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기일지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4
이선진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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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은행나무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언제일지 중요할 리가 없다. 똑, 떼내어 샅샅이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싹 뜯어내 납작 펴박아놓고 보니 견딜만한 듯도 싶었다. 그렇게 '나'를 뛰쳐나가 '진진주'가 된 이 사람의 마음을 구하시오. 구해주시오…

진진주는 진진주를 바라본다. 진진주는 진진주를 생각한다. '내'가 없으니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다. 진진주의 세계는 진진주의 사전 발치를 배회한다. 진진주는 가진 적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 그렇게 '나'는 진진주의 이 빤빤한 세계를 가볍게 찌그러트리는 존재가 있으니, 다섯살 조카 되시겠다.

p.21 진진주는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무한궤도에 갇혀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적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는 말을 현 상황에 적용해보자면, 진진주가 속속들이 알아야 할 적은 무한궤도였다. 그건 진진주의 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진주가 스스로의 아군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p.39 이렇듯 세상이 저 맘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마다 진진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아니라 진진주다. 내가 아니라 진진주다, 나는! 그리하여 이 글의 어떤 문장도 '나는'으로 시작될 수 없는 거였다. 세상은 언제나 요지경,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쉽지 단 한 번도 내 맘대로 뒤집어지지 않았으니까.


진진주씨의 애매하게 구차한 세계를 감싸는 방벽은 애매하게 단단한 방벽이고, 이는 애매한 사전 어드메를 유령처럼 맴돌고 있다. 진진주는 아프다. '내'가 아니라 시간이 아프고, 빗금치고 지워진 자리 아래 파묻어둔 말을 이따금 떠올린다. 진진주는 무너지지 않는다. 만취 상태로 진상을 좀, 많이, 부리긴 하지만. 진진주는 애매하게 해냈으므로. 뭐든간에. 모르긴 몰라도. 아무튼.

이야기는 내도록 소란하다. 구질구질하고 뒤죽박죽-한다. 그 익살 너머에 어떤 얼굴이 있을까. 고개를 쪽 빼고 들여다보았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보았다. 너 뭐야, 말끝이 발끝에 가 붙은 물음에 나, 나, 나, 하고 더듬는 듯, 춤추는 듯 흔들리는 답이 돌아왔다. 바라보았다, 빤히,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제서야 깨달았다. 얼굴인 줄 알았던 '면'이 '말'이었음을. 몇 겹이고 중첩되어 울려오는, 낯설지 않은.

p.109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은 곧 내가 생각하는 것이자 내가 느끼는 것이자 내가 읽는 것이자 내가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것들의 총합이거나 총합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이었다. 다만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읽고,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 건지 좀처럼 알지 못했다.

p.122 내가 내 이름을 입에 담던 그 순간, 나는 오래전 나도 모르는 사이 출발한 어떤 단어가 비로소 내게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이윽고 공복처럼 텅 비어 있음에도 아스라이 반짝이는 허공의 귀퉁이에 이렇게 썼다. I am what I love.


'진진주'가 그 혼란스럽고 정신사나운 시간 바깥으로 걸어나올 때까지 누가 기다려주었느냐 묻고 싶었다. 낯선 균열 앞에 설 수 있게, 누가 당신 곁에 소음이 아닌 이름으로 머물렀느냐고. 부르고, 열고, 땀에 젖은 얼굴로 마주하라. 이는 밖으로 나오라고, 나가지 말고 나와, 나와 함께-이자는 요청이다. 기꺼이 혼란-하고 흔들리자는 초대다.

진진주의 사전에는 사랑이 없었다. 사랑이 있기 전까지는. 사랑을 잃기 전까지는. 잃은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잃음'의 흔적 '나'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게 하므로. 균열하고, 흔들리고, 나날이 구질구질한 나날에, 삼킨 말들의 사전에, 새카만 덧칠에 되비치는 얼굴에, '진진주'를 나서는 '나'에게 말하고 싶다. 진진주 아닌 '내'가 찾아낼 말을. We are what we lose.

p.196 "얼른 밖으로 나와." 먼저 문밖 복도로 나선 펄이 나를 부르는 소리. 아니, 어쩌면 펄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부르는 소리. … 그렇다면 그때 나는 어느 쪽으로 나가야 했을까? 시간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내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아님 내 안의 시간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p.222 이윽고 우리를 향해 걸어오던 두 사람이 순간적으로 우리와 나란해졌을 때, 이제껏 내 사전에 없던 눈 한 송이가 비로소 내 침묵 위에 내려앉았을 때, 이석기가 춥고 휑한 제 손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요. 아직 시간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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