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왜 사랑하는 것들은 나를 울리나... 사랑하는, 사랑을 하는, 내가 혹은 나를 사랑하는. 애정을 갖는 것, 마음을 빼앗기고 고통마저 끌어안도록 하는 그것은 어쩌면 운명에 새겨진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랑하는 것들은 운명의 꼭두각시가 된다.

사랑! 참 이상한 것이다. 대단찮은 이유에 모든 인생을 걸게 하고, 다시 없을 운명적 만남이라 생각했던 이가 한때의 착각에 불과한 허깨비가 되기도 한다. 오로지 사랑이라고 믿는 마음 하나 때문에.

사랑에는, 설령 자기 자신을 향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둘 이상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것. 그러나 사랑의 종결에는 변심 혹은 존재의 소멸이랄지, 아무튼 사랑의 관계를 부수고 나가버리는 단 하나의 이탈만이 필요하다.

p.330 결정적인 순간들 이후 우리는 모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난도질 당한 삶들, 그림자의 피조물들. 그의 아버지의 말처럼 운명의 꼭두각시들. 우리는 유령이 되었다.


세상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있다. 대체로 세상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러나 사랑의 기억이 삶을 무너뜨린 시간에 이어져있다면, 때문에 스스로가 차마 마주할 수 없다면...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에 절망에 몸부림치다 끝내 도망쳐버리기를 택했다면, 차마 함께하기를 바랄 수 있는가.

1차대전 이후 파국에 치달아버린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빛바랜 사진처럼 흘러간 시간 속 풍경에는 누군가가 뜨겁게 살아 숨쉬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웃음짓는 이들이, 세상을 물들이는 사랑으로. 그것이 무너뜨린 세상을 오직 그것 하나로 버텨내거나 혹은 무너지지도 못해 지워버리기를 택하며.

p.193 당신은 영국인인 나를 경멸한다, 라는 생각이 몇 번이고 끈질기게 나를 강타하며 사라지길 거부했다. 영국인들이 당신 집에 불을 지르고 당신 가족을 파괴했다. 당신 어머니가 스스로에게 불러온 죽음은 그 비극의 일부였다.


당신은 나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당신은 나의 유년이고 마지막으로 온전했던 기억이다. 모든 것이 비명과 잿더미로 사라진 지금, 기억은 악몽이 되고 돌아갈 곳은 폐허가 된 지금 나의 사랑은 곧 고통, 그것도 차마 마주할 수 없는 고통이다.

그러니 당신의, 나의 사랑을 부숴버리지 않고서는, 나의 세계 전부를 지워버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나의 사랑은 죄책과 파멸이었다고, 차마 용서조차 구하지 못한다고 속죄조차 바라지 못하는 나를 끝내 용서하지 않기를.

p.168 “당신에게 킬네이를 보여주면 좋읉 텐데.” 당신은 미소 지으며 그러고 싶지만 당신에게 너무 슬프지 않을까요, 라고 말했다. 당신과 함꼐면 슬플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소개와는 다르게 사랑은 재앙의 씨앗이 아니다. 그들의 삶은 사랑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작품의 많은 이들이 사랑을 잃어버린 고통,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기에 포기할 수 없는 고통으로 무너져버리거나 무너지지 않기를 택했다.

먼지 쌓인 시간의 반짝이는 기억들,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마저 끝내 끌어안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 울게 하소서, 슬퍼하는 자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있었으니. 무너진 땅에도 잊혀져가는 사랑이 있으니. 때로 순간의 기억은 평생을 살게 하나니.

p.262 난 당신이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우리의 사랑을 파괴하려 애썼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당신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난 지금 나의 선택을 당신이 비난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우리 둘이 어디에 있든 우리의 사랑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페이지보이
엘리엇 페이지 저자, 송섬별 역자 / 반비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 반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나도 이해하고 싶지 않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 싶지도, 저자의 경험담에 나의 과거를 덧씌워보고 조금의 차이도 없음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가 들었던 말들에, 그가 맞닥뜨렸던 일들에, 그가 부정하고 괴로워했던 나날들에 내 것을 겹쳐보고 싶지 않다. 나도 모르고 싶다.

나도 속 편하게, 그의 나날들에 눈시울을 훔치며 감동섞인 찬사를 늘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생존기가 아니라 영웅담, 멋진 극복 서사로만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 무슨 환상 소설이라도 읽듯 내 얘기가 아니라 단정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럴 수 없다.

p.162 시스 이성애자 배우들이 퀴어나 트랜스 인물을 연기하고 추앙받는 모습을 보면 혼란스럽다. 그들이 수상 후보로 지명되고, 상을 받으면, 사람들은 “정말 용감하네요!”하고 감탄했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나 자신을 부자연스럽게 여겨본 적이 없다. 단지 나 아닌 모든 사람들, 세상과 맞지 않을 뿐이다.

들켰다간 말 그대로 죽는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조롱거리가 되는 성소수자 캐릭터를 보며 자랐을 뿐이다. 농담처럼 오가는 혐오에 익숙했을 뿐이다.

학급활동 시간에 이름부터 학번까지 다 적어 걷어가는, “불순동성교제를 하는 학생의 이름을 적어 내시오”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았기를, 아무도 나의 다름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p. 163 “뒤틀린 체계에서 잔혹성은 보편적이며 평범하게 보이고, 이를 해소하고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도리어 이상하게 보인다.”


몇 차례의 아웃팅으로 지난 시간의 인연들의 대부분을 부정당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든지 “아랫도리에 뭐가 달린”거냐든지... 스스럼없이 묻는 사람이 수두룩했을 뿐이다. 혐오발언과 폭력에 양손으로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먼저 보냈을 뿐이다. 연애며 결혼 따위를 묻는 자리에서 거짓말하는 데에 익숙할 뿐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으나... 세상은 변했다고 한다. 여전한 구석이 있는데, 아니, 조금 달라지고 대체로 여전한 곳인데.

그러나 동시에 정말로, 달라졌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이전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누군가의 용기에 빚졌기 때문에, 나는 안다. 혼자가 아님을. 미워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p.111 나는 숨어서 고통받느니 살아 있으면서 고통을 느끼고 싶었다. 어깨를 활짝 펴고, 심장을 환히 드러낸 채, 나는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손을 잡고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남았지. 두려움인지 역겨움인지 모를 감각에 속이 울렁거려 수차례 혀를 깨물어가며 읽어야 했다. 알아, 나 이거 알아. 나는 숨어있기에도 급급해 작은 옷장 속 나의 고통에도 그렇게 버거웠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끊임없이 사랑하고 살아남으려고 애쓸 수 있었을까.

이상한 세계에 살아가는 나인지, 이상한 내가 살아가는 세계인지, 애초부터 ‘멀쩡’하고 ‘정상적인’ 건 아무것도 없었는지, 이제는 따져보기를 포기했다. 잘 살면 됐다.

지금 여기, 세상의 어딘가를 살아가는 ‘우리’와 ‘당신’에게 전한다. 잘 살면 됐다. 살아있기만 해도 고맙다. 눈을 감고 걸어나와,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과 나, 그러니까,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있다. 열쇠는 주머니에 있으니, 지금이 아닐 이유가 없으니, 태어나 사람이니, 우리 모두는 살아가자. 행복하게.

p.173 “열쇠는 내 주머니 속에 있어, 내가 나 자신한테 늘 하는 말이지" 드루 베리모어가 한 말이었다. "확신이 없고, 망설여지고 겁이 나는 순간이면, 나는 열쇠는 내 주머니에 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그냥 떠나면 돼”


#페이지보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우리 인생에 바람을 초대하려면 - 세계적 지성이 들려주는 모험과 발견의 철학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출판사 인플루엔셜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솔직히 말해도 될까. 사는 일이 절박하다고 느껴질 때, 싸우는 데 급급해 조금의 여유도 없는 삶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당장 코앞의 위기에도 조금의 경각심 없이 손 놓고 있는 것만 같은 이들을 보면... 울화통이 터진다.

지금이 그럴 때냐고, 당신은 이 꼬라지를 두고도 밖에 나가 어울리고 술잔을 기울이고 낭만을 말할 짬이 나느냐고, 정신 똑바로 안 차리느냐고 멱살이라도 쥐어잡아 흔들고픈 심정이 되어버린다. 누군들 안 그렇겠느냐만은...

그러나 세상이 망하는 와중에도 아이들은 뛰어놀아야 하고 일상의 소중함이 잊혀져서는 안 된다. 그래야만 산다, 사람은. 고립되지 않은 삶, 은둔하지 않는 삶을 살 필요가 있다. 사회는 파편화된 개인이 조금도 접촉하지 않고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p.49 자유는 배워야 하는 특성이다. 자유는 이 땅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요. 각자가 자신을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느끼면서 삶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영위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자유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데에는 한 세대면 충분하다.


우리는 실내생활에 점점 더 익숙해져 간다. 코비드 팬데믹으로 인한 격리생활을 거치며 일말의 경각심마저 사장된 듯 하다. 우리는 손 하나, 아니, 궁둥이 한 짝도 까딱하지 않은 채로 세계를 누빈다고 착각한다.

마치 서비스와 나만이 존재하는 매끄러운 세계의 전능한 부품처럼, 우리는 점점 더 ‘안’에 고립되어간다. 침대며 소파에 누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위기에 혀를 차고 다시금 두문불출할 것을, 귀를 막고 실내복에 파묻혀 안락할 것을 다짐해버린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밖’이 없는 ‘안’은 무의미하다. ‘밖’으로의 가능성과 동인을 전부 잃어버린 ‘안’은 안식처가 아니다. 감금과 다를 바가 없다.

p.117 집에 나 혼자뿐이고 찾아오는 이도 없다면, 성스러운 장소가 감옥이 되는 건 시간 문제이다. 나는 모든 구석에서 나 자신과 부딪힌다. 더 이상 "밖'이 없다면 "안"은 존재 이유를 잃는다. 안팎이 없는 닫힌 장소가 될 뿐이다.


다시 한 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혼자가 좋은 사람이다. 혼자 놀기? 혼자 밥 먹기? 혼자 운동하기? 심지어 놀러 다니는 것도 혼자 하기? 세상에 너무 좋아, 땡큐!를 외치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하고도 당연한 사실이 생략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 놀고 먹고 운동하고 놀러다니는 모든 순간 어딘가에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만들어낸 것을 향유하고 사용하며 사람이 존재하는 곳에 나 또한 존재한다.

현대 사회에서 ‘혼자’의 의미는 ‘선명하게 인식하는 실제 대상과 접촉하지 않음’에 가깝다. 방 안에, 더 작게는 손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할 수 있다. ‘거의 모든 것’이.

여기서 물어야 한다. ‘거의’는 전부인가? 전부에 가까운가? 얼마나? 완전히 대신할 수 있을 만큼?

p.154 엉덩이를 소파에 처박고 음료를 든 채 잔인하고 폭력적인 시리즈 물을 보면서 밑바닥 세계를 접한다. 그렇게 가슴 졸이고 벌벌떨다가 잠잘 시간이 되면 마음을 놓고 편안해진다.우리는 이런 식으로 경직성과 수동성이라는 이중고를 자처한다.


물론 속 편한 소리 한다 싶은 부분이 있다. 외면할 수 없는 고통을 함께 느끼고 위기가 과장이 아님을 알아버린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모두가 모든 순간을 슬퍼하며 살아야 한다면, 언젠가의 채찍질 고행단과 다를 바가 없다.

저자가 말하는 끌어안고,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고 짜릿한 모험과 비일상의 순간을 향해 뛰어드는 일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분명 쉽지 않다. 당장 급한 생활비, 쪽잠과 과로로 점철된 일과, 보장되지 않는 일상과 외면할 수 없는 고통... 그 모든 것을 없는 셈 치자는 것이 아니다.

저자 나름의 위기의식은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 안락함에서 뛰쳐나가야 한다. 모두가 모체 없는 태아로 남고자 하는 사회는 너무도 끔찍하다. 비를 맞고 바람에 흔들리며 인사를 나누고 마주해야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집 밖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을 마주하며 살아야 한다. 자꾸만 다채롭고 이질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고치 안에서 일평생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창 없는 모나드’가 아니다.

p.240 우리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도피가 아니라 역경과의 정면 대결이다. 폐쇄 혹은 개방의 독단주의 대신 다공성을, 절제와 용기 사이의 적절한 간격을 추구해야 한다. 그 사이에서 창조적 충격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인생의 맛은 언제나 다양한 영역의 충돌 속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 일터의 죽음을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법
신다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사람이 다치고 죽는 일에 그럴 수도 있지, 가 어디 있을까. 위험요소가 있는 현장에서 노동하는 것과 노동 현장에서 사망하거나 위해를 입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전자에 동의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해서 후자에까지 동의한 것은 아니다. 목숨을 빼앗기는 일에는 그 누구도 동의할 수 없다.

사례, 라고 감히 부를 수 있다면, 아무리 건조하게 서술하려 애를 썼대도, 얼마 읽기도 전에 그 규모와 참혹함에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다. 먹고 살려면 못 할 일이 없다지만, 먹고 ‘살려고’ 하는 일에 목숨을 빼앗기는 일처럼 어처구니 없는 게 또 어디 있겠는가.

p.18 사고 나기 전에는 내도 솔직히 산재에 대해서 신경 많이 못 썼습니다. (...) 뉴스 나오면 남의 일이죠. 그러다가 이게 어느 날 갑자기 내 가족이 피해를 당하면 내 일이 되더라는 거죠.


수백명이 오르내리는 지하철, 그곳에서 사람이 깔려 죽었다. 먹고 자고 일어나는 집이 지어지는 곳에서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 달콤한 빵을 만드는 반죽 기계에 사람이 갈려 들어갔다. 사람이 목전에서 머리가 으깨져 죽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뼈가 부서져 죽고, 짐덩이에 차에 철판에 온몸이 으스러지고, 맨몸으로 올려진 전신주에서 숯덩이가 되도록 타죽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동료 노동자들은 애도는 커녕 침묵하고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구받았다.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것이 매일같이 일어난다면, 그러고도 내가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오히려 해고당하지 않은 것에 안도해야 한다면.

p.114 법이 보호하기로 한 노동자 집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사조차 되지 못했다. 그의 죽음에 회사가 어떤 책임이 있으며 어떤 조처를 했으면 사고가 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회사가 노동자의 건의 사항을 무시한 사실과 현장을 훼손한 행위에 대한 사법적 책임도 묻지 않았다.


사람이 죽은 자리에서, 애도는 커녕 수습조차 제대로 되지 못한 곳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 사실을 어디에 말할 수도 없다. 당장의 생계는 물론, 고액의 소송비용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었다. 위험한 일에 밀어넣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현장의 요구는 돈이 되지 않으므로 묵살된다. 마음처럼 쉽사리 박차고 나올 수도 없다. 내가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다는데, 나의 생계는 내가 아니면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항의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다. 말해봤자 듣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끔찍한 것은, 이 모든 일이 예방 가능했다는 점이다. 적어도 최초의 사고가 발생했을 때 대책을 세우고, 개선방안이 나왔을 때 고쳐나갈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은 돈이 되지 않아서, 사람이 가장 싸기 때문에. 절차보다도, 기계보다도, 하다못해 소모품 조각 하나보다도 사람이 위험으로 내몰리는 것이 가장 저렴하기 때문에.

p.157 노동자의 자기 보호 의무는 수없이 강조되지만 사업주가 노동자를 보호할 의무와 그것을 이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은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365일, 한 해에 2천 223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루에 여섯 명 꼴이다. 자 지금부터 매일 여섯 명씩 죽이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러려니 넘기는 이가 몇이나 될까. 다치는 일은, 간신히 죽지만 않은 사람까지도, 아직 계산에 넣지도 않았다.

우리 사회는 왜 같은 이유 벌어지는 죽음을 막지 못하는 걸까. 왜 법정에조차 명확한 과실을 유야무야 넘기는 걸까. 우리는 이 문제의 답을 모르지 않는다. 방법부터 길까지 알고 있다. 적어도, 그것을 실현되게 할 책임이 있는 이들은 알고 있다.

p.241 수사도 판결도 결국 피해자의 아픔을 덜어주고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국가의 노력이다. (...) 정부가 소통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국가로부터 버려졌다’ 혹은 ‘국가가 나를 재난 속에도 돌보고 있다’는 상반된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아 벌어지는 일은 사고가 아니다. 사건이다. 하물며 안전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고의로 방치하는 것은 살인시도에 준해 다뤄져야 한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안전한 노동현장을 바란다. 어쩔 수 없이 위험한 곳에 놓인 이들이 위험하지 않게 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노동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노동자와 관계맺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죽기 위해 일하러 가는 사람은 없다. 일터에서, 일 때문에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이야기는 몇 번이고 여기서 출발되어야 한다.

p.293 재해를 안다는 것은 (...)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마음 깊이 추모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터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온몸을 쭈뼛 세워 받아들이고 아파하는 것이다. 몇 줄의 속보로만 전해지던 이름 없는 죽음들이 저마다 맥락을 가진 하나의 ‘이야기’가 될 때 우리는 그들을 추모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부처스 크로싱
존 윌리엄스 지음, 정세윤 옮김 / 구픽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부 개척 시대”에 대해 주로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가는 말, 낡아빠진 옷을 걸친, 후줄그레한 남자들이 술집에 모여 떠드는 모습, 광활한 자연에서의 낭만적인 (웩...) 사랑, 타는듯이 내리쬐는 태양,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 강가에 늘어서서 목을 축이는 짐승 때와 야생의 잔인함... 무엇이든 간에 미디어의 환상을 벗어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읽는 내내 생각했다. 고립된 사람, 몸도 마음도, 사람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자기만의 세계로 처박혀버린 사람이 얼마나 변할 수 있는지를, 멀리서 봐야만 아름다울 수 있는 생의 면면을. 헛되고 또 헛되니 진실되고 본질적인, 뜨겁게 맥동하고 차게 얼어붙어, 숨쉬고 죽어가는 야생의 강렬함에 매료되는 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p.304 ”자네 신세는 자네가 망쳤어. 자네와 자네 같은 인간들이. 자네가 살면서 매일 하는 일이, 자네가 하는 모든 일이. 아무도 자네한테 이래라저래라 안 했어. 그러지 않았어, 죽인 사냥감들의 악취로 땅을 뒤덮으며 제멋대로 살아왔지. (...) 자네는, 자네들 모두는 내 말을 귀담아들었어야 했어. 자네들은 자네들이 죽인 짐슴들보다 나을 게 없어."


조금쯤 서럽기도 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겠느냐고. 크고 텅 빈, 어디에도 의지하고 숨을 수 없는 자연에 홀린 듯이 숨어들고 싶은 적이 없었겠느냐고. 나라고 몰라서 그랬겠느냐고.

조심스레 말하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은 잔인하다. 동시에, 잔인한 것은 아름답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자유로워 보이나 자유로운 것의 실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표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읽는 순서와는 반대로 한바퀴 빙 둘러 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이다. 숨을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땅에 마주한 존재들. 모든 것을 주변으로 두고 단지 겨누는 곳, 단박에 숨통을 끊고 주저앉힐 수 있는 그곳만을 응시하는 사람.

p.98 무감각은 매일매일 슬금슬금 파고들어 마침내는 그 자신이 된 것 같았다. 자기 자신이 개성도 형체도 없는 땅처럼 느껴졌다. 때로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를 마치 없느 존재인 양 쳐다보거나 살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인다는 걸 직접 확인하려고 고개를 급히 젓거나, 팔이나 다리를 들어 올려 쳐다보았다.

p.170 사냥의 끝 무렵에 밀러는 움직이는 들소 무리에 따라 움직이는 하나의 자동 기계 장치처럼 보였다. 그리고 밀러의 들소 사냥은피에 대한 굶주림, 가죽 또는 가죽이 가져다줄 무언가에 대한 욕망, 또는 심지어 ㅁ;ㄹ러 안에서 음울하게 작동하는 맹목적인 분노가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외롭구나, 외롭고 잔인하구나. 순간순간 중얼거리게 한다. 사실 시대상으로나 상황적 맥락으로나 서부극을 좋아하지 않아 안티-서부극이라는 설명을 수차례 보아도 그러려니, 싶다.

다만 전쟁을 온몸으로 겪어낸 작가의 이력에서 무언가를 간신히 짐작해볼 뿐이다. 대체 무엇을 보고 돌아왔기에 살아있는 존재를 이토록 무력하고 나약하게 여기는 걸까. 뜨거운 맥동에서 웅혼함과 끓어오르는 투지가 아닌 비참과 허무를 느끼는 걸까.

p.78 "그래요, 돌아오겠죠. 하지만 그때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 거옝쇼. 젊지도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졌겠죠."

p.307 "서부는 오래 있을수록 감당이 안 돼. 너무 크고 너무 텅 비었어. 그리고 거짓이 자네에게 찾아오게 하지. 거짓을 다룰 수 있기 전에는 거짓을 피해야 해. 그리고 더는 꿈같은 건 꾸지 말게. 난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만 해. 그밖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


단순한 줄거리에 비해 지극히 무겁게 쓰여진 작품이다. 읽는 이마저 침묵하게 만든다. 마치, 수십 번쯤 살아본 사람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처받을 구석이 남아있는 사람처럼.

어떤 결단, 혹은 만용이라고 볼 수도 있을 시도와 고립된 시간을 거쳐 주인공은 부처스 크로싱에 갓 도착할 때의 예민하고 생생한 젊은이에서 굳은살이 배기고 죽은 피 냄새에 절여진, 부서진 인간이 되어간다.

생을 마주하는 경험, 대등하지 않다면 곧 살육이다. 주고받을 수 없었던 폭력은 곧 학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독자를 놓아준다. 아니, 놓아버린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내려놓아져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게 된 독자는 다시금 외로워진다.

처음으로 돌아갈 것인가, 차마 마주하기 어려운 것을 마주한 인간이 될 것인가.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비극이나, 결국 독자의 몫이다. 어떤 순간은 영혼의 깊은 곳을 뒤흔들어 평생을 바꿔놓기에.

p.336 맥도널드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태어났던 곳, 자기의 과거 모습과 겨우 깨닫기 시작한 조건으로 자신을 키웠던 곳, 더 진정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게 황야로 몰아 낸 그곳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