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영의 악의 기원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도서제공: 사계절출판사

태초에 뭍으로 기어오른 짐승이 있었다. 이윽고 그것은 땅을 밀어 서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기 시작했다. 따스한 피가 도는 살갗을 맞대고 겁에 질린 밤을 보냈다. 어느샌가 그들 중 누군가가 두 발로 일어서 얼굴을 마주했다. 시선을 숨기지 않는 눈과 매달리지 않고도 능히 오르는 다리, 무른 살갗과 움켜쥐는 손은 다가서고 끌어안으며 심장을 맞대는 존재를 가능케 했다.

우우, 울음이 아닌 '말'을 속삭이기 시작한 순간, 인간은 기만하고 찬양하고 몰두하는 짐승이 되었다. 그렇게 우와 열을 넘어 새로운 선이 그어졌다. 초월이라는 선이. 뛰어넘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그 재목이 정해져있다는 믿음으로 패이고 쌓아올려진, 차원. 어느 작가가 말했듯, 피에 젖은 3키로짜리 스펀지. 무리 안의 짐승, 무리를 만드는 짐승, 무리 위에 서는, 우월한, 짐승. 이 짐승은 입을 열어 말했다. "나".

p.404 루미는 갑자기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너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 그런 이탈이 불안하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차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특별한 감상을 주었다. 경계를 뛰어넘은 초월자가 된 것처럼.

p.832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는 굴욕적인 모습을 한대도 비웃음을 살 일은 없었다. 앞에서 미약한 빛이 느껴졌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터널이 끝나 가려 하고 있었다. (…) 그런데 그 때 맞은편 검은 차창 위로 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무릎을 꿇지도, 두 손을 비비지도 않는… 똑바로 선 인간.


인간이 너와 나를 구분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이는 시원에서 갈라지는 고통을 내포한 생태에 기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끔찍한 단절, 절대적인 공포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둘 뿐이다. '태어남' 이전에서 벗어나지 않기, 혹은 모든 것을 '자기'로 끌어들여 하나가 되기.

전자는 절대적인 신뢰와 순수로 불변의 안락함을 얻을 수 있고, 후자는 수없이 맞닥뜨리는 '다름'을 매끄럽게 묵살하는 포식이다. 이 둘은 일견 다양한 형태와 언어로 드러나면서도 변화를 거부하고 절대적인 신뢰에 순응하려는, 그렇게 책임과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라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며 반복되었다. 질서, 권력, 창조, 안정, 진화, 문명, 순수, 정화, 나.

p.213 세상을 바꾸는 일? 루미야, 그건 어린아이들이 꾸는 하룻밤의 몽상일 뿐이란다. 갖고 놀던 장난감이 지루해 발로 부수어서 재조립하는 것과 비슷하지. 아이들은 잠깐씩 그래도 돼. 어차피 금방 꿈에서 깰 테니. 하지만 나이를 먹고도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 이 있다면, 주의하고 경계해야 한단다. 이 완벽한 세상을 바꾸려 한다면 그건 용서할 수 없는 반란이고 폭동이…

p.322 다윈은 자신을 둘러싸고 흐르는 기류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의 교복에 얼마나 선망의 눈길을 보내는지, 자신의 존재에서 얼마나 깊은 열등감을 느끼는지 조금도 인식하지 못했다. 저렇게 많은 걸 가진 인간이 어떻게 자기 스스로에게 저렇게까지 무감각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의 전개가 퍽 분명함에도 읽는 이를 거듭 혼란에 빠트리는 것은, 어쩌면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와 독자가 꼭 닮아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800여쪽의 이야기가 정결과 부정, 흑과 백, 순수와 혼란, 인간과 짐승을 가르고 접붙이기를 반복하는 동안 독자는 판단하고, 한 편에 서며, 가려내다 결국 한 지점에 갇혀 헤매지 않을 수 없다. 그를 이렇게 부르고, 아니, 시뻘건 오물처럼 퍼붓고 싶다. 오만, 오만, 오만!

과거를 말끔히 지워버리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오만. 죄와 벌, 선과 순수가 매끄럽게 나뉜다는 착각, 그를 완벽하게 판가름힐 수 있다는 오만. 태생부터 무결한 '시조'가 될 수 있다는 오만. 결코 뒤바뀔 수 없는 우열이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오만. 순수한 빛이 투명한 유리같은 존재를 곧게 뚫고 환히 비추리라는 오만. 완벽이 존재한다는, 혹은, 완벽 너머의 초월에 순종하고 나아가 그 자신이 되리라는 오만. 나와 타자를 완벽히 규정할 수 있다는, 오만.

p.153 "그게 정말 잘못이었는지, 아니면 상위 지구만을 제외한 모두의 바람이었는지를 따져 봐야 했는데, 애석하게도 그럴 기회조차 갖지 못했지. 처벌의 순간이 오자 모두 뒤로 물러나서 9지구를 지목했으니까. 결국엔 보기 좋게 9지구만 죄의 땅이 돼 버렸지." 루미가 남자를 신경 쓰는 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관용이라고 하잖아요. 주도 인물들이 아닌 이상 국가 발전을 위해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주는…"

p.445 "그 사람들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단다. 애초에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으니까. (…) 넌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라고 했지만, 악마적인 면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야. 아무리 똑같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어도 그런 사고 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구나."


이 오만의 연대기는 멈출 곳을 찾지 못한 채 질주한다. 역설적으로, 그 모든 과정은 '성장'을 표방하는 동시에 그것을 대가로 치른다. 무비판적인 순진은 무비판적인 신뢰에 기인한다. 그것은 그 대상을 옮겨가거나, 복제하고 이식할 뿐 '다름'의 존재를 부인한다. '나'의 '바깥'을 부인함으로서 변화, 이동, 변/태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한다. 순수로의 질주는 원형의, 시원적인 순진을 필요로 한다. 이 얼마나 정결하고 매끄러운 퇴보란 말인가.

그리하여 이 긴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의 아들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성장기이자 핏줄로 이어져온 칼자루를 거머쥐는 결단이나, 그 아래에는 진화에 대한 통념 향한 지독한 조소라 할 수 있겠다. 어린양에서 두발로 선 존재로, 무리 없이 살 수 없는 짐승에서 "무릎을 꿇지도, 두 손을 비비지도 않는… 똑바로 선 인간"으로 진일보한다는, 완벽을 향한 직진이라는 순진한 믿음. 그렇게 무결의 존재, 바깥을 잃고 무리 위에 서는 우월한 짐승은 입을 열어 말한다. 나, 오직 나.

p.179 "하지만 애초에 더 나은 세계가 되느냐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 (…) 바퀴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 나쁘게 변한 세계보다 사람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건 사슬에 묶여서 꼼짝하지 않는 바퀴니까. 아무것도 변하는 것 없이 모든 게 제자리에만 멈춰 있다면 인간은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

p.470 그러나 웃고 있는 제이의 사진이 놓인 제단에 다윈을 안고 선 순간, 나는 왜 내가 다원을 제이 앞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다윈은 한 마리의 양이었다. 내가 저지른 죄를 속죄하기 위해 제물로 바치는 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 - 갈등, 변절, 내로남불의 시대를 이해하는 도덕심리학
오둔 달 지음, 배동근 옮김 / 북트리거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도서제공: 북트리거

인간이 '짐승과 인간'을 구분하게 되면서, 인간이 '금수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해 뒤엉키는 꼴을 보며, 배반과 대립과 회유의 경험, 정치적 갈등과 수사의 고도화로 인헤 그 필요성을 절감함에 따라, 소위 '도덕성'이라는 것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끝없이 이어져왔다.

무엇이 '선과 악'인지, 도덕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고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최소한 합의된 정의에 이를만큼의 규명이 가능할런지,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아니면 인간 본성에 기본으로 탑재된 것인지,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인지 없던 게 생겨나는 일인지, 수도 없이 묻고 공방해온 역사가 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전방위적 물음 또한 켜켜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다.

p.37 도덕성을 정의 내린다고 어떤 도덕적• 경험적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 도덕성을 정의 내린다고 해서 무엇이 옳거나 그른지 혹은 좋거나 나쁜지, 또는 사람들이 무엇을 옳고 그름,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는지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 정의는 우리가 도덕성과 도덕적 변화를 연구할 때 기준을 잡아 줄 뿐이다.

p.55 변덕은 우리가 도덕성에 기대하는 일관성을 위배한다. 도덕에 일관성을 기대하는 까닭은 그것이 보편적이고 가역적이며 편파적이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황금률과 정언명령의 척도이다. 우리의 도덕관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한지 혹은 불리한지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저질렀든, 당신이 나에게 저질렀든 혹은 p가 r에게 그랬든 잘못은 잘못이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변덕스러운 도덕 감각을 마주할 때 느끼는 실망은 결국 일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융통성 있으면서도 일관적이나 너는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자명한 선을 무시하는가? 왜 나는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 '옳음'을 지향하나 너의 그것은 변덕과 맹신에 기반하는가? 왜 '그 때 그 사람들'은 이토록 자명한 선을 두고 불보듯 뻔한 악에 동조하고, 매달렸는가? 인간의 본성에 '선'이, 이타심과 공존을 가능케하는 어떤 부분이 내재되어 있는가? 아니면 정말 '악하게' 태어나 '선'을 학습하며 자라나는가?

그렇다면, 똑같이 배우고 자란 '그들'에겐 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저 모양이란 말인가? 여전히 도덕성이 인간의 생존을 담보하지는 못해도 강력한 지지력 중 하나임을 말할 수 있는가? 쉽게 풀기 어려운 문제다. 나부터도 '선'이라는 개념 자체와 성질로서의 '선함', 암묵적이거나 성문화된 '사회 규칙'과 '도덕'과 '도덕성'을 마구 섞어 쓰고 있으니 그 용어와 각각의 영역의 분리부터 모호한데다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각자가 상대를 악마화하고, 혹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마당에 제삼자적 분석이 용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p.80 한 가지 질문은 두 사람이 어떤 행동이 해롭고 도덕을 위반하는지 아닌지를 놓고 의견 차이를 보이는가이다. 틀림없이 어떤 이에게는 해로워 보였던 행동이 또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아 보일 수 있다. (…) 도덕심리학 논의를 할 때, 결정적인 질문은 어떤 행위가 진실로 해롭냐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이 해로울 가능성이 있다고 인식하느냐이다.

p.207 도덕심리학이 던지는 질문은 왜 교육자, 연구자, 학생들이 특정 상황에서 부정행위나 권위에 대한 복종 문제를 놓고 의견이 달라지는가 하는 점이다. 실험을 통해 입증해야 할 질문은 도덕적 판단이 행동을 이끄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끄는가이다. (…)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강력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힘이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무력해질 것이며, 우리는 그런 존재를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인간이라고 여기기 어려울 것이다.


이 난감한 영역에 발들이는 학문이 바로 도덕심리학이다. 저자는 무엇이 옳은지, 왜 옳게 '되는지'가 아닌 사람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도덕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혹은 '느끼는'지를 연구와 현실의 사례를 통해 도덕심리학의 관점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아울러 종장에 나아가서는 이것이 연구 데이터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동시에 독자를 이 흥미로운 영역에 초대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언동이 버젓이 울려퍼지고 있다. 이에 혹자는 이해를 말하고 한편에서는 화합을 말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그조차도 찍어 눌러 말살하려 세를 불린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는 동안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한 생각은, 이런 현실을 두고 근원적인 해결책에 앞서 당장 뭘 할 수 있는지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 그대로의 '현실'일 것이다.

p.251 미디어, 대화, 또는 교육을 통해 받아들인 세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서로 다른 믿음과, 그 믿음이 만들어 내는 서로 다른 판단의 연결 고리들은 두드러진 정치적 견해 차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런 차이는 어떤 사람들의 도덕적 관점이 변덕스럽다거나, 혹은 모든 사람이 이기주의, 편협한 지역주의, 비합리적인 충동 따위에 지배되는 변덕스러운 도덕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두 집단 사이의 이런 균열은 공정성에 대한 관심사와 각자 인식한 빈부 격차의 원인 사이에 서로 다른 연결 고리를 채택할 이유를 발견하면서 초래된다.

p.286 상황에 따른 도덕적 변화는 어떤 사람이 같은 행동을 상황에 따라 도덕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기도 하고 그르다고 판단하기도 하는 이유를 물을 때 우리가 다루게 되는 문제다. 상황적 변화는 발달적 변화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하다. (…) 다행히도 아이들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고 자라지는 않는다. 개개인의 평생에 걸친 도덕적 변화는 이미 변화를 겪었고 여전히 겪고 있는 공동체와 문화 속에 깃들어 있다. 어디에나 숨어 있다.



미래 혹은 어딘가의 '당사자들'에게 나 또한 분명 타협과 변덕을 일삼고 악에 동조한 '그름' 중 하나이다. '현장' 밖의 소시민 중 하나이고, 내가 경험하는 현실은 화면 너머의 언설과 이따금의 시위, 일상적인 진저리에 불과하다. 마침표로 질주하지 않고 물음표와 쉼표를 나누는 사회란 정말 가능한 일일까.

좌절 대신 저자와 함께 다시금 믿어보려 한다.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세계와 미래를. 그러니 더 생각해볼 수 있다고, 이해와 대화를, 지지와 변화를 꿈꿔볼 여지가 남아있다고 믿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이다. 책에서 거듭 말해지듯 우리는 변덕스럽지만 그렇지 않다, 라는 말처럼.

p.361 도덕심리학을 정확하게 적용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이 실제로 품고 있는 도덕적 관심사들, 연결, 조정과 변화의 근거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p.362 이면에 숨겨진 도덕심리학을 알게 되면 우리의 판단은 더 온건해질까? 때로는 그렇다가도 때로는 더 가혹해지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배우게 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오직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사례를 판단받을 시간이 왔을 때, 우리의 심판자들이 자신들의 도덕심리학적 성찰의 순간을 충분히 오래 이어 가며 우리가 택한 변화의 이유들이 그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잃기일지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4
이선진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은행잎4기 #은행잎서재 #이선진 #잃기일지 #시리즈n

*서평도서제공: 은행나무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언제일지 중요할 리가 없다. 똑, 떼내어 샅샅이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싹 뜯어내 납작 펴박아놓고 보니 견딜만한 듯도 싶었다. 그렇게 '나'를 뛰쳐나가 '진진주'가 된 이 사람의 마음을 구하시오. 구해주시오…

진진주는 진진주를 바라본다. 진진주는 진진주를 생각한다. '내'가 없으니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다. 진진주의 세계는 진진주의 사전 발치를 배회한다. 진진주는 가진 적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 그렇게 '나'는 진진주의 이 빤빤한 세계를 가볍게 찌그러트리는 존재가 있으니, 다섯살 조카 되시겠다.

p.21 진진주는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무한궤도에 갇혀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적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는 말을 현 상황에 적용해보자면, 진진주가 속속들이 알아야 할 적은 무한궤도였다. 그건 진진주의 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진주가 스스로의 아군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p.39 이렇듯 세상이 저 맘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마다 진진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아니라 진진주다. 내가 아니라 진진주다, 나는! 그리하여 이 글의 어떤 문장도 '나는'으로 시작될 수 없는 거였다. 세상은 언제나 요지경,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쉽지 단 한 번도 내 맘대로 뒤집어지지 않았으니까.


진진주씨의 애매하게 구차한 세계를 감싸는 방벽은 애매하게 단단한 방벽이고, 이는 애매한 사전 어드메를 유령처럼 맴돌고 있다. 진진주는 아프다. '내'가 아니라 시간이 아프고, 빗금치고 지워진 자리 아래 파묻어둔 말을 이따금 떠올린다. 진진주는 무너지지 않는다. 만취 상태로 진상을 좀, 많이, 부리긴 하지만. 진진주는 애매하게 해냈으므로. 뭐든간에. 모르긴 몰라도. 아무튼.

이야기는 내도록 소란하다. 구질구질하고 뒤죽박죽-한다. 그 익살 너머에 어떤 얼굴이 있을까. 고개를 쪽 빼고 들여다보았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보았다. 너 뭐야, 말끝이 발끝에 가 붙은 물음에 나, 나, 나, 하고 더듬는 듯, 춤추는 듯 흔들리는 답이 돌아왔다. 바라보았다, 빤히,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제서야 깨달았다. 얼굴인 줄 알았던 '면'이 '말'이었음을. 몇 겹이고 중첩되어 울려오는, 낯설지 않은.

p.109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은 곧 내가 생각하는 것이자 내가 느끼는 것이자 내가 읽는 것이자 내가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것들의 총합이거나 총합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이었다. 다만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읽고,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 건지 좀처럼 알지 못했다.

p.122 내가 내 이름을 입에 담던 그 순간, 나는 오래전 나도 모르는 사이 출발한 어떤 단어가 비로소 내게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이윽고 공복처럼 텅 비어 있음에도 아스라이 반짝이는 허공의 귀퉁이에 이렇게 썼다. I am what I love.


'진진주'가 그 혼란스럽고 정신사나운 시간 바깥으로 걸어나올 때까지 누가 기다려주었느냐 묻고 싶었다. 낯선 균열 앞에 설 수 있게, 누가 당신 곁에 소음이 아닌 이름으로 머물렀느냐고. 부르고, 열고, 땀에 젖은 얼굴로 마주하라. 이는 밖으로 나오라고, 나가지 말고 나와, 나와 함께-이자는 요청이다. 기꺼이 혼란-하고 흔들리자는 초대다.

진진주의 사전에는 사랑이 없었다. 사랑이 있기 전까지는. 사랑을 잃기 전까지는. 잃은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잃음'의 흔적 '나'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게 하므로. 균열하고, 흔들리고, 나날이 구질구질한 나날에, 삼킨 말들의 사전에, 새카만 덧칠에 되비치는 얼굴에, '진진주'를 나서는 '나'에게 말하고 싶다. 진진주 아닌 '내'가 찾아낼 말을. We are what we lose.

p.196 "얼른 밖으로 나와." 먼저 문밖 복도로 나선 펄이 나를 부르는 소리. 아니, 어쩌면 펄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부르는 소리. … 그렇다면 그때 나는 어느 쪽으로 나가야 했을까? 시간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내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아님 내 안의 시간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p.222 이윽고 우리를 향해 걸어오던 두 사람이 순간적으로 우리와 나란해졌을 때, 이제껏 내 사전에 없던 눈 한 송이가 비로소 내 침묵 위에 내려앉았을 때, 이석기가 춥고 휑한 제 손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요. 아직 시간 많아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비상구는 왼쪽에 - 『자본』의 세계사와 마르크스 없는 한국사회
강신준 지음 / 사계절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 리뷰는 사계절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죽었다! 하나의 유령이 요참난 한반도를 떠돌던 때, 한참 전부터.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죽었다. 죽고 있다. 침묵당한다. 그 죽음은 언제나 과거의 유산이었고, 현재의 공포였으며, 도래할 환상이었다. 너나할 것 없이 우경화 사회를 말하는 시대다. 청년도, 중장년도, 매스컴도, 일터도. '극우'라는 이름을 자랑스러워하는 한편 낙인이라 말한다. 우려와 분노와 절망과 염세가 뒤엉켜 구른다.

그럼에도, 의문한 적 없는가? 역사의 승리며 '인간 본성'까지 끌어붙인 자본주의를 위시한 사회는 왜 아직까지 고통스러운가? 어째서 실패와 붕괴로 누더기 땜질하듯 이어가야 하는가? 공산주의라는 '타락'은 무슨 이유로 상상의 여지 없이 부정되고, 영원한 위협이자 필연히 패망한 과거이기를 끝없이 요구받는가? 미래는 자본주의, 더해진 자본주의, 완전한 자본주의와 함께 침몰해야 할 운명인가? 아무도 이 '밖'에 살아갈 수 없을까?

p.77 자본주의의 교환은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 이들의 관계는 교환이라는 구조에서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방적입니다.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하지 않는 사람, 판매만 하는 사람과 구매만 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대립적이고 배타적이며 적대적입니다. 노동빈곤은 이 구조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p.108 공동소유를 강화하려면 관계가 평등해야 합니다. (...)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까요?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먹고살 수 없게 됩니다. 먹고사는 일에 필요한 부, 즉 노동시간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이제는 자신이 직접 노동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사라지고 노동하는 사람만 남습니다.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는' 관계로 바뀝니다.


한국은 물리적 기반이 얕은 국가다. 사람에 의존하여, 아니, 인간 '자원'을 쥐어짜가며 연명해온 역사다. 바닥까지 싹 털려먹힌 식민지배에 짧고 혼란한 해방 정국, 전쟁과 파산까지 줄지어 겪었으니 사람도 사회도 단위가 짧고 규모가 작다. 우당탕과 엎치락뒤치락의 대명사가 아닐 수 없다. 대다수가 노동자인데도 노동운동과 노동자 혐오가 극에 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몹시 자연스러운 동시에 순전한 인위의 결과다. 다름을 상상할 수 없이 파멸과 공포 사이에 갇혀 진동한다. 와해되어 간신히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저자는 작금의 '극우 득세'에 짧고 굵은 지적을 던진다. 마르크스가 없는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폭주하고 사회는 길과 목표를 모두 잃었다고. 그 결과 이 지경이, 와해와 갈등으로 점철된 지경이 됐다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 정말로 와버렸고 여전히 변혁의 움직임이 꿈틀댄다. 선택하라. 일어서라. 노이로제와 무한동력처럼 끌어다 쓴 '마르크스 죽이기' 너머에 문이 있다. 비상구는 왼쪽에 있고 우리는 너무 오래 막다른 길에 매달려왔다. 갈 길이,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p.187 한국 자본주의는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수출 대자본과 억압적으로 수탈당하는 저임금 노동이 결합한 기형적 케인스주의로 편성되었습니다. (…) 한국의 케인스주의는 부족한 부분을 모두 수출로 메우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이 구조에서 자본주의의 야만적 속성을 비판하는 마르크스는 눈엣가시가 됩니다. 매판 세력이 만들어놓은 마르크스 없는 사회가 계속 유지되어야 하니까요.

p.221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제도는 개인이 사망한 다음에도 이어집니다. 그 사람의 후손들이 거기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그래서 제도를 변혁하려면 그 제도를 변혁할 사람이 계속 필요합니다. 야만에 갇힌 한국사회가 문명으로 탈출할 방법은 하나입니다. 마르크스의 유산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닭뼈와 플라스틱 - 범람의 시대에 사라지지 않는 것
남종영 지음 / 북트리거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평도서제공: 북트리거

심심찮게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쯤은 우스개 반, 자포자기 반으로 내뱉은 적도 있을 것이다. 인류 멸종이 진정한 친환경이다. 인구 과잉 시대다, 인간 개체를 줄여야 한다. 동시에 동시에 지금의 일상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해외여행, 때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시장에 나오기도 전에 재고로 처박혀 쓰레기장으로 직행하는 옷이며 '소품'들. 경계를 넘는 사람과 물건, '자본', 대란템, 쟁여템.

'기후위기' 논쟁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 되고도 남은 지금, 위기는 재앙이 되었고, 절멸로의 직통열차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도 몇 남지 않았다. 혹자는 말한다. 기술 개발을 열심히 해서 대응하면 되지 않을까? 또다른 누군가는 말한다. 우리 모두가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니 이 꼴이 났다고, 불편한 삶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고.

p.6 우리는 '범람'과 '은폐'의 시대를 산다. 그 어느 시대보다 치킨을 많이 먹지만, 정작 살아 있는 닭은 보이지 않고, 그 역사도 기억하지 않는다. 가장 값싸게 소비되어 변덕과 싫증으로 버림받은 플라스틱은 땅에 묻히고 잘게 쪼개져 바다에 은폐된다. 지구는 닭뼈와 플라스틱이 범람하는 행성이 되었다. 인류 활동은 지구의 물리, 화학, 생물학 시스템을 교란하여, 지금 지구는 1만 1만 1,700년 전부터 지속된 지질시대 '홀로세'의 평형에서 이탈해 새로운 지질시대를 맞고 있다. 인간이 창조한 지질시대, 인류세다.

p.43 지구를 착취하며 이득을 취한 이들은 인류세라는 용어를 통해 과거를 지우고 기술에 기댄 '새로운 시작'을 강조하려 한다. 반면, 선진국과 거대 자본의 욕심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인류세가 이들의 과거 책임을 망각하게 하는 '탈도덕적인 효과'가 있다면서, 지배 계층에 강력하게 경고하는 개념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 "그렇다면, 이 파괴적인 시대는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가?"


고귀한 야만의 신화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환경파괴와 그로 인한 전지구적 붕괴는 현대인이 '자연 생태계'에서 쏙 빠져나와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현대의 전세계적 경제와 착취 네트워크가 인간이 감당 가능한 선을 아득히 초월해버렸다는 데에 있다. 싸고 빠르게 찍어내고 재빨리 치우고 묻어버린다. 애써 찾아낸 해결책을 외면하고 시시각각 밀려들어오는 위협을 임시방편으로 틀어막는다. 자본이 눈앞의 멸망을 막아주리라, 자본자본, 주문을 외치며.

그러므로 뭘 해보기도 전에, 이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문제라고? 작금의 현실은 모두의 책임이라고? 누가 '우리'인가? 내 집 쓰레기를 돈 주고 떠맡긴 집에서 냄새가 난다고 떠맡은 쪽에도 공동책임을 요구할 것인가? 모두의 책임은 역설적으로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게 된다. 본문에서 거듭 등장하는 '인류세'에 대한 비판의 일면에는 이런 지적이 있을 것이다. 모두의 책임인 동시에 모두가 같은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

p.61 자연만이 아니다. 에너지, 노동, 식량, 돌봄, 돈, 생명 등 일곱 가지가 '저렴해지는' 매커니즘이 자본세에 있다. (...) 플랜테이션 사업을 확장시킨 신용과 부채 매커니즘 속에서 돈도 흔해졌다. 무한히 팽창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화폐도 싸구려다. 생명도 싸구려가 됐다. (...) 무어는 저렴함이라는 무기가 플랜테이션, 나아가 자본주의가 확장하는 전략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동식물은 물론,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가능한 적은 비용으로 동원하고 있다.

p.218 인간의 번영은 지구의 번영에 의존한다. 행성적 경계를 침범해 지구 시스템이 망가지면, 인간은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행복할 수 없다. 반대로 사회적 기초를 충족 못 하는 삶도 불행하긴 마찬가지다. (...) 자원을 개발하고 재화를 생산하지만, 생태적 한계는 넘지 않아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기초를 충족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개발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직면해야 한다. 돌아갈 낙원은 애시당초 존재한 적 없었고 '전환점'은 지나친 지 오래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단 한 순간도 무구한 적 없었다는 것을. 그 앞에서 불편과 불행은 달콤한 환상처럼 달성 과제 따위가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죄를 빌고 용서만 받으면 마법처럼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유일한 세계를 죄 파먹다 이 지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총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의 말처럼 "다섯 번째 멸종의 최대 수혜자"였던 인류는 "지금은 대멸종 사태 최대의 가해자가 되었다(133)". 유례없는 이 재앙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함께 살지 않으면 몽땅 끝장이라는 현실 앞에서 '정해진 답'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쉽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오직 그뿐이다. 창백한 푸른 점에 살아가는 찰나의 생물. 어렵고 낯설어질 수밖에. 우리가 정말 '우리'이기 위하여.

p.273 어떻게 하면 '인류'를 경험할 수 있을까? 사물의 의회를 통해 비인간과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될 때, '나'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류로서 나는 어떻게 지구에 대해 책임지고, 기여할 것인지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허공에 뜬 개념에서 벗어나, 비로소 발 디딘 현실의 땅 위로 착륙한다.

p.284 탄소 배출량 장부의 숫자를 '0'으로 맞추더라도, 누군가의 희생을 쥐어짜는 삶이 계속된다면, 그곳은 우리가 원하는 미래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한 탄소의 균형을 넘어, 이 행성에 동승한 가난한 사람들과 뭇 생명들과 맺는 '관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