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 - 어떤 공주 이야기
연여름 외 지음 / 고블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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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고블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오래 간직해온 문장이 있다. 어느날 갑자기, 마음에 박혀 잊히지 않는 말, “배경으로 밀려난 이들에게 전경의 지위를 돌려주는 일”. 어렸을 적 읽고 들으며 자라온 공주이야기에는 하나같이 삶을 상실한 여성들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어떤 비범한 신분이나 천상의 성품을 타고난 존재로서 유순하고 아름답게 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이의 뜻에 따라 삶의 향방을 내맡겼다. 그런 이야기들은 주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식의 두루뭉술한 결론으로 끝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전부일까? 가난하고 고통스럽고 비천하고 저주받은 삶에서 “왕자”를 만나 그의 품안에서 살아갔다고 말해지는 이들의 삶은 정말 그게 전부였을까? 그들에게는 꿈이 없었을까? 나와 함께 가자며, 자신이 운명의 짝이라 주장하는 이의 손을 뿌리치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만일, 그들이 다른 시대 또는 세계에 존재했다면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 아니, 지금을 살아가는 “공주”은 얼마나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이 책에 실린 배경도, 시대도, 심지어 종족마저도 다른 여섯 편의 이야기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잘 알려진 옛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주인공이 지고의 선인이라거나 빼어난 미인이라든지, 우연한 행운으로 영원한 행복을 거머쥐었다는 전설인지 괴담인지 모를 모호한 운수대통이 아니다.

그저, 분투하는 여성이 있다. 삶에 맞서고, 폭력에 맞서는 여성들이 있다. 그들을 핍박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세계이다.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속한 세계가 그들의 존재를, 삶을, 자유를 부정하는 데 결코 좌절하지 않는 여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아니 할 수 있대도 결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벽을 부수고 천장을 뚫고 날아오르는 이들이 있다. 악착같이 생을 거머쥐는 이들이 있다. 설령 온 세계가 그들을 인형, 부속품, 열등한 존재라 깔아뭉갤지라도.

p.102 지구인들은 생식 욕구를 탕으로 끓여서는 인정욕구와 자아 실현과 신성에 대한 욕망이라는 고명으로 장식한 다음, 외모지상주의를 조미료로 뿌린 뒤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라는 그릇에다가 퍼담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모든 여성들이 역사에 길이 남을 안온 다정 무해 삼신기의 성인이냐. 그렇지 않다.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라서, 여성인 동시에 사람이라서 그럴 수는 없다. 누군가를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곧 그에게도 그 자신의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등장인물들은 차마 돌아서지 못하는 용기를 보이거나 어리석은 경멸에 마음껏 비웃음으로 받아치고, 가시덤불을 온몸으로 헤쳐나가는 용사가 된다. 그뿐인가, 이해라는 이름의 욕심으로 파탄에 이르기까지 한다.

웃고 우는 여성들, 그 모든 것은 수차례 말했듯이 그들을 사람으로 인정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온전한 그들의 선택이 아닌 이유로 뭉뚱그려져 배경 어딘가에 욱여넣는 것이 아니라.

p.134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외국인인 적 없었으나 이방인 노릇은 이골이 났다. 선희의 얼굴이 곧 자격증이었다. (...) 선희는 이 땅에서 태어난 프로 외국인이었고 심심하면 불려나가서 외국인 대표 노릇을 해온 처지였다.


각각의 수록작들은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오래된 토대에 쌓아올린 작금의 현실을 마주하노라면 지금이라고 달라진 게 있나,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달라졌다. 적어도, 지금의 여성들은 이 고통스럽고 울화통 터지는 세상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알고 있다.

이전까지의 세계에서 어떤 이들에게 여성은 무능하고, 연약하고, 아둔한 존재였다. 부속과 도구 이외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그것은 비단 여성이라는 속성 뿐만 아니라 모든 소수자성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능하고 연약하며 아둔해야만 했던 이들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치열하게 부정할수록, 필사적으로 깔아내리고 밀어낼수록 그들은 끈질기게 살아남고 지워질 수 없는 존재의 지위를 공고히한다. 죽임당한 여성이 마녀로 돌아왔듯이.

p.208 “대칸이 저를 좋게 본 건 제가 서른 명을 때려눕혔기 때문이고, 공주라 부르고 융숭하게 대접하는 건 장차 개놈들고 싸워 이기라는 것인데 제가 누구에게 맞아들여지고 누구에게 지켜져서야 되겠어요?”


보라, 가능성을. 들어라, 살아 숨쉬는 이들의 박동을. 그 끝이 사랑, 자유, 파국, 때로는 촌극일지라도 그들은 이제 와 세삼스레 인간이다. 처음부터 그러했듯이, 그리하여 영원히.

p.170 경제적 주체로서 행동하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는 삶의 부박함이 야속하다고 모른 척하기도 어려웠다. 자식이 죽었거나 말거나 선희 삶은 이어젔다. 딸애를 따라가고 싶지도 않았다. 죽는 것도 작심해야 이루어지는데 그런 일을 할 기운도 없었다.

p.227 너른 초원에는 칸들이 거지반 죽고 칸국들의 연합이 와해되었으며 속민들에게는 주인이 없게 되었고 부족들에는 남자가 적어졌습니다. 그러나 여자들과 아이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들판과 산과 호수도 전혀 적어지지 않았으므로 남아 있는 가축들이 그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충분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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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를 해부하다 - 〈키스〉에서 시작하는 인간 발생의 비밀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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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 하면 떠오르는 작품은 많은 경우에 〈키스〉가 아닐까. 황금빛 강물같은 옷자락에 휘감긴 연인, 그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세상을 잊고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 어떻게 제목마저 ”키스“일까. 벅차오르는 것 같기도, 꿈꾸는 것 같기도 한 표정, 마음처럼 온 몸을 쏟아부어 기대는 연인.

이것만 보자면 클림트의 작품세계는 지극히 낭만적이고 몽환적인 것만 같다. 공중을 부유하는 마음으로 살았을까. 과연 그럴까. 인생의 곳곳에서 상실과 비탄을 마주해야만 했던 그의 세계가 그토록 아름답고 신비스럽기만 했을까. 혹은, 매일같이 세상을 뒤집는 발견이 쏟아져나오던 때의 정신이 그저 영원불멸한 꿈에 젖어있기만 했을까.

클림트가 태어나 자라고 활동했던 시기의 유럽은 가히 전 분야의 격동기라 불려도 과언이 아닌 시기였다. 넓게는 1880년에서 1920년, 좁게는 1890년에서 1918년을 일컫는 ‘빈 1900’, 바로 그 때의 오스트리아에서 집어삼킬듯 나날이 쏟아져나오는 새로운 깨달음과 발상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자. 로댕, 아르투어 슈니츨러, 카를 크라우스, 슈테판 츠바이크, 아놀드 쇤베르크, 에곤 실레,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모리츠 슐리크, 마르틴 하이데거, 에른스트 마흐, 구스타프 말러, 지그문트 프로이트, 찰스 다윈...

이름만 들어도 탄성을 자아내는 쟁쟁한 이들이 별처럼 많았던 시기, 앉은 자리에서 다 말할 수도 손꼽아 세자니 손발을 모아도 모자랄 만큼 쏟아져나오던 바로 그 시기이다. 이렇듯 클림트의 세계는 전 분야에 걸쳐 폭발적인 발전과 참신함이 양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평생 안주를 몰랐던 화가, 죽기 직전까지도 도전과 탐구를 멈추지 않았던 클림트의 그림에서 동시대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을까? 그의 그림에 예술-신비 너머의 것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단언할 수 없지 않은가?

p.28 ‘빈 1900’은 건축, 디자인, 회화, 문학, 정신분석, 음악, 철학, 정치, 경제학 등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찍는 사상과 인물들을 대거 배출한, 그야말로 ‘문화적 생산성이 대단한’ (...) ‘빈 1900’은 모더니즘을 이끌어낸 시공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과연 그러하다. 무심코 무작위적인 패턴의 일부로 여기고 지나칠만한 요소들에는 인간의 발생과 존재에 대한 수많은 고민과 영감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있다. 클림트의 작품은 생물학에 대한 은유로 가득하다.

당시 학계의 중심에 대학이 있었다면, 문화예술계의 주축은 ‘살롱’이었다. 의사, 예술가, 작가, 음악가, 철학자 등 다양한 분야 종사자들이 교류하던 그곳에 클림트라고 예외었을까.

그는 주요 멤버로 활동하던 살롱의 주인 베르타 주커칸들의 소개로 1903년 주커칸들 교수의 ‘예술인을 위한 해부학 강의’에 참석해 인체 구조와 조직, 정자와 난자로부터 발생하는 인체의 신비에 눈을 뜨게 된다.

p.129 생명 탄생의 신비를 신의 뜻으로 설명하는 기독교적인 사고와는 달리, 클림트의 〈의학〉에서 인간을 창조하는 장면은 (...)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어버이로부터 태어나며, 핵심은 여성이고, 자궁임을, 따라서 여자가 생명 창조의 핵심적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당시 과학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다윈의 진화론, 독일의 다윈이라 불린 헤켈 교수의 조직학과 함께 그의 창작관에 깊은 영향을 남겼음에 틀림없다. 그 증거로 작품 곳곳에서 다양한 포궁, 양막, 세포조직 모티브를 찾아볼 수 있다.

기존의 신학적 관념과 신의 신비로 존재했던, 설명할 수 없는 불변불가침의 존재로서의 인간상을 탈피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자 했던 클림트의 그림에는 존재에 대한 경이와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것은 그의 일생 전반을 지배한, 고통스러웠던 상실을 포함한다. 그러나 좌절과 무력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서 인간은 생명이고, 살아있는 존재이다. 자연의 일부이며, 지극히 유한한 동시에 영원을 꿈꾼다.

p.217 〈생명의 나무〉는 헤켈의 ‘생명 계통수’로부터 디자인적 측면이나 과학적인 관점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 생명의 나무 가지 형태는 클림트의 〈키스〉, 〈희망Ⅱ〉, 〈죽음과 삶〉 등의 작품에도 나타난다. 이것은 인간은 자연계를 구성하는 다양한 생물 중 하나이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메시지의 상징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된, 경이롭고도 한없이 초라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마주한 클림트의 작품을 과학의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보물처럼 숨겨놓은 수많은 상징과 메시지를 하나하나 발견해가며 감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보이는 것 이상의 충격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신비와 초라함, 인간 존재의 경이와 덧없음이라는 모순을 평생토록 끌어안고 살아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쇠락의 문턱에 선 시대에서의 지식인과 예술인들의 고뇌를 살펴보기를, 또한 그들의 내면에서 경이와 공포와 희망을 마주하기를.

p.274 리베라가 활동했던 시기엔 많은 백신이 보급되기 시작했고, (...)미생물과 면역학 연구를 통해 감염병에 관한 이해가 증진되어 감염병으로부터 인류를 지킬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 그 결과 리베라의 그림에는, 태아를 위협하는 많은 미생물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의학의 도움을 받아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것이고 또 아이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들어있다.


*한겨레출판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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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 나의 생존과 운명, 배움에 관한 기록
임승남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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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뭔가 배워야 한다든지, 고난을 보상할 누군가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어째서 그것이 개인의 탓으로 떠넘겨지는가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단순한 성공담으로는 읽을 수 없다. 다 잘 되었으니 그걸로 그만이라든지, 이렇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렇지 못하는 이는 게으르고 ‘구제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이를 좀처럼 고운 눈으로 볼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책의 저자 임승남은 출판사 대표 출신이다. 다른 사업도 아니고 출판사라니, 그것도 이제는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안다는 곳의 대표였다니 먹물 깨나 먹은 이가 아닌가 싶겠지만 그에게는 사뭇 다른 과거가 있다. 전과 7범, 그것도 강도, 절도, 폭행을 주로 하는. 번듯한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쓸 줄 알게 된 지 그리 오래 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탄식을 자아내고 마음을 울리는 명절 특선 영화처럼 대의가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숭고한 이상이라도 있었느냐 하면 글쎄, 아마 생의 절반 이상을 그렇지 않은 채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데도 어째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사는 일이 다 그렇듯 얼레벌레 뚝딱 이루어진 게 아닌가 묻는다면, 그가 처했던 현실이, 그가 손 쓸 틈도 없이 내던졌던 유년기의 세계가 그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쟁고아 출신, 무학에 가까운 학력, 툭하면 사람 패고 강도질해서 교도소나 들락거리는 사회부적응자, 실패한 인간, 거렁뱅이... 그가 숱하게 받았을 멸시에는 사회의 책임이 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버려두었던 시간들이 있다.

혼란통에 누구는 안 힘들었나, 하지만 재기를 기다려주지 않고 말 그대로 굶어죽는 사람을 스쳐지나간 부유한 인간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사회가 묵인하는 동안 수없이 태어나 밀려나고 죽어온 사람들에 대해 사회의 책임이 없었던 때는 단연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p.26 쫓아내고 쫓아내도 배고픈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집 안으로 들어가 아무데나 벌러덩 드러눕기도 한다. 때리든 말든, 굶어죽게 생겼으니 차라리 잡아가서 관밥이라도 달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린다.


그가 살아낸 시대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교과서 속에서나, 어쩌면 이전 세대의 회고로나 들어왔을 재앙같은 시기였다. 수틀리면 끌려가 고문당하고 쥐도새도 모르게 존재가 지워지는 일이 흔했다. 하루 굶으면 다행, 죽지나 않으면 그럭저럭 사는 인생이 숱했다. 그는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그가 오롯이 자기만의 힘으로 살아왔다면, 또 누군가를 도울 힘이 있었을 때 마땅히 손을 뻗지 않았다면 아마 익명의 무언가(사람도 아닌)로 남았거나 그마저도 남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 뜻이야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성공보다 도움을 읽어내기를 바란다.

저자가 낱낱이 고백하는 이전의 삶,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간들에서 나는 지금을 본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내가 모른다고, 아니, 알고 싶지 않다고 외면하는 세상에 수많은 임승남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p.140 한 할머니가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 소년의 손에, 그것도 허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건네주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몽둥이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나는 그 소년과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시인의 글에는 "아무도 온정을 베풀지 않는다면"이라는, 성립될 수 없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 나는 비로소 펜이 총칼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다보면 정말, 세상이 온 힘을 다해 나를 떠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겪은 작은 고난들에도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고 또 막막했다. 하물며 사회에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은, 나라가 나서서 그 존재를 부정하고 몰아내려는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그저 절망만은 아니다. 두 발로, 온 몸으로, 수치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기어나오는 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저자에게서 나는, 굴하지 않는 용기를 보았다. 가벼운 말로나 회자되는 것이 아닌, 세월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터득한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중요함을 보았다.

p.144 인간쓰레기들은 나처럼 교도소를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는 이들뿐인 줄 알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 이 사회의 담장은 나 혼자 잘해서 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담장 자체가 아예 보이지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더 큰 절망에 빠뜨렸다.


한 해의 끝, 없는 사람 살기에 이만큼 고달픈 것도 없다는 겨울의 한가운데를 향해 가는 이 시점에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묻고 또 물으며 읽었다.

그 자신의 역사로, 살다보면 희망이, 그것도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희망이 있다고 몇 번이고 증명해내므로, 나또한 어두운 시대에도 한 줄기 희망이 있다고 믿어보련다.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 모두의 희망,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희망을 놓지 않으련다. 해봐야 한다.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믿어봐야 한다. 우리, 수많은 평범한 이름들에게 달리 선택할 바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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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외출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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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썩 옳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이 말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아, 정말 짜증나게 오만한 인간이다.

닿을 수 없는 사랑을 생각한다.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도. 사람은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어떤 지점에서는 영원히 닿지도 알 수도 없는 것이 사람 아닌가. 그것은 사람의 물성, 아니, 마음의 본질적 속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사람을 말 그대로 뒤집어 까본대도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마법같은 일들, 그러니까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바깥에서 들여다 볼 수 있는 방법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도 마음만은, 최후의 내실은 그 주인이 문을 열어 환대하지 않는 한 엿보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뿐인가, 상대를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로, 그 자체의 대체할 수 없는 유일성을 오롯이 끌어안는다고 여겨지는 사랑(일단 그렇다고 치자), 그조차도 결국 나만의 것이 아닌가? 살아서도 죽어서도, 사랑하는 이와 눈을 맞추고 껴안아 심장을 맞댄다 하더라도 그것은 영영 닿을 수 없는 거리를 포함한다. 말해지는 마음조차도 온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의 고통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가질 수 없음을 가졌다고 확신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혹은 그 소유할 수 없는 존재의 소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완전히. 그것이 고통의 시발점인 동시에 사랑의 환상이다.

그러나 사랑은 환상 없이 불붙지 않는다. 이 모순들이 비끼고 부딪히며 고통의 화음을 이룬다. 시간이 흐르고 사그라들 때에야 겨우 받아들일 수 있을런지 모른다. 그 때에도 그것은 사랑인가?

아마도. 그래야만 한다면. 적당한 눈가림이 꼭 기만은 아니듯이, 알지도 못하는 새 서로가 서로를 비껴도는 별들이 꼭 이별은 아니듯이,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라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왜 이렇게 짜증을 내며 읽게 되었는가, 혹은 가슴을 두드려가면서도 잊지 못해 도로 집어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나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것 좀 한 마디 해주면 안 되나? 어렵지도 않은 거, 한 번쯤 기다려주고 맞춰주면 어디가 덧나나? 안다. 이것이 상대의 명징하고 매끄러운 세계에 받아들여질 수 없는 억지라는 것을. 안다. 성숙하지 못한 마음임을.

그러나 사랑은 퇴행이다. 서로에게서 어떤 안식을 찾는 것은 본능적인 퇴행이고 짐승과도 같은 욕구이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또한 짐승이기 때문에.

누구도 잘못되지 않았다. 누구도 악하지 않으나 동시에 그 누구도 성숙하지도, 자기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서로가 자기의 영역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려 애썼기 때문에. 그래서 끔찍하게도 오만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 아닌가. 합리적이나 합당하지는 않은 동물. 전자는 내면을, 후자는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논리다. 사랑은 관계의 영역이다. 이 지점에서 앞서 수차례 말한 모순과 고통이 창출된다.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이 물음에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살던 대로 살면 그렇게는 못 한다는 마음이 조금쯤 묻어있는 말이다. 할 수 없는 것, 닿을 수 없는 것, 마주하고 끌어안아도 영영 가질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것을 어떻게 삶에 받아들일 것인가?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이들은 주인공도, 주인공의 기록도, 그의 사랑과 고통과 좌절과 환희와... 그것을 읽는 이들의 마음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배척당한 채로 공존한다. 지고의 합일을 꿈꾸며. 이 슬픈 존재들.

마음껏 아파하고 연민하되 동정하지 말기를. 이름을 밝히지 않을 그 사람을 읽어나가기를. 그림자를 덧그리기를. 이미 떠나간 자리에서 흔적을 더듬어나가기를.

그렇게 오만한 독자가 슬픔에 홀로 남겨지기를 바라며, 먼저 걸어간 망므을 남긴다. 이만, 슬퍼하는 사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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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조르주 페렉 지음, 김용석 옮김 / 신북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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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시간은 새벽 3시 10분, 오밤중에에 글을 쓰고 있다는 건 오늘도 질 좋은 수면은 커녕 잠시간의 절전모드에도 실패했다는 뜻입니다.

한참을 뒤척이고 좋다는 건 다 해봐도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날엔 차라리 일어나버리는 것도 방법이지요. 깨어있는다고 퍽이나 별다른 일을 하지는 않겠지만. 창밖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군요. 이곳의 날씨는 자주 궃습니다. 툭하면 흐리고 땅이 젖기 마련이지요.

다시금,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5분. 새들도 아가양도 다 자는 이 시간에 아직도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오늘 밤은 하얗게 지새우기로 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날엔 언젠가의 기억을 꺼내 찬찬히 들여다보곤 합니다. 별 것 아니던 풍경들, 경탄이나 유별난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던 느리고 지루한 기억들. 오가는 사람, 드문드문 들려오는 새 소리, 대충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게 되는 엔진 소리...

비단 잠 못 드는 날뿐만 아니라 가물거리며 환상의 경계를 넘는 때에도, 문득 모든 감각이 선명하게 범람하는 시간에도 때때로 찾아오는 이 경험은, 지각 세계를 일시에 흔들어놓는 압도 혹은 붕괴와는 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배경과 나의 분리, 투명한 공기방울 같은 것으로 둘러싸인 나와 그 밖의 모든 세계라는 유리화의 경험이라고나 할까요. 모든 것을 포착하고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지금 여기 이 행위에 영원히 새겨보려는 시도는, 그래요. 시선의 경쟁, 나와 타자의 영원한 줄다리기를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기, 한 자리에 정물처럼 놓여 모든 것을 전경으로 끌어오려는 시도, 제목처럼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는 어쩐지 슬픈 구석이 있습니다. 저자 또한 그러했는지는 알 방도가 없지만요.

어쩌면 나는 은연중에, 모든 것을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생각보다 빠르고 분주합니다. 오가는 사람이 없어도, 같은 시간에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일상의 편린을 반복해 드러내보이더라도.

세상은 필연적으로 미끄러지고 흘러넘치거나 채 인상이 되지 못한 잔상만을 남기고 지각 너머의 세계로 흩어져버리고는 하지요. 묻고 싶어집니다.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 지각에 포 착되는 모든 것을 채집하는 것과도 같은 이 시도에는 의미가 있을까요? 찰나에 휘발되는 감각과 인상들을 그대로 모아두려는 시도는 무엇을 닮은 걸까요?


마지막으로, 지금 시간은 새벽 4시가 조금 안 되었고요, 머지않아 해가 뜨고 하루가 시작될 것입니다. 이 글도 금방 잊히고 한구석에 밀려나 존재조차 희미한 기억이 될 테고요.

언젠가, 잠들지 못하는 어느 날에 다시금 책상 앞을 떠나지 못한다면,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게 된다면 다시금 이 글을 불러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 날도 필사적으로 모든 것을 붙잡아 내리누르고 여기에 있으라, 애를 쓸 지도 모르겠고요.

그러나 언젠가, 어느 곳에서 이 글을, 이 책을 떠올린다면 저자를 따라 어느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도착지를 모른 채 힘껏 내달린 후의 나른한 탈력감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모쪼록 해가 저물어가는, 도시 한 켠의 느긋한 오후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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