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기일지 ㅣ 은행나무 시리즈 N° 24
이선진 지음 / 은행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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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잎4기 #은행잎서재 #이선진 #잃기일지 #시리즈n

*서평도서제공: 은행나무

언제부터였을까. 아니, 언제일지 중요할 리가 없다. 똑, 떼내어 샅샅이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연. 싹 뜯어내 납작 펴박아놓고 보니 견딜만한 듯도 싶었다. 그렇게 '나'를 뛰쳐나가 '진진주'가 된 이 사람의 마음을 구하시오. 구해주시오…

진진주는 진진주를 바라본다. 진진주는 진진주를 생각한다. '내'가 없으니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도 없다. 진진주의 세계는 진진주의 사전 발치를 배회한다. 진진주는 가진 적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 그렇게 '나'는 진진주의 이 빤빤한 세계를 가볍게 찌그러트리는 존재가 있으니, 다섯살 조카 되시겠다.

p.21 진진주는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무한궤도에 갇혀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적을 알아야 나를 알 수 있다는 말을 현 상황에 적용해보자면, 진진주가 속속들이 알아야 할 적은 무한궤도였다. 그건 진진주의 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진주가 스스로의 아군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p.39 이렇듯 세상이 저 맘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마다 진진주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가 아니라 진진주다. 내가 아니라 진진주다, 나는! 그리하여 이 글의 어떤 문장도 '나는'으로 시작될 수 없는 거였다. 세상은 언제나 요지경,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쉽지 단 한 번도 내 맘대로 뒤집어지지 않았으니까.


진진주씨의 애매하게 구차한 세계를 감싸는 방벽은 애매하게 단단한 방벽이고, 이는 애매한 사전 어드메를 유령처럼 맴돌고 있다. 진진주는 아프다. '내'가 아니라 시간이 아프고, 빗금치고 지워진 자리 아래 파묻어둔 말을 이따금 떠올린다. 진진주는 무너지지 않는다. 만취 상태로 진상을 좀, 많이, 부리긴 하지만. 진진주는 애매하게 해냈으므로. 뭐든간에. 모르긴 몰라도. 아무튼.

이야기는 내도록 소란하다. 구질구질하고 뒤죽박죽-한다. 그 익살 너머에 어떤 얼굴이 있을까. 고개를 쪽 빼고 들여다보았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을 보았다. 너 뭐야, 말끝이 발끝에 가 붙은 물음에 나, 나, 나, 하고 더듬는 듯, 춤추는 듯 흔들리는 답이 돌아왔다. 바라보았다, 빤히, 알 수 없는 얼굴로. 그제서야 깨달았다. 얼굴인 줄 알았던 '면'이 '말'이었음을. 몇 겹이고 중첩되어 울려오는, 낯설지 않은.

p.109 그러니까, 나라는 사람은 곧 내가 생각하는 것이자 내가 느끼는 것이자 내가 읽는 것이자 내가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것들의 총합이거나 총합보다 훨씬 더 큰 무엇이었다. 다만 나는 나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읽고,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 건지 좀처럼 알지 못했다.

p.122 내가 내 이름을 입에 담던 그 순간, 나는 오래전 나도 모르는 사이 출발한 어떤 단어가 비로소 내게 도착했음을 깨달았다. 이윽고 공복처럼 텅 비어 있음에도 아스라이 반짝이는 허공의 귀퉁이에 이렇게 썼다. I am what I love.


'진진주'가 그 혼란스럽고 정신사나운 시간 바깥으로 걸어나올 때까지 누가 기다려주었느냐 묻고 싶었다. 낯선 균열 앞에 설 수 있게, 누가 당신 곁에 소음이 아닌 이름으로 머물렀느냐고. 부르고, 열고, 땀에 젖은 얼굴로 마주하라. 이는 밖으로 나오라고, 나가지 말고 나와, 나와 함께-이자는 요청이다. 기꺼이 혼란-하고 흔들리자는 초대다.

진진주의 사전에는 사랑이 없었다. 사랑이 있기 전까지는. 사랑을 잃기 전까지는. 잃은 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잃음'의 흔적 '나'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게 하므로. 균열하고, 흔들리고, 나날이 구질구질한 나날에, 삼킨 말들의 사전에, 새카만 덧칠에 되비치는 얼굴에, '진진주'를 나서는 '나'에게 말하고 싶다. 진진주 아닌 '내'가 찾아낼 말을. We are what we lose.

p.196 "얼른 밖으로 나와." 먼저 문밖 복도로 나선 펄이 나를 부르는 소리. 아니, 어쩌면 펄이 아니라, 시간이 나를 부르는 소리. … 그렇다면 그때 나는 어느 쪽으로 나가야 했을까? 시간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내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아님 내 안의 시간 밖으로 나가야 했을까?

p.222 이윽고 우리를 향해 걸어오던 두 사람이 순간적으로 우리와 나란해졌을 때, 이제껏 내 사전에 없던 눈 한 송이가 비로소 내 침묵 위에 내려앉았을 때, 이석기가 춥고 휑한 제 손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천천히 해요. 아직 시간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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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구는 왼쪽에 - 『자본』의 세계사와 마르크스 없는 한국사회
강신준 지음 / 사계절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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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사계절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죽었다! 하나의 유령이 요참난 한반도를 떠돌던 때, 한참 전부터.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죽었다. 죽고 있다. 침묵당한다. 그 죽음은 언제나 과거의 유산이었고, 현재의 공포였으며, 도래할 환상이었다. 너나할 것 없이 우경화 사회를 말하는 시대다. 청년도, 중장년도, 매스컴도, 일터도. '극우'라는 이름을 자랑스러워하는 한편 낙인이라 말한다. 우려와 분노와 절망과 염세가 뒤엉켜 구른다.

그럼에도, 의문한 적 없는가? 역사의 승리며 '인간 본성'까지 끌어붙인 자본주의를 위시한 사회는 왜 아직까지 고통스러운가? 어째서 실패와 붕괴로 누더기 땜질하듯 이어가야 하는가? 공산주의라는 '타락'은 무슨 이유로 상상의 여지 없이 부정되고, 영원한 위협이자 필연히 패망한 과거이기를 끝없이 요구받는가? 미래는 자본주의, 더해진 자본주의, 완전한 자본주의와 함께 침몰해야 할 운명인가? 아무도 이 '밖'에 살아갈 수 없을까?

p.77 자본주의의 교환은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 이들의 관계는 교환이라는 구조에서 평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일방적입니다.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 노동하는 사람과 노동하지 않는 사람, 판매만 하는 사람과 구매만 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대립적이고 배타적이며 적대적입니다. 노동빈곤은 이 구조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p.108 공동소유를 강화하려면 관계가 평등해야 합니다. (...)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까요?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먹고살 수 없게 됩니다. 먹고사는 일에 필요한 부, 즉 노동시간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이제는 자신이 직접 노동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사라지고 노동하는 사람만 남습니다.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는' 관계로 바뀝니다.


한국은 물리적 기반이 얕은 국가다. 사람에 의존하여, 아니, 인간 '자원'을 쥐어짜가며 연명해온 역사다. 바닥까지 싹 털려먹힌 식민지배에 짧고 혼란한 해방 정국, 전쟁과 파산까지 줄지어 겪었으니 사람도 사회도 단위가 짧고 규모가 작다. 우당탕과 엎치락뒤치락의 대명사가 아닐 수 없다. 대다수가 노동자인데도 노동운동과 노동자 혐오가 극에 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몹시 자연스러운 동시에 순전한 인위의 결과다. 다름을 상상할 수 없이 파멸과 공포 사이에 갇혀 진동한다. 와해되어 간신히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저자는 작금의 '극우 득세'에 짧고 굵은 지적을 던진다. 마르크스가 없는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폭주하고 사회는 길과 목표를 모두 잃었다고. 그 결과 이 지경이, 와해와 갈등으로 점철된 지경이 됐다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 정말로 와버렸고 여전히 변혁의 움직임이 꿈틀댄다. 선택하라. 일어서라. 노이로제와 무한동력처럼 끌어다 쓴 '마르크스 죽이기' 너머에 문이 있다. 비상구는 왼쪽에 있고 우리는 너무 오래 막다른 길에 매달려왔다. 갈 길이, 너무도 분명하지 않은가.

p.187 한국 자본주의는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는 수출 대자본과 억압적으로 수탈당하는 저임금 노동이 결합한 기형적 케인스주의로 편성되었습니다. (…) 한국의 케인스주의는 부족한 부분을 모두 수출로 메우는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이 구조에서 자본주의의 야만적 속성을 비판하는 마르크스는 눈엣가시가 됩니다. 매판 세력이 만들어놓은 마르크스 없는 사회가 계속 유지되어야 하니까요.

p.221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사회제도는 개인이 사망한 다음에도 이어집니다. 그 사람의 후손들이 거기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그래서 제도를 변혁하려면 그 제도를 변혁할 사람이 계속 필요합니다. 야만에 갇힌 한국사회가 문명으로 탈출할 방법은 하나입니다. 마르크스의 유산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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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뼈와 플라스틱 - 범람의 시대에 사라지지 않는 것
남종영 지음 / 북트리거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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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북트리거

심심찮게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번쯤은 우스개 반, 자포자기 반으로 내뱉은 적도 있을 것이다. 인류 멸종이 진정한 친환경이다. 인구 과잉 시대다, 인간 개체를 줄여야 한다. 동시에 동시에 지금의 일상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해외여행, 때마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 시장에 나오기도 전에 재고로 처박혀 쓰레기장으로 직행하는 옷이며 '소품'들. 경계를 넘는 사람과 물건, '자본', 대란템, 쟁여템.

'기후위기' 논쟁에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 되고도 남은 지금, 위기는 재앙이 되었고, 절멸로의 직통열차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도 몇 남지 않았다. 혹자는 말한다. 기술 개발을 열심히 해서 대응하면 되지 않을까? 또다른 누군가는 말한다. 우리 모두가 희생을 감수하지 않으니 이 꼴이 났다고, 불편한 삶에 다시 적응해야 한다고.

p.6 우리는 '범람'과 '은폐'의 시대를 산다. 그 어느 시대보다 치킨을 많이 먹지만, 정작 살아 있는 닭은 보이지 않고, 그 역사도 기억하지 않는다. 가장 값싸게 소비되어 변덕과 싫증으로 버림받은 플라스틱은 땅에 묻히고 잘게 쪼개져 바다에 은폐된다. 지구는 닭뼈와 플라스틱이 범람하는 행성이 되었다. 인류 활동은 지구의 물리, 화학, 생물학 시스템을 교란하여, 지금 지구는 1만 1만 1,700년 전부터 지속된 지질시대 '홀로세'의 평형에서 이탈해 새로운 지질시대를 맞고 있다. 인간이 창조한 지질시대, 인류세다.

p.43 지구를 착취하며 이득을 취한 이들은 인류세라는 용어를 통해 과거를 지우고 기술에 기댄 '새로운 시작'을 강조하려 한다. 반면, 선진국과 거대 자본의 욕심을 비판하는 학자들은 인류세가 이들의 과거 책임을 망각하게 하는 '탈도덕적인 효과'가 있다면서, 지배 계층에 강력하게 경고하는 개념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 "그렇다면, 이 파괴적인 시대는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가?"


고귀한 야만의 신화에서 알 수 있듯 인간의 환경파괴와 그로 인한 전지구적 붕괴는 현대인이 '자연 생태계'에서 쏙 빠져나와 만들어낸 작품이 아니라 현대의 전세계적 경제와 착취 네트워크가 인간이 감당 가능한 선을 아득히 초월해버렸다는 데에 있다. 싸고 빠르게 찍어내고 재빨리 치우고 묻어버린다. 애써 찾아낸 해결책을 외면하고 시시각각 밀려들어오는 위협을 임시방편으로 틀어막는다. 자본이 눈앞의 멸망을 막아주리라, 자본자본, 주문을 외치며.

그러므로 뭘 해보기도 전에, 이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문제라고? 작금의 현실은 모두의 책임이라고? 누가 '우리'인가? 내 집 쓰레기를 돈 주고 떠맡긴 집에서 냄새가 난다고 떠맡은 쪽에도 공동책임을 요구할 것인가? 모두의 책임은 역설적으로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게 된다. 본문에서 거듭 등장하는 '인류세'에 대한 비판의 일면에는 이런 지적이 있을 것이다. 모두의 책임인 동시에 모두가 같은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

p.61 자연만이 아니다. 에너지, 노동, 식량, 돌봄, 돈, 생명 등 일곱 가지가 '저렴해지는' 매커니즘이 자본세에 있다. (...) 플랜테이션 사업을 확장시킨 신용과 부채 매커니즘 속에서 돈도 흔해졌다. 무한히 팽창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화폐도 싸구려다. 생명도 싸구려가 됐다. (...) 무어는 저렴함이라는 무기가 플랜테이션, 나아가 자본주의가 확장하는 전략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인간과 동식물은 물론,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가능한 적은 비용으로 동원하고 있다.

p.218 인간의 번영은 지구의 번영에 의존한다. 행성적 경계를 침범해 지구 시스템이 망가지면, 인간은 아무리 경제가 성장해도 행복할 수 없다. 반대로 사회적 기초를 충족 못 하는 삶도 불행하긴 마찬가지다. (...) 자원을 개발하고 재화를 생산하지만, 생태적 한계는 넘지 않아야 하고, 그렇다고 해서 사회적 기초를 충족하지 못할 정도로 경제개발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직면해야 한다. 돌아갈 낙원은 애시당초 존재한 적 없었고 '전환점'은 지나친 지 오래라는 것을. '우리 인간'은 단 한 순간도 무구한 적 없었다는 것을. 그 앞에서 불편과 불행은 달콤한 환상처럼 달성 과제 따위가 아니다. 누가 누구에게 죄를 빌고 용서만 받으면 마법처럼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별다른 수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유일한 세계를 죄 파먹다 이 지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총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저자의 말처럼 "다섯 번째 멸종의 최대 수혜자"였던 인류는 "지금은 대멸종 사태 최대의 가해자가 되었다(133)". 유례없는 이 재앙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간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함께 살지 않으면 몽땅 끝장이라는 현실 앞에서 '정해진 답'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쉽지 않을 일이다. 그러나 오직 그뿐이다. 창백한 푸른 점에 살아가는 찰나의 생물. 어렵고 낯설어질 수밖에. 우리가 정말 '우리'이기 위하여.

p.273 어떻게 하면 '인류'를 경험할 수 있을까? 사물의 의회를 통해 비인간과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될 때, '나'는 비로소 '인간이라는 종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인류로서 나는 어떻게 지구에 대해 책임지고, 기여할 것인지 생각할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허공에 뜬 개념에서 벗어나, 비로소 발 디딘 현실의 땅 위로 착륙한다.

p.284 탄소 배출량 장부의 숫자를 '0'으로 맞추더라도, 누군가의 희생을 쥐어짜는 삶이 계속된다면, 그곳은 우리가 원하는 미래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해야 할 것은 단순한 탄소의 균형을 넘어, 이 행성에 동승한 가난한 사람들과 뭇 생명들과 맺는 '관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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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리 숍앤센터
설재인 지음 / 나무옆의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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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사람이 할 말이 있거든 분명하게 하며 주장할 바가 있다면 눈치에 휘둘리지 않고 밀어붙이는 것 또한 미덕이고 자질이라고 오래 주장해왔다. 정론이야 어떻든지 간에. 그런 이유로 시작부터 영 걱정스러웠다. 이 양반 작품을 한두 편 읽은 게 아닌데 과연 그간의 태도와 한계선을 뒤엎고 '바디 호러'의 본령인 피와 살점, 사방으로 흘러나오는 체액에 몰두할 수 있을지. 그렇게 탈규범과 이질성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을지.

결과적으로 기대 밖이라면 밖이나 퍽 실망스럽지 않은 형태의 밖이다. 그래. 버릴 수 없다면 휘두르는 것도 방법이다.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다면 답이 나올 때까지 부수고 뒤엎어 끄집어내는 것 또한 방법이다. 굳이 따지자면 인간의 본질이란 바이오동력 오물통 내지는 비용 많이 드는 온열가죽주머니 정도 아닌가.

p.18 어차피 대중의 미감은 주입된 대로 형성된다고 염 박사는 결론 내렸다. 만약 웨일홀에 널브러진 인체 기관들로 새 종족을 만들고서는, 아주 귀엽고 고급스러운 모습이라며 오랫동안 세뇌한다면 다음 세대쯤에는 그것들이 보편적인 반려동물이 되지 않을까?

p.235 그건 어쩔 수 없는 사고지, 누군가의 악의가 만들어낸 일이 아니니까. 허튼 짓, 모난 짓, 튀는 짓만 안 하면 편하게 평생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 대중은 그렇게 무엇이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중인지 모르는 채로 편히 희희낙락했다.


권력은, 거칠게 말해, 규정하는 힘이다. 내가 누구인지, 상대가 무엇일지를 규정하는 힘이다. 말을 정하는 힘이다. 옳고 그름의 선이 본래부터 그어져있지 않으니, 선을 긋고 지우는 것 또한 권력을 쥔 자의 권한이자 생리이다. '그'의 언어로 '나'를 변호하는 데에는 불가항의 한계가 있다. 착한 노예는 인간이 아니다. 주는 밥을 신나게 처먹은 가축의 끝은 도살이다.

누군가를 정말이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무치다 못해 죽기를 마다하지 않을 만큼 간절하게 매달리도록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엇인지 아는가? 비교다. 나와 같은, 나보다 더한 이가 차고 넘치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다는 것을 코앞에서 나자빠지는 '동류'들로 증명해주는 것. 결코 나의 의지에 달려있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노력에 달렸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

p.10 센터의 프랑들은 세 평짜리 방에 두셋씩 살았다. 각각의 방은 흙바닥과 철창으로만 되어 있었고, 그래서 옆이나 저 너머의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다 볼 수 있었다. 봉사자가 자신의 방을 지나쳐 다른 프랑의 방으로 향할 때마다 프랑들은 눈을 있는 힘껏 크게 뜨고 두 손을 턱 밑에 댄 채 눈을 깜빡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p.162 "존재는 취급에서 나와. 우리가 취급받는 대로 우리는 존재해. 너도 나도 다 쓰고 태워버릴 것으로 취급받지. 그러니까… 우린 마치 플라스틱 같은 거야. 쓸 땐 신나게 사용해놓고 나중에는 악한 것이라며 손가락질하겠지."


작중 풍경이 꼭 그렇다. 이 얼마나 여상하고 평화로운지. 흉한 것은 처박아 치우고 사랑스러운 순간만 냅다 쭉 빨아먹고 버리면 그만이니. 없는 것들이야 없는 대로 살면 그만이다. 못 산다고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실로 인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생겨먹었다. 이 세계는. 오래 전부터, 느리게 반복되며.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작가는 '있는 힘껏 크게 뜬 눈과 턱 밑에 괸 손'으로 호소하는 대신 묻는다. 아랫도리며 배때지 싹 까놓고 보면 대체 무엇이 인간이냐고. 그는 아름다운, 오래된 순리를 박살낼 작정이다. 독자를 향해 선전포고한다. 끝장나게 으깨 부수고 아주 곤죽을 만들어서라도 과연 어디가 얼마나 다르게 생겨먹었을지, 지금부터 똑똑히 보여주겠다고. "머리가 왕왕 울리고 밑이 쑤시는(298)" 감각을 뇌리 깊숙이 때려박을 참이라고.

p.133 "네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어. 세상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어.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을 솎아내기만 해도 충분해. 혹시 인간을 공경한다는 죄책감이 든다면 마음을 편히 먹으렴. 그 사람들은 짐승만도 못하니까, 괜찮아."

p.276 그래, 뭐, 아무래도 좋았다. 이왕 받은 거 실컷 써주리라 다짐했다. 이게 정의라고 애써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것은 생존이었다. 약자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었다.


세상이 망한다고 울부짖는 자는 그 세상에서 안주하는 자 뿐이다. 얻어맞는 자는 안다. 나를 짓밟는 저것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 또한 나, 무수한 '나'들이라는 사실을. 큰 불은 불씨를 삼킨다. 화근이 세상을 불살라버리는 꼴을 보여주겠다. 읽는 이가 불길의 어느 편에 서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당신 말은 누구의 혀인가? 누가, 무엇이 '나'이겠는가?

마지막에 도달한 독자는 분명 살자고, 살아야겠다고 외치는 이들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더럽혀진 얼굴로 시원하게 웃어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불안하고 불온한 존재의 등을 있는 힘껏 밀어주고 싶어질 것이다. 물론 어디서 어떻게인지가 문제겠지만…

p.164 "씨발, 밑이 뜨겁다고! 좋다고! 살자고!" 노엘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이렇게 똑같은 기분을 느끼는 걸까, 그게 우습고 신기해서였다. 비가 아무리 내려도 당겨진 불을 끌 수는 없을 듯했다.

p. 273 프랑이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인간들이 제 편의를 위해 만들어낸 가련한 생명들이 어떻게 하면 탄생의 굴레를 벗고 자유로이 생존할 수 있는가? 서로를 구원하는 것이 방법이었다.


*서평도서제공: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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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영원한 고전, 철저한 고증,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 <오디세이>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호메로스 지음, 김헌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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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도서제공: 을유문화사

최근의 영화화로 흥행작의 원작! 이라는 황당무계한 타이틀까지 달게 된 이 불멸의 고전을 보라.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떠도는 자들의 슬픔을 노래하게 한, 전율과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무엇이 남는지 묻고 또 묻게 한 바로 그 작품을, 감춰진 이름, 오래 고통받았으나 끝내 지워질 수 없었던 이름들을, 『오뒷세이아』를.

『오뒷세이아』의 내용은 오랜 세월 변주되며 잘 알려져왔고, 수많은 영웅들과 괴물에 대해서도, 온갖 비유와 상징, 현실과 신화를 넘나드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는, 나 같은 독자가 분명 수두룩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를테면 같은 표현이 어떻게 이 괴물과 저 용사에 같고 또 다르게 붙어지는가?

p.356 제10권 이렇게 말하자, 부서져 내렸소, 그들의 소중한 심장이, 떠올랐던 것이오, 라이스트뤼곤인 안티파테스가 한 짓이, 심장이 큰 퀴클롭스가 남자를 먹어 치우던 폭력이, 그들은 쟁쟁하게 울었소,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러나 어떤 일도 일어나진 않았소, 눈물 흘린다고.

p.357 제10권 밖으로 튀어나온 건 심장이 큰 에우뤼로코스의 제비였소. 걸어서 갔소, 그와 함께 스물 두 명의 동료가 울면서, 뒤에서 애곡하는 우리를 두고 그들은 떠났소. 발견했소, 골짜기에 깎아 다듬은 바윗돌로 지어진 키르케의 집을, 사방이 잘 보이는 곳에서.


뿐만 아니라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사람 간의, 혹은 신과 인간 사이의 의례에 초점을 맞춰 읽는다면 줄거리나 개별 신격을 중심으로 읽을 때와 어떻게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물을 만하다. 『일리아스』에서 보복과 전투, 장례, 감사제가 반복해 나타난다면 『오뒷세이아』의 경우에는 환대와 이방인-손님, 물리적/개념적 가정 구성의 안팎 그리고 속죄의식과 보속에 대해 반복해서, 점진적으로 그려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죄의 형태나 속죄의례, 그에 필요한 고난과 해결에 대해서도? 설령 그 죄에 어떠한 의도나 자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부정' 의 '옮겨붙음'이 조선, 중국의 중앙집권형 군주제 국가에서의 연좌죄 개념의 그것과는 퍽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신'과 그의, 저주나 벌에 대한 인식, 속죄-정화를 위한 과업과 절차 등에서 나타나는 인물 간의 해원이나. 세계관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p.195 제4권 '너에겐 아직 운명이 아니네, 사랑하는 이들을 보는 것도 잘 지은 집과 그대의 조국 땅에 이르는 것도, 아이귑토스의, 곧 제우스로부터 떨어지는 그 강의 물로 다시 가서 신성한 헤카톰베를 바치기 전에는, 불사의 신들에게, 넓은 하늘을 차지하는 그분들께. 바로 그때 그 신들께서 허락하실 거네, 네가 갈망하는 여정을.'

p.349 제10권 나는 말했소, 심란한 심부로. '나를 해쳤소, 못된 동료들이, 그들에 더해 지독한 잠까지. 고쳐 주시오, 친구들, 그대들에겐 능력이 있잖소.' 이렇게 말했고, 부드러운 말로 호소하면서. 그들은 조용해졌소. 아버지는 이야기로 응답했소. '꺼지시요, 섬에서 빨리, 산 자들 가운데 가장 치욕스럽소! 내겐 법도가 아니오, 돌봐주는 것도, 보내 주는 것도 복된 신들에게 미움받은 그런 남자를 말이오. 꺼지시오, 불사신들에게 미움받았기에 이리로 온 것이니.'


유비에 관해서도 눈여겨 볼 만한 장면들이 많다. 구혼자들의 만행과 귀환한 오뒷세우스의 보복에서 반복되는 제물-포식과, 부자간의 해후에서 반전된 형태로 제시되어 그 비극성을 더하는 새끼 잃은 맹금의 비유라든지. 직접적으로 제시된 이미지 뿐만 아니라 이런 건 어떨까. 페넬로페와의 해후에서 보여지는 나무를 통째로 쓴 침대가 오뒷세우스의 귀환 가능성을 암시 혹은 담보하고 있었다든지.

같은 수사를 사회적 신분이 다른 이들에게 부여하는 장면들 또한 재미를 더하는 요소 중 하나다. 돼지치기, 장군, 왕비 모두에게 고귀함과 탁월함이 있다. 그들 자신의 성품이 그러하다면. 고난을 이겨내 끝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면 더더욱!

p.539 제16권 텔레마코스는 부둥켜안았다, 훌륭한 아버지를, 애탄했다, 눈물을 쏟으며. 그 둘 양쪽 모두에게 애곡의 욕망이 솟아 올랐다. 울었다, 쟁쟁하게, 맹금류들보다도 더 요란스럽게, 수염수리나 갈고리발톱의 독수리들보다도, 그놈들 새끼들을 사냥꾼들이 날지도 못하는데 잡아갔을 때보다도. 그렇게 그들은 눈썹 아래로 연민스러운 눈물을 떨구었다.

p.705 제22권 발견했다, 곧이어 오뒷세우스를 죽임당한 시체들 사이에서 피와 선혈로 얼룩진 그를, 마치 사자와 같았으니, 그놈은 들판에 있던 소를 잡아먹은 뒤 떠나가는데, 보라, 그놈의 가슴과 양쪽의 볼때기가 온통 피범벅이었으니, 무서웠다, 얼굴을 쳐다만 봐도. 그렇게 오뒷세우스는 얼룩졌다. 두 발과 위쪽 두 손이.


『오뒷세이아』는 수천년의 세월과 동서고금을 넘어 마음 깊은 부분을 건드리는 불멸의 고전으로 남아 있다. 동시에, 여전히 수많은 질문과 새로움이 솟아나는 샘이기도 하다. 명쾌한 정답과 딱 떨어지는 해결책을 주지 않음에도 수많은 이들이 전율하고, 마음에 새기며 지도로 삼아온 이유는, 어쩌면, 그 이야기의 본질이 인간사, 인생의 기저에도 닿아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오늘의 독자, 내일의 관객, 또다른 언젠가의 작가는 이 이야기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언제, 어디의 누구든 또다시 낯선 닮음을 보게 되리라 믿는다. 그 길에서 분노하고, 두려워하며, 전율하고, 슬퍼하며,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형상을, 만물에 깃든 신의 그림자를 읽어낼 것이다. 인간이, 여전히, 인간인 한...

p.212 제4권 "자고 있니, 페넬로페, 소중한 심장으로 애통해하면서? 맘 편히 살아가는 신들은너를 그냥 놔두진 않을 거야, 울게도 괴로워하게도, 아직 귀향할 수 있으니까 네 아이는, 신들에게 무슨 죄를 짓지는 않았으니까."

p.569 제17권 그놈을 전엔 젊은 남자들이 데리고 나가 야생 염소와 사슴과 토끼를 쫓게 하곤 했었는데, 주인이 떠나고 없는 그때 버려지다시피 누워 있었다, 똥 더미 속에, (…) 거기에 개가 누워 있었다, 아르고스가 진드기 투성이로. 바로 그때, 그놈이 보았다, 가까이에 있는 오뒷세우스를, 꼬리를 흔들었고, 양쪽 귀를 아래로 내렸지만, 더 가까이 더 이상 그때 주인에게로 다가갈 수는 없었다.

#오뒷세이아 #을유문화사 #을유문화사_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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