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탄생 - 우리가 찍은 낙인의 역사
수레카 데이비스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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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현암사

**괴물, 그들은 왜 두렵고도 매혹적인가. 다르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차이라는 강을, 건널 수 없는 그 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와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은 절대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의 다름, 그들의 야만성과 생명력은 언제나 강력하고 신비로우며 '근원적 동물성'으로 간주되기에 인간 아닌 인간들, 괴물들은 그렇게나 아름답고 두렵다.**

**괴물은 침범하는 자다. 규범을 넘어 일탈하고 흘러나가는 존재다. 그들에게는 전염성이 있어 생각만으로도, 존재만으로도 오염의 가능성이 된다. 그들은 고유한 동시에 가변적이어서 위협적이다. '괴물성'은 '우리'의 '복잡하고 질서 잡힌' 아름다움과는 달라 단순한 동시에 무질서므로 정의되고, 표적지어질 수 있다.**

p.11 괴물 만들기는 가치를 판단하는 행위이자 위력적인 매도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추상적인 두려움과 관념에 물리적 형태를 부여하고 잠재적 해결책을 마련하기 위해 집단과 개인을 규정하며, 그들을 정상적인 육체나 믿음이나 행위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로 취급한다. 사회가 사람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방식의 핵심에는 '표준'과 '괴물'에 대한 가정이 깔려 있다.

p.102 민족과 이민족을 구분하려면, 그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중간자'를 불러내 벽 속에 가두어야 한다. 경계를 흐리는 존재인 괴물을 무력화해야 한다. 공동체는 특정 개인들을 괴물로 규정함으로써 주변부로 몰아내고 어느 정도까지는 지워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사회가 아무리 그들을 과소평가하거나 문제 삼아도 이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한다. 여러 혈통을 이어받고 서로 다른 기대 사이에 끼인 채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다.


**괴물성의 존재는 '우리'에게서 영구히 몰아내져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주는 동시에 언제나 종식 불가능한 위험이다. 교활하고 치밀한 동시에 순진하고 야생적이다. 괴물은 자연-성이다. 괴물은 자연의 섭리와 질서를 위배한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반드시 통제되어야 한다. 규칙과 체계의 일부가 되어 언제고 제거, 아니, '삭제' 가능한 존재이다. 그래야만 한다.**

**저자가 제시하는 사료들에서 볼 수 있듯, 권력과 체제를 흔드는 존재로서의 괴물은 '우리'라는 '참된-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달라 절대로 '우리'의 일부로 편입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언제나 괴물-됨의 위협을 안고 있는 존재다. 체제에 충실하지 않거나 규범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언제든 인간 '이외'로 미끄러질 수 있고, 그곳에서 돌아오는 일은 '본래적으로' 인간이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

p.87 '인종'이든 '민족'이든 둘 다 개인과 공동체가 만들어내는 개념이다. 몸, 행동, 혈통, 시민권에 관한 생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선택된 역사인 것이다. (…) 자기네와 '다른' 집단 사이의 경계에 걸터앉은 개인을 불법적이거나 별스러운 존재로 식별하고 낙인찍어야 비로소 별개의 종족이나 인종 같은 것이 성립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이런 개인들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 경계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임이 드러날 것이다.

p.227 개인이나 집단을 어느 한 범주에 들어맞지 않는 골칫거리로 낙인찍는 사람들은 (...) 인간의 범주가 유연하다는 사실을, 인간의 몸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쉽게 변한다는 사실을,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단순한 경계가 없다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어쩌면 미래의 어느 시점, 또 다른 삶, 평행 우주에서는 자신들 역시 골칫거리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외면하고 있다.


**공고하고 엄밀한, 확신과 질서의 세계에서 괴물은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질서를 지탱하는 힘이자 질서의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대조적으로, '변신'에 덜 적대적이고 존재의 경계는 더 모호한 사회에서는 퍽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필사적으로 진보해온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에 역행하는 국제적 흐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법과 학문의 언어를 탐욕스레 두른, 괴물을 가리키는 손가락들을.**

**이 책이 괴물의 역사가 아니라 괴물의 탄생, 괴물 만들기의 역사인 이유는 본질적으로 '우리'가 괴물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괴물을 만들어내고, 규정지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괴물들'에 경의를 보낸다. 범람하고, 더럽히며, 파괴하고 매혹할 우리, 절대 우리일 수 없는 근원적 다름들에게. 또한, 무엇보다도 '무엇'인 이들에게, 비인간으로 밀려나는 세상에서 손을 잡고 함께 '무엇'이 되는 이들에게.**

p.146 당신은 누구에게 공감하는가? 얼마나 깊이 공감하는가? 공감은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지, 따라서 가장 인간다운 사람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지도, 즉 사적인 지형도와 같다. 갈등 없이 서로에게 공감하는 다문화적인 정치체, 범주의 자유로운 혼합과 초월을 찬미하는 정치체를 만들 수 있을까?

p.351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에도 희망을 걸 수 있다. (...) 우리가 아는 유일한 세계, 달아나거나 버리기보다는 지키기 위해 노력할 가치가 있는 우리의 터전이다. 괴물은 서로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문이다. 괴물은 곧 우리 자신이다. 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을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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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라예프 사건 ㅣ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6
빅토르 세르주 지음, 조재룡 옮김 / 빛소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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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인간에게는 여전히 인간성이 남아있는가?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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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에두아르 르베 지음, 정영문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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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은행나무
#은행잎4기 #은행잎서재 #에두아르르베 #자화상


자서전이 아닌 자화상인 이유를 알겠다. 극도로 촘촘하게 쌓아올리는, 덧대고 선을 긋고 겹치고 덮어씌우는, 집요하고 치밀한, 어느 순간 탁 풀리는 공백이 정교한 형상으로 나타났다 사라져버린다. 몇 문장을 따라해보다 포기했다.

샅샅이 훑어내는 추격? 아니, 묘사, 그래, 묘사. 그것에 기묘한 쾌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낀다. 선 하나, 점 하나, 장면 하나가 모여 쉴새없는 반추와 회상을 소묘한다. 영사기 도는 소리가 착착착, 들려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p.8 내 삶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삶을 사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p.94 나는 가끔 특별한 이유 없이 전화번호부를 뒤적인다. 나는 영화를 볼 의도 없이 지면에 실린 영화 시놉시스를 읽는다. 나는 편성표를 읽지 않고, 채널을 돌려 무작위로 TV를 본다.


읽는 내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털어놓고 싶었다. 그렇게까지 오래, 적어도 이 생각을 완전히 회상불가능한 정도로 잊기 전에 누구도 내게 말해줄 수 없게 될 과거의 일화를 말하고 싶었다.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을 꺼내보이고 싶었다.

자랑스러운 일화에 온갖 장식을 덕지덕지 붙여 번쩍 들어올리고 싶었다. 언젠가 베푼 보잘것없는 친절을 죽기 직전까지 떠벌리고 싶었다. 보물처럼 모아둔 칭찬을 싹싹 닦아 늘어놓고 싶었다.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

p.7 10대 때, 나는 《인생 사용법》이 사는 법을, 《자살 사용법》이 죽는 법을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했다.

p.50 소름이 돋을 때면 수 세대 전 내가 짐승이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나는 시력을 잃지 않을 것이고, 청력을 잃지 않을 것이며, 팬티에 오줌을 싸지 않을 것이고, 내가 누군지 잊지 않을 것이며, 그 전에 죽을 것이다.


다시 없을 행복한 순간을 말하며 웃고 싶었다. 돌이킬 수 없는, 아직 잃지 않은 기회에의 그리움에 엉엉 울고 싶어졌다.

이 모든 것을 빼곡히 적은 노트를 탁, 소리나게 덮어버리고 서랍 가장 깊은 곳에 숨기고 싶었다. 얼마 안 가 꺼내보고 뒤져보다 언젠가 여는 방법을 잊어 골머리를 싸맬만한 방법으로. 언젠가 정말, 꼭 필요한 때에 딱 한 번만 꺼내보겠다는 마음으로.

p.69 나는 내 내부 장기를 전혀 본 적이 없다. 단지 거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몸의 어떤 부분들을 보았지만, 어떤 부분들은 거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도 결코 본 적이 없고 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p.143 내가 언제 죽든 열다섯 살은 내 인생의 중간이다. 나는 삶 후의 삶은 있지만 죽음 후의 죽음은 없다고 믿는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내가 거짓 없이 '죽어가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오직 한 번뿐이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은 이미 지나갔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생을 덧그리고 덧덧칠하고 덧덧덧그으면, 그 끝은 무엇이 될까. 쉴새없이 생동하는 동시에 모든 순간을 한데 모은 기묘한 상이 되리라는 생각을 한다. 생의 종장을 끌어다 꽝, 찍어버린 이가 집요하고 난잡하게, 파괴적이고 사랑스럽게 그러모은 삶을 보며.

예감한다. 언젠가 삶에서 나를, 나에게서 세계를 소거하려는 결단 앞에서 이 책을 반드시 떠올리고야 말리라는.

p.142 내가 나눈 가장 아름다운 대화는 청소년기에 친구의 집에서 나눈 것이었다. 우리는 친구 어머니의 술을 무작위로 섞어 만든 칵테일을 마시며 말라르메가 자주 드나들었다는 그 큰 집의 거실에서 해가 뜰 때까지 얘기하곤 했는데, 밤새 나는 사랑과 정치와 신과 죽음에 관한 담론을 풀어냈고, 때로는 바닥을 굴러다니며 생각해낸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중 단 한마디도 철회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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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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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유지영 #심장듣기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오래도록 이야기해왔다. 읽는 일은 곧 듣는 일과도 같다고. 잘 읽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하고, 잘 듣기 위해서는 나의 '자리'를 내어줄 필요가 있다고. 듣기는 말하기와 말하는 사람, 이 둘의 존재를 전제해야만 한다.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아무도 없는 세계에 덜렁 놓인 사람이 아무도 없느냐고 물을 때조차 그는 듣는 사람을 전제하고 있다고. 듣기와 말하기는 이토록 서로를 필요로 한다. 혼자, 너무도 혼자인 고독, 스스로를 쪼개 바라볼 수조차 없는 외로움 속에서는 아무것도, 스스로의 존재를 전할 수조차 없다는 뜻이다.

p.7 내가 뭔갈 듣기로 결정했다면 그건 내가 그걸 듣고, 느끼고, 변하겠다는 뜻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된다. 우리는 결국 들은 것이 된다. 단지 내가 들은 내용뿐 아니라 듣는 태도를 통해서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다. 듣기는 그렇게 삶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p.87 "말하기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주체적인 외향적 행위인 반면, 듣기는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내향적 응대처럼 보인다. 과연 그러한가?" 듣기는 단순히 수동적이고 반응적인 응대가 아니다. 듣기는 오히려 적극적인 상대에서만 가능하다. 귀는 입과 달리 늘 열려 있는 기관이지만 누군가의 말을 새겨 듣는다는 건 선택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최소한 스스로에게 타자로 인식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자기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시작도 끝도 없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혹은 들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세계와 전능자는 듣기와 말하기 모두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들을 수 없고, 아무도 듣지 못하니 말하기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적막한 절멸이란 말인가.

여기서 물을 수 있다. 듣기에는 무엇이 요구되는가. 이는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간다. 듣기 위해서는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단단히 틀어쥐고 올라앉은 나의 자리를 말하는 이에게 내어주어야 한다. 말하는 이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의 초대에 응해야 한다. 그의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p.48 인터뷰를 하다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감각을 만나게 된다. 내가 말하는 이의 말을 아주 정확히 듣고 있다는 느낌이다. 마지막 퍼즐 조각의 모서리가 빈 공간에 딱 들어맞은 것 같은 정확감, 내가 어찌저찌 흘러온 삶이 말하는 이의 삶과 밀착되어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물론 그것은 순전히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고, 말하는 이의 감정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을 '나는' 그렇게 들었다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p.115 듣는 행위에는 이렇듯 비생산적인 구석이 있다. 귀를 기울여서 잘 듣는, 잘 들으려 애쓰는 일은 생산적일 수도 효율적일 수도 없다. 듣는 것만으로는 그 무엇도 생산해낼 수 없고, 자랑도 되지 못한다. 그러니 듣기에 성공이라는 게 있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형태일 것이다. 매순간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듣는 일이 한 명의 인간을 이해하는 최선의, 그리고 최소한의 행위라는 걸 인정하는 것.


동시에 '듣는 나'를 그 세계에서 소거하지 않아야 한다. 말하는 이를 이 장에 홀로 남겨두지 않아야만 그의 말을 허공에 던져버리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듣고 말하기란, 누군가의, 나의 말을 잘 듣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제각기 소리높여 '나'의 자리를 다투니 기다리고 바라볼 여유가 없다. 크고, 많고, 사나운 목소리에 작고, 약하고, 느린 말이 설 자리가 없다. 하물며 듣기의 자리란 얼마나 좁고, 얕고, 위태로울까.

저자가 인용한 판결문을 보며 김진영의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단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오직 그 한 사람을 위해 힘껏 내뻗는 손이 있다면, 오직 단 한 사람이 또다른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홀로 남겨두지 않는 세상이, 귀 기울여 듣는 사람 하나만이라도 꼭 있으리란 믿음을 잃지 않는 세상이 그 한 사람을 그대로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p.105 내 안에서 이미 옳고 그름이 정리된 주제라면 어느 한쪽의 편에 서는 게 크게 주저되지 않는다. 가치중립이라는 명제 아래 어떤 목소리는 과대 대표되고 어떤 목소리는 과소 대표된다고 믿어서다. 과소 대표되는 이들의 목소리를 더 정확하게 듣기 위해 그들의 편에 선다. 어떤 목소리는 편파적일 때 더 정확하게 들린다.

p.116 나에게 잘 듣는 일이란 구체적으로는 그런 것이다. 쓸모를 증명할 수 없으나 그 증명할 수 없음으로 인해 무가치해지지는 않는 일. 그것은 잠시나마 '나'를 넓혀가는 일이다. 내가 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걸 아는 일이다.


부디, 이 사납고 잔인한 세상에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 듣기 위해 눈을 마주치고, 이해하기 위해 어깨를 기울이고 가슴을 맞대는 사람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연약하고 짧은 삶, 한 명이 외로운 홀로가 아닐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뿐이리라.

p.198 듣는 사람이 없이는 말하는 사람이 없고, 말하는 사람이 없이는 듣는 사람이 없다. 이 문장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듣는 사람의 곁에 말하는 사람이 있고, 말하는 사 람의 곁에는 듣는 사람이 있다. 두 역할은 어느 한쪽으로 고착될 새도 없이 수시로 바뀐다.

p.199 앞으로도 내내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듣고 싶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이고 싶다. 설령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소망일지라도 계속 소망하고 싶다. 이렇게 겁도 없이 쓴 문장이 앞으로의 내 삶을 붙들어줄 족쇄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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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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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비밀의들판 #마거릿주혜리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자기의 역사를 찾는다는 건 대체 무엇일까. 사람은 사람의 몸에서 태어나 사람의 몸으로 살아간다. 자기 정의는 역설적으로 타인에게 비춰 보이는 나, 타인과의 관계 어딘가에 위치하는 나, 나를 둘러싼 관계의 이름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나를 이해한다는 것, 누군가를 알아간다는 것, 그 삶의 궤적을 좇는다는 것은 그 기원과 현재를 훑고, 감각하고, 음미하는 것과도 같다.

위, 아래, 좌우(?)까지 고루고루 잃어가며 살아온 결과, 가장 큰 아쉬움은 그의 삶을, 기억을, 언젠가의 시절을 말해줄 사람이 점점 줄어가다 기어코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나의 OO은 말했다. 나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알더라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언젠가 너의 어린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도 너뿐인 때가 올테니 지금이라도, 틈 날 때마다 자주 말해주고 싶다고.

p.16 나는 신문 기록, 수감 중 읽은 책 목록, 공산주의자 동지들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직접 고안했던 암호 등 내 할아버지 이철하의 짧은 생애에 관한 사실들을 밝혀냈지만, 정작 내 존재 자체에 깊이 스며든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내 몸을 파고 들어 와, 손녀였고 딸이었으며 마침내 어머니가 된 나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들을 내 몸에서 풀어내야 했다.

p.58 나는 미국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그 어느 도시에 살면서도 진정으로 내 집에 머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그 이유가 할아버지의 삶이 잊히고 만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이리저리 떠도는 성인기의 내 삶에서 단 하나 변함없는 것은 더 전망 있는, 더 흥미로운, 더 '나은' 어딘가로 이동하려는, 탈출하려는 충동뿐이다. 내 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는 느낌으로만 채울 수 있었다.


누군가를 영영 보내고 온 날엔 으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누구가 아닌 이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뭘 좋아하고, 어떤 꿈을 꾸고, 어느 길을 따라 마침내 그곳에 뿌리내리고 살아왔을까. 그 가슴에 무엇이 싹트고 시들어 묻히고야 말았나. 내도록 아쉽고 궁금했다. 서럽기도 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지키고 쌓아온 것들,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삭이고 숨겨온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그가 따돌려진, 숨이 턱에 차도록 쫓아다니게 한 세월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누가 그의 삶을 들어주었을까. 누가 그 자신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묻힌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고이 닦아 전해주었을까. 그 이야기의 이름을 안다. 상처. 상처. 상처.

p.123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들은 바로는 아기 때 자신에게 결핵을 옮긴 이가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아마도 감옥에서 옮았을 것이다. (...) 아버지가 전혀 알지 못했던 부친이 남긴 유산이,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거나 적어도 주요인을 제공한 전염병이었던 것이다. 잠복기를 거친 다음 발병해 조직을 훼손하고, 결코 온전히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 병. 아비 없이 자라난 상처. 아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처. 내게로 대물림된 그 상처.

p.198 내가 묻는다. "할머니가 지내던 집 사람들은 정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아니면 중국으로 탈출한 가장 민강에 관해서 언급한 적은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한다. “내 주위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민강을 언급하는 것도 들은 적 없고. 나는 애초에 왜 일본인들이 한국에 있었는지 조차 몰랐어. 그 시대는 그랬지."


저자가 추적하는 가족들의 계보는 복원해낸 조부의 삶, 침묵 속에 전달된 조모의 삶, 소외와 포기로 점점이 이어져온 모부의 삶이라는 낱알들의 모음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삶, 자기가 살아오지 않은, 알 수 없었던 시대, 파편화된 기억으로만 존재해온 일화를 한데 모아 가족과 핏줄로 이어져는 더 큰 그림이자 새로운 시작에의 첫 획이다. 여전히 미완이며, 영영 완결될 수 없는 '것'을 위한.

그리하여 종국에는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 가 아닌, 무엇이 남는가, 무엇이 끝내 살아남아 귓가로 입속말로 손때 묻은 흔적들로 전해지는가. 저자가 끝내 도달한 '미완'에서 진정 자기 자리를 찾은, 어쩌면 영영 그럴 수 없게 된 과거와 현재의 의의를 묻기를 바란다. 그렇게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들어봐, 너의 이전을 말해줄게. 들어봐, 나는 이 몸으로 이어져 왔으니, 우리는 어느 몸에서 갈라져 어느 '곳'을 살아가는 몸인가…

p.380 마침내 집에 온 기분이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사는 베이 에어리어는 아이와 함께 있는데도 여전히 거쳐 가는 곳으로 느껴지고, 한국은 좀 더 익숙하지만 그래도 외국이다. 나에게 집이란 장소가 아니다. 존재의 상태다.

p.387 옛날 옛적에 자기가 태어난 나라가 전혀 편하지 않은 소녀가 있었어요. 소녀는 혼자만 다르게 생겼고, 먹는 음식도 달랐어요. 사람들은 소녀에게 묻곤 했어요. "넌 어디 출신이야?" 소녀가 "휴스턴"이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다시 물었어요. "아니, 진짜로 어디서 왔냐니까?" (…) 여성은 여전히 두 나라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지만, 가족과 함께하면서 비로소 집에 온 기분을 느끼게 되었어요. 엄마와 달리 아이들은 과거를,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랄 거예요. 여성은 진심으로 바랐어요. 아이들이 그들 자신과, 어디가 되었든 자신이 살기로 선택한 곳에서 편안히 머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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