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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룸 - 영원한 이방인, 내 아버지의 닫힌 문 앞에서 ㅣ Philos Feminism 6
수전 팔루디 지음, 손희정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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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페트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란 영화를 보았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바뀐 채 돌아온 남편을 맞이하는 마누엘라의 이야기는 내게는 당시 너무 놀라운 이야기였다. ‘다크룸’을 처음 읽게 되었을 때 맨 처음 떠올렸던 것도 바로 이 영화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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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스테파니 팔루디는 저자의 아버지이자, 네 번의 이름이 바뀌는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개명이 예전보다 쉬워진 시대에 살고 있듯, 이름이 곧 ‘나’를 드러내는 가장 단편적인 ‘정체성’과도 연계된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이름’을 너머 「내가 누구인가」 라는 ‘정체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게 되면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가 못하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써 내려 가다보면 정말 평범한 한 사람의 삶이 지닌 무게감과 주어진 삶(특히 역사적 순간)을 살아냈었음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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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팔루디(저자)는 국내에서 ‘백래시’라는 작품으로 더 알려져 있는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의 삶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만 해도 한 사람이 여러 이름으로 살아간 이야기, 그건 어쩌면 작가가 택한 글감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했지만 작년 엘리슨 벡델의 ‘펀홈’을 읽으며 받았던 깊은 인상을 생각하며 이 책 역시 내게 그러한 감동을 줄 것이다 믿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실상 초반에 그녀가 들려주는 ‘스티븐 팔루디’는 가정 폭력으로 인해 이혼을 한 채 한동안 소식이 끊어진 아버지로 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메일을 통해 성전환 수술을 하였음을 알린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헝가리로 찾아와 줄 것을 요청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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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란 단어 앞에서 여자/남자, 아이/어른, 장애/비장애, 백인/흑인, 혹은 아시아계이냐 아니냐, 유대인이냐 아니냐는 이분법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인간’으로서 천부적으로 받은 ‘권리’를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나 현실은 앞서 언급한 모든 생물학적, 사회학적, 지리적, 종교적 구분 속에서 인간은 내가 어디에 속해있느냐에 따라 혹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중․삼중의 차별과 인권침해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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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티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태인이었고, 나치 정권하에서 탈출해서 미국에서 살다 결국 헝가리로 돌아갔다. 그 과정을 거꾸로 되짚어 가는 수전(저자)은 이 책에서 단순히 아버지의 삶이 아니라 홀로코스트의 한 가운데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을 이루고 있는 일부를 감출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가 써내려간 이야기를 읽다보면 ‘정체성’이란 하나의 고정된 의미, 비로소 찾아 자리 잡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온 경험들의 복잡성과 모호성(p.493)에 관한 것이기에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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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이 깊었던 부분의 글을 보면 더 놀랍기도 하다. 바로 아버지 스테파티가 언급한 이 부분이다. “정체성은 사회가 너를 받아들이는 방식이야. 사람들이 인정한 대로 행동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적이 생긴단다. 나는 그렇게 살았어. 그래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거야(p.517)” 아마도 이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그게 무슨 정체성인가. 나는 어디에 있고 왜 타인의 시선에 나를 규정짓는단 말인가 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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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트랜스젠더로서 살게 된다고 해서 과거의 삶과 이별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신의 선택인가 사회의 요구인가. 왜 그 사람은 그가 살아온 모든 총체적 삶으로서 인정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도 이 책에서는 매우 심도 있게 다룬다. 그녀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면서 이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결국 아버지가 살아온 삶 전체를 들여다보면서 총체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의 긴 시간은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끝내 스테파니 팔루디의 마지막 이야기로 인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책이다. 완독하기까지 쉬운 책은 아니었으나 귀한 책을 읽어 내 사고의 반경이 조금은 넓어진 것에 감사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