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놀 - 도덕적 선입견에 대한 생각들 세창클래식 15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이동용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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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창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단언컨대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많이, 가장 크게 오독되는 철학자를 꼽으라면 니체!를 외치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니 '억울한 철학자 대회'가 열린다면 니체는 사흘밤낮을 울어제껴도 말릴 수 있는 이가 몇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좋아하는 철학자로 마키아벨리와 니체를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장 도망치라는 우스개가 다 돌겠는가. (솔직히 이건 나도 좀 움찔한다. 그치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어째서일까. 아마 겉핥기로 입혀진 이미지에 홀려 무작정 돌진했다가 맛도 채 보기 전에 나온 사람이 수두룩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망치를 든 철학자', '신은 죽었다', '노예의 도덕' 등 자극적인 수식어에 솔깃하기 때문일까? 각자의 사정이야 알 수도 알 바도 아니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그의 철학이 그의 생애가 그러했듯 타오르는 것처럼 치열하기 때문이리라. 세상을 향해 망치를 휘두른 철학자, 삶의 많은 순간에 주저앉고 붕괴된 철학자, 누구보다도 뜨겁게 타오르고 종내엔 자기자신마저도 불사른 철학자, 누군가에게는 신성모독자, 또 누군가에게는 광인, 누군가,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 누군가에게는 신성모독자, 또 누군가에게는 광인, 누군가, 그러니까, 나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 니체.

이 책은 잠언집이지 교훈집이 아니다. 모든 문장과 글에 고개를 주억거리며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은 니체에게도, 니체가 지향하는 이상향의 인간에게도 모욕적인 일이 될 것이다. 매순간은 아니더라도 자주, 돌부리에 걸려넘어지듯이 읽었다. 모든 꼭지를 소개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의미가 없으니 인상깊었던 문장과 주석, 그간의 메모를 일부 적어둔다.

p.53 허무주의의 도래는 일종의 '부질없다'는 인식이 와 주는 것이다. (...) 모든 것은 그 부질없다는 말로 절망의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의 상태는 극복을 요구한다. (...) 부질없음을 극복하기 위해 그 부질없던 감정을 짓밟고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극복을 위해서는 극복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잔인함이 허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메모. 허무주의는 궁극적으로 투쟁, 투지의 철학인가?)
p.67 미덕으로서의 정교해진 잔인함. (...)우월의 도덕이 결국에는 정교해진 잔인성에 대한 쾌감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여전히 너무도 역설적이고 거의 고통스러울 만큼 새로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 두 번째 세대에서는 이미 잔인함의 쾌감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습관 자체에 대해서만 쾌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바로 이 쾌감이 '선'의 첫 번째 단계다.
p.133 동정을 일삼는 기독교인. 이웃의 고통에 대한 기독교적 동정의 이면에는 이웃의 모든 기쁨, 즉 그가 원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기쁨에 대해 깊이 의심하는 측면이 있다. (메모. 전능하고 선한 유일신의 세계에서 타자에 대한 도덕은 배제와 처벌을 전제하는가?)
p.232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태에 대항해서, 그동안 이기적인 것으로서 비난받아온 행위들을 행할 수 있는 선한 용기를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그것들의 가치를 회복시키고 싶다. (...) 우리는 행위들과 삶의 모든 모습에서 악한 것으로 인식되는 겉모습을 거둬 낼 것이다! (...) 사람이 자신을 더 이상 악하게 간주하지 않으면, 사람은 악하기를 그만둘 것이다! (메모. 니체가 양차대전기를 살아냈다면 그의 인간본성론은 지금 전해지는 것과 다른 내용이었을까?)
p.402 가장 위험한 망각.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잊는 데서 시작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사랑할 만한 어떤 가치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으로 끝낸다.
p.427 자신의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해. 자신의 품위와 중요성의 감정을 만들어내기 위해 희생될 타인을 구하는 자들은 긍지에 찬 사람들로 보인다. (...) 그들은 잠시 자기 자신의 비참함을 넘어서기 위해 그들 주변의 비참함을 필요로 한다! (메모. 현대 1인미디어의 범람, 자극적인 고통의 전시와 장기적이고 다양한 삶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계발론이 도덕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비판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참 칼침 맞아 죽지 않은 게 용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신랄하다. 순간순간 의구심을 품은 부분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무례하게까지 느껴지는 비판들에서 호소와 절박함을 읽어내게 된다. 그의 외침이 끓어넘쳤던 시대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을 곱씹어보노라면, 그래, 조용히 중얼거리게 된다. 일상의 어느 순간에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깨닫는 것처럼.
그러니 앞서 이야기한 '꺼림칙한' 이미지를 정확히 말하자면, 니체가 아닌 니체의 일면을 곡해하는 사람에 대한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차라투스투라도 짜라두짜도 니체도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지배론이나 모든 것을 근성으로 치부하는 자기계발론을 말한 적이 없다.
니체를 사랑하는, 그의 칼날같은 비판을 사랑하고 그에게서 타인을 짓밟고 올라서는 승자의 논리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연민과 삶에 대한 사랑을 읽어내는 이와 같이, 지쳐 쓰러져 하염없는 채찍 아래 늘어진 나귀를 끌어안고 통곡했다던, 무너져내린 마음의 철학자가 세상에 전하는 호소에 마음아파하고, 부끄러워하고, 끄덕이고, 분노하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니체를 차별과 혐오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을 경계한다.

덧. 목차에서는 본래 원문에는 순서가 없었으나 출판사가 전집 발간 시 편집상의 편리함을 위해 차례를 더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의 의도대로라면 순서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리리라. 이 판본 또한 분권화된 목차를 따르고 있으나 마음 내키는 대로 앞뒤를 오가며 읽어도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목차에 따라 읽는 것과 그날그날 펼쳐지는 부분에서 뛰어넘고 돌아가며 읽는 것 두 가지를 다 해보았으나 경우마다 색다르게 좋았으니 각자의 성향에 맞게 읽기를 권하고 싶다.
자칫 잘못 이해하기 쉬운 원문 곳곳에 옮긴이의 주가 더해져 이해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원문 텍스트에 대한 보충설명 뿐만 아니라 원저 출판 당시의 사회상, 역자의 개인적인 견해가 함께 담겨있어 깊고 넓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니체의 『아침놀』과 역자의 『아침놀 주해』를 함께 읽는 느낌. 니체과 그의 저작에 대한 관심은 있지만 선뜻 펼치기엔 겁이 나는 독자에게 친절한 발판을 제공해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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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스티븐 킹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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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황금가지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식스 센스"를 아는가. 지금이야 반쯤 고전(사람에 따라서는 퇴물) 취급이지만 처음 수입되었을 땐 희대의 센세이션이었던 그 영화. 만일 죽은 사람을 볼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일까? 주인공이 멋지게 활약하고 반쯤 날아다니는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럴 지도 모르겠다. 죽은 자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파악하고 그들과 소통하고... 그런데 만약 그들의 몰골이 영 처참하다면? 얼굴이 반쯤 날아가고 없다든지, 그때도 그걸 어떤 강점 비슷한 단어로 부를 수 있을까. 더욱이 본인 의지와는 하등 관련 없는 일이라면. 이쯤되면 이 꼬라지 안볼란다! 하고 눈을 뽑아버려도 썩 할 말이 없을 것도 같다. 애절한 그리움과 미련, 중요한 진실을 파악하고 활약하는 우리의 주인공! 비슷한 게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기고픈 게 하나쯤은 있고 그걸 알아내도 좋을 게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이야기는 밑도끝도 없는 사과로 시작한다. 제이미 콘클린, 우리의 주인공, 챔프. 때로는 모든 게 지나고나서야 풀어놓는 이야기가 더 무서울 때도 있다. 그러니 아예 말을 해주지 않는가. "이건 공포물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잘 읽어보길 바란다(p.12)."라고.
작중 주인공은 수차례 이것은 공포물이라고 언급하지만 공포보다는 슬픔이 느껴졌다. 물론 그 어린아이가, 아니 누가 겪기에도 지나치게 잔인했고 견디기 힘든 일이었겠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가 누구의 입장에서 쓰여진 것인지를 알고 있다. 작가가 쥐어주는 독자의 특권이랄까. 성장기이자 이별기에 가까운 이야기다. 이별과 상실의 의미를 깨닫고, 고난과 애도의 과정을 거쳐 한층 크게 자라나는 그런 이야기. 어쩌면 상실에 익숙해지고 삶의 굴곡과 타인의 악의, 개인적인 삶을 이해하는 과정이 곧 성장이 아닌가. 분명 장르소설이다. 재미를 위해 쓰인 작품이지만 그 안에는 어린 아이의 성장통과 저자가 겪어온 시간이 담겨있다.
"하나만 더 여쭤봐도 돼요?" 바보같은 질문이었다. 죽은 이들은 우리의 질문에 반드시 대답을 행만 한다. 그 대답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 "응." 나는 질문을 했다(p.243).

거장의 귀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지는 않다. 일단 집에 간 적이 없는데 어딜 봐서 귀환이에요... 거장의 출근, 정도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짧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도 재미가 보장된. 300쪽이 넘는 내용, 소설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짧은 분량은 아니지만 앉은 자리에서 쭉 읽어내릴 정도로 흡입력있는 문장이다. 활자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글쓰기에는 아주 통달한 양반이 아닌가. 역시.
죽은 작가의 미완작을 대필하는 장면에서는 스티븐 킹이 죽으면 저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잠시 상상해봤지만 허연 알궁둥이(조금 점잖게는 '배관공의 계곡')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글을 읽을 이들과 미래의 나를 위해 여기까지만 말하기로 하자.

개인적으로 다소 아쉬운 분량이기는 하다. 개인적인 마음으로는 그 모든 일 이후로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 능력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시시콜콜 하나하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급으로 상세히 써주기를 바란다. 회고록이 아니라 일대기였으면 좋겠다니까요, 한 열 권쯤 되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지만. 연작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는 않으나 때로는 아쉬워도 딱 이만큼이 적절할 때가 있다. 작중의 미완작이 이 작품과 겹쳐지거나 또다른 세계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또다른 제이미 콘클린이 대필을 가능케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누구 하나는 유령이 되어야 하니 그건 좀 아쉬우려나.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언젠가는 알게 될 수도 있겠지.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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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할 권리
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김수민 옮김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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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알라딘에서 이런 리뷰를 보았다. "소위 '섹스할 권리'라는 게 있는 것 마냥 작동하는 욕망의 역학이 한국에서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Justread, 2022)."
선거권 보장으로 대표되는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 운동은 여타 인권운동과 마찬가지로 숱한 부침을 겪고 반대와 의혹, 조롱에 부딪혀가며 발전해왔다. 주류 남성 집단을 포함한 외부로부터의 탄압과 공격은 말할 것도 없고, 기본 전제로서의 '우리'를 식별하는 일조차 한순간도 조용할 날이 없지 않았던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21세기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지금의 위치와 나아가야 할 길을 어떻게 말하고 또 넓힐 수 있을 것인가.
저자 아미아 스리니바산은 숱하게 제기된 문제라고 할 수 있을 여섯 가지 논제를 통해 페미니스트 독자들과 그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페미니즘은 도덕주의와 궤를 같이하게 될 것인가? '위험요소'를 차단하고 '정신적인 가치'에 몰두함으로써 '올바른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

각 장의 제목이기도 한 주제들은 잊을만하면(이 수식어가 진정으로 느껴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차고 넘칠 것이라는 확신에 더 화가 나지만) 온갖 인터넷 게시판과 칼럼, 토론 프로그램과 정치인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내용들이다. 혹자는 진정성을, 또 다른 누군가는 자율성과 무결성을 그 때 그 때 입에 맞게끔 곡해해서 떠벌리고 그것이 곧 페미니즘 자체와 페미니스트들, 페미니즘의 주체가 되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공격이 되는 상황이다.
"누가 남성을 음해하는가?', "섹스할 권리". "포르노를 말한다",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 한국 사회에서 'me too 운동' 이전에도 유구하게 존재해왔던 '꽃뱀 신화'를 모르는 이가 몇이나 될까. 아마 잠재의식 속 희미한 편견으로라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정말 허위 고발이 늘었을까? 정말 '간악한 여성이 강력한 처벌법을 이용해 선량한 남성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시도'가 크게 증가했으며 그것은 실질적인 위협으로 느껴질 만큼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가? 누구에게나 성적 접촉을 할 권리가 있는가? 성적 접촉 또는 관련 행위를 통한 욕구 충족은 국가 또는 사회가 개개인에게 보장해야 할 권리에 해당되는가? 한때 한국에서도 제기되었던, 남성장애인에게 성적 욕구를 해소할 대상을 제공하는 것을 복지라고 할 수 있는가? '아무도 욕망하지 않을 못생기고 사악한 여자들'이 '매력적이고 순종적이지만 성적 적극성을 띄고 나와 접촉할 여성'을 탄압하고 있는가? 포르노는 여성억압에 일조할 뿐만 아니라 성적 물화의 원인으로 기능하는가? 여성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면 그것만으로 성평등과 권리신장은 가능한가? 여성 자신의 성적 욕망은 어떻게 간주되어야 할 것인가? 4B운동은 유의미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학습지도자 위치에 있는 남성이 여학생과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은 개인의 자유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교수자와의 성관계를 통해 학생 또한 일종의 권력 위계나 성적 만족감을 획득하지 않는가? 무엇보다, 성인간의 '상호합의'를 통해 이루어진 일이 아닌가?

어쩌면 이 책을 읽을 페미니스트 또한 (높은 확률로 읽지 않을) 안티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저자의 질문과 지적에 반감을 표할지도 모른다. 명쾌한 해답을 주지 않는 데에 불만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와 너희를 딱 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근본적으로는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해야 할 일이 아니던가? 유구히 제기되어온 이 문제에 언제는 나아갈 방향이 없었으며 해야한다고 다 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고뇌를 주는 책이고, 불편감을 주는 지적들이다. 그러나, 불편한 일은 불편하게 해야한다. 나의 편안과 권력과 쾌감이 누군가를 짓밟아야 얻어낼 수 있는 것이라면 온당히 그 발을 치우고 함께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한다. 혹자는 묻는다. 그렇게 된다면, "페미니즘은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성적, 경제적, 심리적, 신체적 종속을 끝내면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묻는다(p.8)." 이에 저자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도 모른다고, 한번 해본 다음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자고(같은 쪽)."

화려한 수식어보다, 강렬한 추천사보다 직접 읽었을 때 휘몰아칠 분노와 혼란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질 저작이다. 이 책이 새로운 고전이 될 수 있을까. 바라건대,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언젠가는 지금의 폭력과 차별을 부끄러워하고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길 수 있기를 바라며 서문의 일부와 인상깊었던 문장으로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페미니즘은 다양한 이해관계가 언제나 하나로 수렴될 것이라는 환상, 우리의 계획에 예상 밖의 일이나 달갑지 않은 결과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환상, 정치가 안락한 장소가 될 것이라는 환상에 안주할 수 없다(p.13)."
"한 무리에게 샌드위치를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타당할 수 있지만, 섹스에 대해서도 똑같은 요구를 할 수는 없다. 여기서 통했다고 저기서도 통하란 법은 없다. 섹스는 샌드위치가 아니며 사실 다른 어떤 것과도 같지 않다. 정치적으로는 이토록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이만큼이나 침범할 수 없는 사적 영역은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좋든 나쁘든 우리는 있는 그대로 섹스를 이해할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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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러닝
이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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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이 책을 읽을 어느 독자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니까,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있어? 구질구질하고 뜨겁고 축축하고 또 이해할 수 없는 애도에 대해서 말이야. 울음이 터지고 아름다운 이별의 시를 읊는 대신 초라하고 불가해한 말들, 땀과 턱끝까지 치받는 숨을 몰아쉬는 그런 애도, 그런 사랑, 끓어오르고 썩어갈 듯 고이는 그런 마음들에 대해서 말이야. 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작중 인물들에게 어떤 논리적이고 올곧은, 합리적이고 존경할만한 이상향을 기대한다면 채 열 장을 읽지 못하고 덮어버릴 지도 모르겠다. 표제작 '나이트 러닝' 조차 이게 말장난인지 상상인지 코메디인지 알 수 없는 사건들의 나열 아닌가. '한쪽 팔을 잘라서라도' 잃어버린 사람을 만나고싶다는 그 마음이 자르고 또 잘라도 돋아나 어느새 한가득 쌓여버린 팔의 무더기와 다를 바가 있을까. 그것을 무엇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너무 많아 태워버리려 놓은 불이 온 산에 번져버리고 살기 위해 내달려야 하는 그 마음을 그리움,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p.31 "나도 그 마음을 알아요. 팔을 자르는 마음." (...) "한쪽 팔을 잘라서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다면 저는 양쪽 팔을, 다리를 다 잘랐을 거예요."
p.32 남들이 볼 땐 희비극이 공존하는 죽음이었지만 우리에겐 비극뿐이었다. 그리고 잔느는 지금도 매일 팔을 자르고 있다.

p.100 "뜨거우니까 걷자는거야." 속죄에도 적절한 온도가 있는 걸까. 정말로 참회한다면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게 맞겠지만 선글라스에 양산까지 장착한 유구에 비해 민얼굴, 맨머리의 나는 좀 불공평하다고 여겨졌다. 게다가 속죄 당사자는 내가 아니라 유구가 아닌가.
수록작 '우리가 소멸하는 법'은 떠나간 존재 교호를 중심으로 한 나와 유구의 대화로 진행된다. 시인 기형도의 죽음에 김훈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지.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생사를 거듭하지 말아라. 인간으로도 축생으로도 다시는 삶을 받지 말아라. 썩어서 공이 되거라. 네가 간 그곳은 어떠냐...... 누런 해가 돋고 흰 달이 뜨더냐."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김훈의 추도문을 떠올렸다. 다시는, 다시는. 남겨지는 일은 때때로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보내는 일과도 같다.
총 여덟 편의 이야기, 그 안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참... 뭐랄까, 나사빠진 사람이랄까, 어딘가 서툰 면이 있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모두가 사랑스럽고 또 아슬아슬하다. 이 넓은 우주 속 찰나의 시간을 스쳐지나가는 우리가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일은 가능할까. 고작 한 인간의 생애도 다 알지 못하는 것을. 현존의 부재를 넘어 부재의 현존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애도라면 이 책은 애도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결핍과, 상실을 견디고 혀끝으로 굴리며 끌어안는 사람들의 이야기들.
p.119 엄마가 죽어버렸다고 나를 버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엄마도 엄마 자신의 삶과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누나가 집을 나가버린 일도 같은 이치다. 그렇지만 외로울 때는 옷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들이 같이 있었을 때만을 기억한다. 교호를 만나고부터는 사는 게 덜 무서었다. 어쩌면 나의 어둠이 교호를 채워서 그곳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교호는 사방에서 어둠을 모으고 있었다.

작가 이지는 연민과 애도와 잔류하는 감정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 누군가에게는 구질구질함이고 누군가에겐 절절한 사랑 혹은 그리움 혹은 차마 떼낼 수 없는 어떤 감정의 찌꺼기들을 한 데 그러모아 끌어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고 서러운 그 마음에 말을 얹지 않고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때로는 비지땀을 흘리고 코를 훌쩍이면서 사는 이유가 뭔지, 뭘 어쩌자고 이 고생을 하는건지, 그 때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가만히 들여다보는 그런 문장들, 그런 글. 살아가게 하는 이유가 뭘까. 오늘의 나도 다가오는 추위에 조금 옹송그리며 곱씹어본다. 스쳐지나간 모든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나이트러닝
#이지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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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칼라하리의 절규
델리아 오언스 / 살림출판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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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살림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데다 광막하다기엔 심히 옹졸한 규모의 자연을 맛본 것이 전부일 대다수의 현대인에게 '야생의 경이'란 아마도 미디어의 편집과 가공을 거친 이미지로만 존재할 것이다. 나또한 그렇듯이. 끝없는 대지, 혹은 바다. 한줄기 빛도 없는 울창한 밀림 또는 작열하는 태양과 불길, 모래바람을 피할 곳 없는 메마른 땅. 인간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곳에 극히 미미한 존재로 자리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사나운 야생의 땅. 나약한 인간의 문물이 아닌 날것 그대로의 거칠고 잔인한 삶.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들불과 가뭄, 찰나의 폭풍우가 피워내는 풍요의 시기. 사막에서 들판으로, 다시 모래와 마른 풀의 땅으로. 그곳에서도 생명이 살아간다. 태어나고, 사라지고, 오고 가며, 머물고 떠난다. 도처에 생명을 가진 것들이 살아가지만 인간은 없다. 냉혹한 그곳은 인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겸허히 몸을 낮추고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 분투하지 않는 한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다. 인간이 작아진다면, 찰나를 살아가는 오직 몸 하나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슬며시 장막을 걷고 머무름을 허락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꼭 허락되는 만큼, 딱 그만큼만.
그곳에 젊은 부부가 있었다. 무슨 용기인지 전재산을 홀랑 털어 알거지 직전이 되어서는 현지인들도 감히 접근하지 못한다는, 지도조차 없는 야생에 제발로 뛰어드는 두 학자가 있었다. 델리아와 마크 오언스, 이들의 이야기는 그들의 열정으로 시작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한폭을 뒤로하며 끝난다.

흔히 '탐사'라 함은 용감한 대원들과 모닥불이라든지, 웃음과 경이, 위대한 모험이 함께하는 제법 유쾌한 그림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과연 그럴까. 그것만이 탐사라면 이들 부부의 이야기는 고생... 그것도 아주 생고생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순탄한 때가 없다. 아름다운 이야기와 야생에서의 우정? 속편한 소리다. 우정은 무슨, 소득은 무슨. 시작부터 굶어죽거나 말라죽거나, 운이 좋으면 홀라당 잡아먹히는 것 중 하나를 고를 판이다. 희망은 보이지 않고 물부족 돈부족 체력부족 장비부족... 사랑은 무슨, 우정은 개뿔. 도처에 널린 것은 고난과 역경 뿐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와중에도 손길을 내미는 이가 있다. 생판 모르는 낯선 이를 환영하고 가진 것을 모두 나누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이상한 냄새와 소리가 나는 무언가 정도로 여겨졌겠지만) 다행히 가까이서 관찰하고 숨쉬고 잠드는 것을 허락하는 동물들이 있다. 혹독한 곳에서 피어나는 것은 그런 감동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야기에서 따뜻함을 느낀다. 아주 작고 미미하다는 점에서, 손을 뻗고 숨을 죽이고 몸을 낮추고, 경계심을 누그러뜨려야만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그 거리를 말하는 이들에게서. 아마도 이 젊은 학자들이 가져온 것은 빛나는 별과 짐승의 생태 뿐만이 아닐 것이다. 거대한 곳에 작게, 함께,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모든 생명과 터전,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에 관한 경험일 것이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가득 담은.

먼동이 트는 하늘, 혹은 태우듯 물들이는 해질녘의 노을을 보라. 쏟아져내릴 것만 같은 별로 가득한 밤하늘을 보라. 물결치듯 일렁이는 저 먼 산을 보라. 손가락 사이로 흩어져내리는 모래와 세차게 흐르는 물과 갓 돋아나 어리고 작은 생명을 보라. 문득 그것이 대상이 아닌 나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 때, 떨리는 손이 두려움 때문인지 벅찬 감동 때문인지 알 수 없을 때, 비로소 나 자신이 자연 안에 존재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지구상에 야생이라고 부를 만한 부분은 크게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사자와 별과 바다와 숲을 동경하면서도 그것들을 파괴하는 데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칼라하리의 절규』는 고전에 가까운 시대의 것이지만 그때와 지금의 인간은 달라진 면이 없고 그 가차없는 파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이상 동경과 낭만의 이야기로 읽혀서는 안 될 책이기도 하다.
지금 바로 여기, 찰나의 순간에 존재하고 이내 흩어질 작은 인간 존재를 절감할 때 비로소 제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피가 튀고 뼈가 드러나고 먼 데서 알 수 없는 울음과 바람이 밀려오는 곳, 타오르는 태양과 피할 수 없는 들불과 모래와 비와 죽음과 삶이 한 데 존재하는, 지금까지도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존재할, 그래야만 하는 곳, 칼라하리의 절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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