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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는 왼쪽에 - 『자본』의 세계사와 마르크스 없는 한국사회
강신준 지음 / 사계절 / 2026년 9월
평점 :
*본 리뷰는 사계절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죽었다! 하나의 유령이 요참난 한반도를 떠돌던 때, 한참 전부터.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죽었다. 죽고 있다. 침묵당한다. 그 죽음은 언제나 과거의 유산이었고, 현재의 공포였으며, 도래할 환상이었다. 너나할 것 없이 우경화 사회를 말하는 시대다. 청년도, 중장년도, 매스컴도, 일터도. '극우'라는 이름을 자랑스러워하는 한편 낙인이라 말한다. 우려와 분노와 절망과 염세가 뒤엉켜 구른다.
그럼에도, 의문한 적 없는가? 역사의 승리며 '인간 본성'까지 끌어붙인 자본주의를 위시한 사회는 왜 아직까지 고통스러운가? 어째서 실패와 붕괴로 누더기 땜질하듯 이어가야 하는가? 공산주의라는 '타락'은 무슨 이유로 상상의 여지 없이 부정되고, 영원한 위협이자 필연히 패망한 과거이기를 끝없이 요구받는가? 미래는 자본주의, 더해진 자본주의, 완전한 자본주의와 함께 침몰해야 할 운명인가? 아무도 이 '밖'에 살아갈 수 없을까?
p.77 자본주의의 교환은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 이들의 관계는 교환이라는 구조에서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방적입니다.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하지 않는 사람, 판매만 하는 사람과 구매만 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대립적이고 배타적이며 적대적입니다. 노동빈곤은 이 구조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p.108 공동소유를 강화하려면 관계가 평등해야 합니다. (...)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까요?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먹고살 수 없게 됩니다. 먹고사는 일에 필요한 부, 즉 노동시간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이제는 자신이 직접 노동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사라지고 노동하는 사람만 남습니다.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는' 관계로 바뀝니다.
한국은 물리적 기반이 얕은 국가다. 사람에 의존하여, 아니, 인간 '자원'을 쥐어짜가며 연명해온 역사다. 바닥까지 싹 털려먹힌 식민지배에 짧고 혼란한 해방 정국, 전쟁과 파산까지 줄지어 겪었으니 사람도 사회도 단위가 짧고 규모가 작다. 우당탕과 엎치락뒤치락의 대명사가 아닐 수 없다. 대다수가 노동자인데도 노동운동과 노동자 혐오가 극에 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몹시 자연스러운 동시에 순전한 인위의 결과다. 다름을 상상할 수 없이 파멸과 공포 사이에 갇혀 진동한다. 와해되어 간신히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저자는 작금의 '극우 득세'에 짧고 굵은 지적을 던진다. 마르크스가 없는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폭주하고 사회는 길과 목표를 모두 잃었다고. 그 결과 이 지경이, 와해와 갈등으로 점철된 지경이 됐다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 정말로 와버렸고 여전히 변혁의 움직임이 꿈틀댄다. 선택하라. 일어서라. 노이로제와 무한동력처럼 끌어다 쓴 '마르크스 죽이기' 너머에 문이 있다. 비상구는 왼쪽에 있고 우리는 너무 오래 막다른 길에 매달려왔다. 갈 길이,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p.187 한국 자본주의는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수출 대자본과 억압적으로 수탈당하는 저임금 노동이 결합한 기형적 케인스주의로 편성되었습니다. (…) 한국의 케인스주의는 부족한 부분을 모두 수출로 메우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이 구조에서 자본주의의 야만적 속성을 비판하는 마르크스는 눈엣가시가 됩니다. 매판 세력이 만들어놓은 마르크스 없는 사회가 계속 유지되어야 하니까요.
p.221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제도는 개인이 사망한 다음에도 이어집니다. 그 사람의 후손들이 거기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그래서 제도를 변혁하려면 그 제도를 변혁할 사람이 계속 필요합니다. 야만에 갇힌 한국사회가 문명으로 탈출할 방법은 하나입니다. 마르크스의 유산을 수용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