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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그른가 - 갈등, 변절, 내로남불의 시대를 이해하는 도덕심리학
오둔 달 지음, 배동근 옮김 / 북트리거 / 2026년 9월
평점 :
*서평도서제공: 북트리거
인간이 '짐승과 인간'을 구분하게 되면서, 인간이 '금수만도 못한 처지'로 전락해 뒤엉키는 꼴을 보며, 배반과 대립과 회유의 경험, 정치적 갈등과 수사의 고도화로 인헤 그 필요성을 절감함에 따라, 소위 '도덕성'이라는 것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끝없이 이어져왔다.
무엇이 '선과 악'인지, 도덕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고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최소한 합의된 정의에 이를만큼의 규명이 가능할런지,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아니면 인간 본성에 기본으로 탑재된 것인지, 시대에 따라 바뀌는 것인지 없던 게 생겨나는 일인지, 수도 없이 묻고 공방해온 역사가 있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전방위적 물음 또한 켜켜이 쌓여 지금에 이르렀다.
p.37 도덕성을 정의 내린다고 어떤 도덕적• 경험적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지는 않는다. (…) 도덕성을 정의 내린다고 해서 무엇이 옳거나 그른지 혹은 좋거나 나쁜지, 또는 사람들이 무엇을 옳고 그름, 좋고 나쁨으로 판단하는지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 정의는 우리가 도덕성과 도덕적 변화를 연구할 때 기준을 잡아 줄 뿐이다.
p.55 변덕은 우리가 도덕성에 기대하는 일관성을 위배한다. 도덕에 일관성을 기대하는 까닭은 그것이 보편적이고 가역적이며 편파적이지 않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황금률과 정언명령의 척도이다. 우리의 도덕관은 그것이 우리에게 유리한지 혹은 불리한지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저질렀든, 당신이 나에게 저질렀든 혹은 p가 r에게 그랬든 잘못은 잘못이라는 생각이다. 우리가 변덕스러운 도덕 감각을 마주할 때 느끼는 실망은 결국 일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왜 나는 융통성 있으면서도 일관적이나 너는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고 자명한 선을 무시하는가? 왜 나는 합리적인 근거에 따라 '옳음'을 지향하나 너의 그것은 변덕과 맹신에 기반하는가? 왜 '그 때 그 사람들'은 이토록 자명한 선을 두고 불보듯 뻔한 악에 동조하고, 매달렸는가? 인간의 본성에 '선'이, 이타심과 공존을 가능케하는 어떤 부분이 내재되어 있는가? 아니면 정말 '악하게' 태어나 '선'을 학습하며 자라나는가?
그렇다면, 똑같이 배우고 자란 '그들'에겐 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저 모양이란 말인가? 여전히 도덕성이 인간의 생존을 담보하지는 못해도 강력한 지지력 중 하나임을 말할 수 있는가? 쉽게 풀기 어려운 문제다. 나부터도 '선'이라는 개념 자체와 성질로서의 '선함', 암묵적이거나 성문화된 '사회 규칙'과 '도덕'과 '도덕성'을 마구 섞어 쓰고 있으니 그 용어와 각각의 영역의 분리부터 모호한데다 스스로를 '옳다'고 생각하는 각자가 상대를 악마화하고, 혹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는 마당에 제삼자적 분석이 용이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p.80 한 가지 질문은 두 사람이 어떤 행동이 해롭고 도덕을 위반하는지 아닌지를 놓고 의견 차이를 보이는가이다. 틀림없이 어떤 이에게는 해로워 보였던 행동이 또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아 보일 수 있다. (…) 도덕심리학 논의를 할 때, 결정적인 질문은 어떤 행위가 진실로 해롭냐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것이 해로울 가능성이 있다고 인식하느냐이다.
p.207 도덕심리학이 던지는 질문은 왜 교육자, 연구자, 학생들이 특정 상황에서 부정행위나 권위에 대한 복종 문제를 놓고 의견이 달라지는가 하는 점이다. 실험을 통해 입증해야 할 질문은 도덕적 판단이 행동을 이끄는가 아닌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끄는가이다. (…)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강력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런 힘이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무력해질 것이며, 우리는 그런 존재를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인간이라고 여기기 어려울 것이다.
이 난감한 영역에 발들이는 학문이 바로 도덕심리학이다. 저자는 무엇이 옳은지, 왜 옳게 '되는지'가 아닌 사람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도덕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혹은 '느끼는'지를 연구와 현실의 사례를 통해 도덕심리학의 관점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아울러 종장에 나아가서는 이것이 연구 데이터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하는 동시에 독자를 이 흥미로운 영역에 초대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언동이 버젓이 울려퍼지고 있다. 이에 혹자는 이해를 말하고 한편에서는 화합을 말하고 또다른 누군가는 그조차도 찍어 눌러 말살하려 세를 불린다.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는 동안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한 생각은, 이런 현실을 두고 근원적인 해결책에 앞서 당장 뭘 할 수 있는지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 그대로의 '현실'일 것이다.
p.251 미디어, 대화, 또는 교육을 통해 받아들인 세상이 어떠한지에 대한 서로 다른 믿음과, 그 믿음이 만들어 내는 서로 다른 판단의 연결 고리들은 두드러진 정치적 견해 차이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이런 차이는 어떤 사람들의 도덕적 관점이 변덕스럽다거나, 혹은 모든 사람이 이기주의, 편협한 지역주의, 비합리적인 충동 따위에 지배되는 변덕스러운 도덕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두 집단 사이의 이런 균열은 공정성에 대한 관심사와 각자 인식한 빈부 격차의 원인 사이에 서로 다른 연결 고리를 채택할 이유를 발견하면서 초래된다.
p.286 상황에 따른 도덕적 변화는 어떤 사람이 같은 행동을 상황에 따라 도덕적으로 옳다고 판단하기도 하고 그르다고 판단하기도 하는 이유를 물을 때 우리가 다루게 되는 문제다. 상황적 변화는 발달적 변화가 선행되어야만 가능하다. (…) 다행히도 아이들은 진공 상태에서 태어나고 자라지는 않는다. 개개인의 평생에 걸친 도덕적 변화는 이미 변화를 겪었고 여전히 겪고 있는 공동체와 문화 속에 깃들어 있다. 어디에나 숨어 있다.
미래 혹은 어딘가의 '당사자들'에게 나 또한 분명 타협과 변덕을 일삼고 악에 동조한 '그름' 중 하나이다. '현장' 밖의 소시민 중 하나이고, 내가 경험하는 현실은 화면 너머의 언설과 이따금의 시위, 일상적인 진저리에 불과하다. 마침표로 질주하지 않고 물음표와 쉼표를 나누는 사회란 정말 가능한 일일까.
좌절 대신 저자와 함께 다시금 믿어보려 한다.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세계와 미래를. 그러니 더 생각해볼 수 있다고, 이해와 대화를, 지지와 변화를 꿈꿔볼 여지가 남아있다고 믿을 수 있다고, 그렇게 말이다. 책에서 거듭 말해지듯 우리는 변덕스럽지만 그렇지 않다, 라는 말처럼.
p.361 도덕심리학을 정확하게 적용한다는 것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이 실제로 품고 있는 도덕적 관심사들, 연결, 조정과 변화의 근거들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p.362 이면에 숨겨진 도덕심리학을 알게 되면 우리의 판단은 더 온건해질까? 때로는 그렇다가도 때로는 더 가혹해지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배우게 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가 오직 바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의 사례를 판단받을 시간이 왔을 때, 우리의 심판자들이 자신들의 도덕심리학적 성찰의 순간을 충분히 오래 이어 가며 우리가 택한 변화의 이유들이 그들과 어떻게 달랐는지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