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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페이지 저자, 송섬별 역자 / 반비 / 2023년 10월
평점 :
*출판사 반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나도 이해하고 싶지 않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고 싶지도, 저자의 경험담에 나의 과거를 덧씌워보고 조금의 차이도 없음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가 들었던 말들에, 그가 맞닥뜨렸던 일들에, 그가 부정하고 괴로워했던 나날들에 내 것을 겹쳐보고 싶지 않다. 나도 모르고 싶다.
나도 속 편하게, 그의 나날들에 눈시울을 훔치며 감동섞인 찬사를 늘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생존기가 아니라 영웅담, 멋진 극복 서사로만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 무슨 환상 소설이라도 읽듯 내 얘기가 아니라 단정지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그럴 수 없다.
p.162 시스 이성애자 배우들이 퀴어나 트랜스 인물을 연기하고 추앙받는 모습을 보면 혼란스럽다. 그들이 수상 후보로 지명되고, 상을 받으면, 사람들은 “정말 용감하네요!”하고 감탄했다.
나는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나 자신을 부자연스럽게 여겨본 적이 없다. 단지 나 아닌 모든 사람들, 세상과 맞지 않을 뿐이다.
들켰다간 말 그대로 죽는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조롱거리가 되는 성소수자 캐릭터를 보며 자랐을 뿐이다. 농담처럼 오가는 혐오에 익숙했을 뿐이다.
학급활동 시간에 이름부터 학번까지 다 적어 걷어가는, “불순동성교제를 하는 학생의 이름을 적어 내시오”에 내 이름이 적히지 않았기를, 아무도 나의 다름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p. 163 “뒤틀린 체계에서 잔혹성은 보편적이며 평범하게 보이고, 이를 해소하고 전복하고자 하는 욕망이 도리어 이상하게 보인다.”
몇 차례의 아웃팅으로 지난 시간의 인연들의 대부분을 부정당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돌아오길 바란다”든지 “아랫도리에 뭐가 달린”거냐든지... 스스럼없이 묻는 사람이 수두룩했을 뿐이다. 혐오발언과 폭력에 양손으로 꼽을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먼저 보냈을 뿐이다. 연애며 결혼 따위를 묻는 자리에서 거짓말하는 데에 익숙할 뿐이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으나... 세상은 변했다고 한다. 여전한 구석이 있는데, 아니, 조금 달라지고 대체로 여전한 곳인데.
그러나 동시에 정말로, 달라졌다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이전처럼 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무엇보다, 이렇게 누군가의 용기에 빚졌기 때문에, 나는 안다. 혼자가 아님을. 미워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p.111 나는 숨어서 고통받느니 살아 있으면서 고통을 느끼고 싶었다. 어깨를 활짝 펴고, 심장을 환히 드러낸 채, 나는 이전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손을 잡고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어떻게 살아남았지. 두려움인지 역겨움인지 모를 감각에 속이 울렁거려 수차례 혀를 깨물어가며 읽어야 했다. 알아, 나 이거 알아. 나는 숨어있기에도 급급해 작은 옷장 속 나의 고통에도 그렇게 버거웠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까지, 끊임없이 사랑하고 살아남으려고 애쓸 수 있었을까.
이상한 세계에 살아가는 나인지, 이상한 내가 살아가는 세계인지, 애초부터 ‘멀쩡’하고 ‘정상적인’ 건 아무것도 없었는지, 이제는 따져보기를 포기했다. 잘 살면 됐다.
지금 여기, 세상의 어딘가를 살아가는 ‘우리’와 ‘당신’에게 전한다. 잘 살면 됐다. 살아있기만 해도 고맙다. 눈을 감고 걸어나와,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과 나, 그러니까,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 있다. 열쇠는 주머니에 있으니, 지금이 아닐 이유가 없으니, 태어나 사람이니, 우리 모두는 살아가자. 행복하게.
p.173 “열쇠는 내 주머니 속에 있어, 내가 나 자신한테 늘 하는 말이지" 드루 베리모어가 한 말이었다. "확신이 없고, 망설여지고 겁이 나는 순간이면, 나는 열쇠는 내 주머니에 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그냥 떠나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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