가다보면 정말 평범한 한 사람의 삶이 지닌 무게감과 주어진 삶(특히 역사적 순간)을 살아냈었음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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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팔루디(저자)는 국내에서 ‘백래시’라는 작품으로 더 알려져 있는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의 삶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만 해도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살아간 이야기, 그건 어쩌면 작가가 택한 글감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했지만 작년 엘리슨 벡델의 ‘펀홈’을 읽으며 받았던 깊은 인상을 생각하며 이 책 역시 내게 그러한 감동을 줄 것이다 믿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실상 초반에 그녀가 들려주는 ‘스티븐 팔루디’는 가정 폭력으로 인해 이혼을 한 채 한동안 소식이 끊어진 아버지로 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메일을 통해 성전환 수술을 하였음을 알린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헝가리로 찾아와 줄 것을 요청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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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란 단어 앞에서 여자/남자, 아이/어른, 장애/비장애, 백인/흑인, 혹은 아시아계이냐 아니냐, 유대인이냐 아니냐는 이분법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인간’으로서 천부적으로 받은 ‘권리’를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앞서 언급한 모든 생물학적, 사회학적, 지리적, 종교적 구분 속에서 인간은 내가 어디에 속해있느냐에 따라 혹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중․삼중의 차별과 인권침해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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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티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고, 나치 정권하에서 탈출해서 미국에서 살다 결국 헝가리로 돌아갔다. 그 과정을 거꾸로 되짚어 가는 수전(저자)은 이 책에서 단순히 아버지의 삶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한 가운데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이루고 있는 일부를 감출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가 써내려간 이야기를 읽다보면 ‘정체성’이란 하나의 고정된 의미, 비로소 찾아 자리 잡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온 경험들의 복잡성과 모호성(p.493)에 관한 것이기에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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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부분의 글을 보면 더 놀랍기도 하다. 바로 아버지 스테파티가 언급한 이 부분이다. “정체성은 사회가 너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야. 사람들이 인정한 대로 행동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적이 생긴단다. 나는 그렇게 살았어. 그래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야(p.517)”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그게 무슨 정체성인가. 나는 어디에 있고 왜 타인의 시선에 나를 규정짓는단 말인가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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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트랜스젠더로서 살게 된다고 해서 과거의 삶과 이별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선택인가 사회의 요구인가. 왜 그 사람은 그가 살아온 모든 총체적 삶으로서 인정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 책에서는 매우 심도 있게 다룬다. 그녀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면서 이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결국 아버지가 살아온 삶 전체를 들여다보면서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긴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끝내 스테파니 팔루디의 마지막 이야기로 인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책이다. 완독하기까지 쉬운 책은 아니었으나 귀한 책을 읽어 내 사고의 반경이 조금은 넓어진 것에 감사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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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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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동료들을 고통 속에 남겨 놓고 떠나자니, 그 아이들만이 유일한 친구였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거대하고 넓은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는 외로움이 처음으로 마음에 사무치던 순간이었다. p.30

 

잘 가! 하느님이 지켜 주실 거야!” 어린아이의 입에서 나온 이 축복은 올리버가 생전 처음 들어 본 말이었다. 이후로 온갖 고난과 역경, 변화 속에서도 올리버는 이 축복의 말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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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 너무 믿지 말게. 자기 자신이 적이라면 자기 외의 모든 사람을 경계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만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겠지. 쯧쯧! 그러면 안 되는 건데”.p.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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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래에는 희망이 있소. 우리가 당신의 마음에 평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아니오. 그것은 당신이 직접 구할 때만 오는 것이니까”.p.513

 

내가 읽은 찰스 디킨스의 첫 소설이자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은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었다. 첫날 밤늦게 읽기 시작했는데 삽시간에 150여 페이지를 넘어간다. 특히 내가 읽은 이 판본에는 19세기 최고의 삽화가였던 조지 크룩생의 삽화가 24장 수록되어 인물들의 표정, 당시의 복식 등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디킨스의 소설을 좀 더 빨리 접하지 못한 것은 뭔가 난해하고 어려울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는데 적어도 처음만난 그의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책은 19세기 당시 산업혁명을 배경으로 고아 등 아동에 대한 노동(도제 제도), 생활상을 보여준다. 당시로서는 가난, 밑바닥 찌꺼기와 같은 빈민의 삶이란 매우 인기가 없는 소설의 소재였으나 디킨스는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역으로 이 소설에 빛을 발하게 한다. 1600년대 빈민에 대한 국가책임 제도를 첫 선보인 구빈법이 이후 1800년대 들어서면서 신구빈법으로 변화되면서, 이른바 열등처우의 원칙’, 구빈원 내에서는 서서히 죽든가 바깥에서는 빨리죽는(p.33) 이른바 악법의 시대가 시작된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구빈법의 주요 대상이었던 아동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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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는 산업혁명시대 초기 아동들의 장시간 근무, 열악한 생활환경 등 이라는 역사적 발달과정으로 문헌적으로 이해할 만한 일에서 잠시 눈을 감으면 우리를 그 시대속으로 데려가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책 속에서는 고아 농장이라는 곳이 등장하는데 묽은 귀리죽으로 배고픔이 일상화 되어 살아가던 올리버가 9살이 되던 해 장의사 밑으로 도제생활을 시작할 즈음, 그곳 주인의 아내가 개도 거들 떠 보지 않는 썩은 고기 살점을 던져주자 그것을 발라먹던 올리버의 모습을 그대로 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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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시종일관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올리버의 지혜롭고 한결 같은 마음, 매 위기가 닥치는 순간마다 선한 용기를 발하는 모습은, 런던에서 생활하던 중 만난 좀도둑 무리들의 생각, 삶과 대비되면서 무엇인가 교훈적 소설의 풍미를 품기기 보다는 춥고 눅눅하고 쉴 곳 없는 배경 속에서도 악덕이 좀체 잦아들지도 않는 도덕적 교훈의 차원을 너머 우리에게 마음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속삭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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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와 더불어 등장하는 낸시는 어린 시절부터 올리버와 다를 바 없는 삶, 오히려 여자아이가 겪을 수 있는 더 모진 일들을 경험한다. 낸시 역시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을 쳤음에도 결국 자신은 결코 이 세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임을 직감한다. 결국 이 책의 가장 핵심은 아동학대가 일상화 되고 묵인되는 세계로 그들을 지켜줄 사회적 보호체계가 전혀 없었고, 여자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매춘으로, 남자아이들은 소매치기로 전략한 개미굴 같은 세상의 단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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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낸시가 자신을 그 무리속에 잡아둔 사람들을 결코 배신하지 않고 밀고하지 않는 모습은 올리버의 선한 용기(이걸 책에서 디킨스가 매 순간 어찌나 잘 표현했는지.. 나로서는 이렇게 짧은 두 단어로 설명하는 것이 너무 아쉽다)와 더불어 이 책에서 인간이 자신의 동료들에게 해야 할 것과 말아야 할 것의 표상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자신이 이전과 완전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음에도, 배신이라는 행위가 한평생 그녀의 영혼을 어지럽힐 수 있음을 낸시는 아마 알았을까? 아마 그렇게까지 생각을 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배신이라는 행위 자체를 결코 염두해 두지 않은 아이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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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기 때문에 낸시의 마지막 모습은 올리버가 도망 나와 런던으로 가던 길목의 이야기와 더불어 이 이 책에서 내가 받은 가장 큰 충격이었다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매 순간 올리버의 목소리를 들었던것 같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어디선가 미인가 아동시설에서 이런일이 벌어지고 지지 않으리라고 믿기 어렵다. 사회적 약자는 사회가 그들을 약자로 취급하기 이전 원천적으로 힘을 가지기 어려운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 약자를 대상으로 전횡을 일쌈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이를테면 고아 농장 이사회 사람들)이야 말로 결코 용서될 수 없고 심판받아 마땅한 인간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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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된 올리버 트위스트는 600쪽에 달할 정도로 벽돌책에 가깝지만 마음만 먹으면 하루만에 읽을 수 있을정도로 흡입력이 좋은 소설이다. 디킨스의 소설 중 가장 좋았다는 누군가의 평을 듣기도 한 이소설은 적어도 나에게는 오랜만에 사회상을 담은 가장 귀한 소설 중 한 권이었다 할 수 있겠다. 꼭 읽고 싶었던 디킨스의 소설을 이번에 현대지성 클래식으로 만나게 되어 읽게되어 무척 기뻤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시대와 세대를 막론하고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 생각했다. 내가 초등학생 이었다면 이 소설을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읽었을까? 내가 중학생이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에 초점을 두고 있는지.. 그것은 이 소설이 쉬운 말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묘사로 누구에게도 와닿을 수 있게 하는 디킨스 소설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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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디킨스 #두도시이야기 #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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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산들의 꼭대기
츠쯔졘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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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룽산 산꼭대기에 서서 뭇 산들에 눈을 돌려 온통 물든 숲들을 바라보면 산속 모든 나무가 하룻밤 사이에 꽃나무가 되었다고 착각하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서리가 만들어낸 찬란함은 아름다운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그 머리와 꼬리를 얼마 흔들지 못하듯 오래가지 못했다. p.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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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 속 비천한 인물들이 각자 자신만의 상처를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생각하며 견뎌냈다. -작가의 말 중-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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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빠지기 전 마지막 여유를 부리며 선택한 책이 뭇산들의 꼭대기이다. 도서관에 신청한 책이 평소보다 일찍와서 일찍 읽고 반납하자 싶었다. 집과 투명이 상대적으로 중국의 현재를 보여주는 소설이었다면 뭇 산들의 꼭대기는 사회변혁의 시기에 나타나는 여러 사회문제를. 개인에 끌어내려 그 사람들의 삶 속에서 입체적으로 전하는 이야기이다. 등장인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룽산과 겨워강이 흐르는 ‘룽장진’이라는 조용하고 개발이 미치지 못한자연이 보존된 지역을 배경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총 17장의 쳅터를 보다보면,자연스럽게 관점은 각 장속에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인물들에게로 온 마음이 다 이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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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지 않은 이야기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사실 한 인물 인물을 따로 때놓게 이야기를 하라고하면 작가가 들려준 이야기에 나의 상상력을 덧붙여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인물의 등장횟수나 이야기에 할애된 페이지와 상관없이 가장 인상에 남는 인물은 나는 ‘안다잉’과 ‘탕한청’ 정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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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속에는 도축업자, 죽음을 예측하는 비석공예자, 염습사, 그리고 사형장의 네 인물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의례 이들의 직업에서 사람들은피 냄새를 맡고 스치기를 꺼려하지만 그들 나름 자신의 삶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ㅍ사람들과 부대끼는 모습을 작가가 무척 잘 이야기하고 있다. 아래의 인용부분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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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으로 만지다 망자의 얼굴을 아프게 긁지는 않을까,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손을 돌보고 아꼈다.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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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장의 이야기를 듣고 리쑤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안핑의 손은 사람을 총살한 손이긴 하지만 그들의 원하는대로 가게 해주었으니 덕을 쌓은 것이라 했다.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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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실제 인물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사실적이지만 신화적 묘사를 통해 약간은 구비문학같은 느낌도 없지 않다. 작가가 작가의 말에서도 이야기를 하였지만, 사회변혁의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현재에서 과거로 플래시백을 이용해 글을 씀으로써 읽는 독자는 과거와 현재, 인물과 인물이 얽히고 설켜 전체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한 개개인을 통해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들이 상처를 갖고 살아가는 방식, 그것을 고백하는 방식, 그것을 달게 치르는 모습들의 사랑과 질투, 죄책감,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 단박에 그려낸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행간사이의 이야기가 너무 많은 소설인 것이다. 탕메이와 천위안의 이야기만으로도 몇 십장은 더 할애가 될 것 같았고 안쉐얼이 정령과 같은 자연에서 한 아이에게로 삶의 중심이 바뀌는 부분도 단편으로 써내려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단편과 장편은 전달하는 방식도 다 다르지만 이 소설은 그야말로 단편이자 장편이 될 수 있는 소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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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막 태어난 지금 시대를 넘어 뛰어난 대작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는 이정도면 충분했다. 죽음을 묘사하는 장면은 단칼을 휘두르듯 표현이 되고 애둘러 표현하는 부분도 없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나머지 이야기는 내가 그려보게 된다는 것이 소설이 내게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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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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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시간 속에서 산다. 어떻게 보면 공간속에 존재하는 삶이지만 인간은 공간속에 산다는 말보다는 시간속에 산다는 말을 하곤 한다. 시간은 한 인간의 바깥에도 존재하고 내적으로도 존재한다. 그로 인하여 인간은 때로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때로는 영원한 시간속에 존재하기도 한다. 한 인간의 삶은 그의 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작과 끝이 있으나 자연은 스스로 죽어 다시 태어나기도 하고 새로운 존재이나 명명을 이어간다. 이로 인하여 인간과는 다른 상대적 시간을 산다. 
     
낯선 작가를 만났고 낯선 소설을 만났다. 아마도 나 말고도 많은 분들이 유사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제목이 주는 웅장함, 태고의 풍경 이미지 덕분에 이 책의 시작에서부터 반전을 겪었다. 첫 시간을 넘기고 난 뒤 나타난 게노페파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작가가 이야기하는 시대의 시간을 먼저 인지하게 된다. 이 소설에는 무수히 많은 시간이 등장한다. 그것은 신의 시간에서 시작하여 천사의 시간, 사람들, 땅, 나무, 집과 같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시간을 다룬다. 책을 읽다보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의 시간들이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처음에는 읽어나가면서 앞에서 다룬 누군가의 시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작가는 하나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도 혹은 타인과의 전후의 시간으로 존재하는 방식으로 독자로 하여금 흥미로움을 유발하게 한다.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책이 얼마나 재밌게 읽어지는지 이 책을 읽는 동안 함께 읽던 페터 한트케의 소설을 못내 끝까지 못 읽은 것과 비교하면 알 수 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이렇게 돌아가면서 나오는 시간 순서대로 읽고 각각의 시간들을 따로 읽어볼까 하는 맘으로 읽으면 어떻게 읽혀질지 궁금하여 엑셀을 이용해서 그들의 각자의 시간의 흐름을 정리하여 살펴 보았다. 사실 어려운 작가의 이름은 아직 보지 않고는 한 번에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의 흑백사진 속 웃는 모습은 각인이 되어 있다. 무언가 동화작가 같기도 하고 무언가 나만이 발견한 흥미로움을 간직하고 그것을 나누고 싶어 하는 정말 세상의 신비에 경이가 찬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런 그녀가 쓴 소설은 신화적, 환상적인 면이 없는 것도 아님에도 리얼리즘의 요소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시간적 배경의 근간에는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한 1차대전 시작 전 게노페파의 시간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녀의 손녀 아델카의 시간이 되는 1980년의 시간을 다루지만, 인간의 삶을 이야기 하기 위하여 신이 만든 세상, 자연이 존재하는 시간, 인간의 고통과 영원한 꿈을 꾸는 시간, 그리고 현존을 거듭한 이후 얻은 안식과 같은 다양한 시간을 통해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꿈의 시간들을 다루곤 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은 인간의 눈으로 보여진 세상만이 전부가 아닌 땅을 딛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 하늘을 배경삼아 존재하는 천사와 죽은자의 시간 속에서 삶이 끝난 후 삶에 대한 인식을 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살아간 인간의 생을 다룬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서 근간을 이루는 것을 나는 여인들의 삶으로 보았다. 이 소설속에는 삼대에 걸친 이야기가 존재한다. 게노페파와 크워스카의 첫만남은 시작부터 강렬하다. 인간적인 삶과 자연의 삶에 가까운 그녀 두 사람의 삶은 여러면에서 대조가 되지만 게노페파의 시간의 물줄기를 따라가다보면 여인으로서 아이를 임신하고 육체적으로 이끌리는 정인을 만나며 이후 그 사람을 잃은 후 영원히 걸을 수조차 없어져버린 삶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크워스카의 삶은 버려진 아이가 삶의 모든 고초를 겪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게노페파가 육체의 삶을 빌어 이루어나가는 모든 것과 달리 동물과 식물과 함께 살아가며 이 책에서 나쁜인간, 익사자 물까마귀와 같이 가장 신화적인 존재로 드러난다. 그리고 남성으로서 포피엘스키의 등장은 모든 것을 가진 물질에 속한 자이나 그 모든 것의 허무와 비관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 포피엘스키의 시간은 어디서부터 왔느지를 묻는 질문 속에 갇혀 있는 것과 같으나, 한 랍비를 통해 어디로 가야하는 가에 대한 질문을 받은 다음부터는 그만의 시간(게임의 시간)을 찾아 떠나게 된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첫 세대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이들은 이후 세대와의 삶의 배경, 시간이 겹치는 순간까지 함께 하지만 그들의 삶의 큰 물줄기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다.
     
그러나 다음 게노페파의 딸 미시아의 삶, 미시아 남편의 누나인 파푸가 부인의 삶, 크위스카의 딸 루타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그들의 어머니들의 삶의 풍경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간의 주인공은 미시아이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이 책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굴곡과 비교해보면 상대적으로 가장 평탄하게 보이기도 한다. 비록 전쟁을 겪고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기는 하지만 두 여인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전형적인 가사일을 담당하는 여인으로서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남편이나 자식들에게서 조차 함께할 시간이 없었던 파푸카 부인의 시간을 살펴보다면 시간이 얼마나 자비롭지 않은지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루타의 삶은 한마디로 전쟁이 여자와 아이들에게 있어 얼마나 ‘악’에 속하는 영역인지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는 전쟁과 그리고 제대로 되지못한 남편으로 인한 억압된 삶에서 태고의 삶을 떠나 경계 밖으로 나간 유일한 여인이기도 하다. 그어느 누구의 삶보다 루타의 삶이 그리고 병사 쿠르트의 삶을 보다보면 전쟁으로 인한 가장 큰 희생자임을 알게 된다.
     
최근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전쟁과 평화, 적과 흑 등 전쟁이 남긴 많은 이야기에 관련하여 책을 읽었다. 마가렛 미철이 쓰는 전쟁에 관한 역사소설이 주는 의미는 그간의 역사소설들과 좀 다른 면이 있었는데 올카 토카르추크의 소설도 읽다보면 그녀가 죽은자들의 행렬, 이반 무크타의 나 쿠르트의 삶 등을 통해 아주 강렬하게 그 모습을 각인시켜 준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아직 언급하지 않은 이지도르나, 미하우, 파베우 보스키 등의 삶 또한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길게 언급은 하지 않기로 한다. 
     
태고의 시간은 결국 이들의 삶이 하나의 공간속에 모여진 시간이다. 태고는 비록 작가가 설정한 가상의 공간이지만 그곳이 어디즘인지 우리는 읽는 동안  그려낼 수 있다. 그곳이 어디이든 우리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한 가장 중심지의 삶이고 각자 시간의 흐름속에서 자신들만의 의미를 찾기도 하고 선택을 하기도 한다. 가상의 공간일지라도 우리는 폴란드의 어느 마을을 그려낸다. 세계대전의 가장 직접적이고 큰 피해를 겪은 나라이기도 하고, 이후 사회주의 국가로 가는 길목에서 또다른 감시의 세상을 살아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끝의 삶에는 오래전 마을을 떠난 아델타가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결국 마지막에 등장하는 아델타의 삶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그녀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언제나 소중히 간직했던 커피 그라인더는 그녀는 가고 없지만 그녀들이 소유한 그라인더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인간의 삶보다 때로는 더 영속성을 갖는 이 사물을 작가는 우리에게 왜 등장을 시킨 것일까. 왜 작가는 창조를 한 신이 그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에게 외면 당해 파괴하는 순간에 이르기 까지 도대체 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의미가 있는지를 묻는 것만 같다. 나는 그녀가 이 소설에서 많은 등장인물의 삶을 다루면서도 순간순간 등장한 보리수의 시간, 버섯균의 시간 등을 통해서 죽음의 생 까지도 다르고 있음을 보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시간 속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 시간 속에서 물질적 부, 야망을 향한 꿈을 꾸기도 하고, 반대로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고 온 과거의 시간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는 책의 곳곳에 죽음을 배치하였다. 인간에게 죽음 이후의 시간을 작가는 보여줌으로서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는지도 이야기하고, 그런 인간의 시간과 대조되게 자연을 통해 인간이 시간을 소유해야 하는 방식 등을 버섯균을 통해서 이야기해주기도 한다.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시간이기에 우리에게 시간은 삶으로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오지 않은 미래까지. 이책에서 시간에 관하여 어떤 의미를 더 찾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야기를 조합할때마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결국 그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인간 무의식속의 원형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는다. 작가의 다른책도 바로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들도 이번기회를 통해 만나게 되길 희망한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와 생각할 거리를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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