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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 나의 생존과 운명, 배움에 관한 기록
임승남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다산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뭔가 배워야 한다든지, 고난을 보상할 누군가의 은총이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어째서 그것이 개인의 탓으로 떠넘겨지는가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단순한 성공담으로는 읽을 수 없다. 다 잘 되었으니 그걸로 그만이라든지, 이렇게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렇지 못하는 이는 게으르고 ‘구제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이를 좀처럼 고운 눈으로 볼 수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책의 저자 임승남은 출판사 대표 출신이다. 다른 사업도 아니고 출판사라니, 그것도 이제는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안다는 곳의 대표였다니 먹물 깨나 먹은 이가 아닌가 싶겠지만 그에게는 사뭇 다른 과거가 있다. 전과 7범, 그것도 강도, 절도, 폭행을 주로 하는. 번듯한 학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자기 이름조차 쓸 줄 알게 된 지 그리 오래 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탄식을 자아내고 마음을 울리는 명절 특선 영화처럼 대의가 있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숭고한 이상이라도 있었느냐 하면 글쎄, 아마 생의 절반 이상을 그렇지 않은 채 살아왔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데도 어째서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사는 일이 다 그렇듯 얼레벌레 뚝딱 이루어진 게 아닌가 묻는다면, 그가 처했던 현실이, 그가 손 쓸 틈도 없이 내던졌던 유년기의 세계가 그 자신의 책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쟁고아 출신, 무학에 가까운 학력, 툭하면 사람 패고 강도질해서 교도소나 들락거리는 사회부적응자, 실패한 인간, 거렁뱅이... 그가 숱하게 받았을 멸시에는 사회의 책임이 있다. 그렇게 될 때까지 버려두었던 시간들이 있다.
혼란통에 누구는 안 힘들었나, 하지만 재기를 기다려주지 않고 말 그대로 굶어죽는 사람을 스쳐지나간 부유한 인간이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사회가 묵인하는 동안 수없이 태어나 밀려나고 죽어온 사람들에 대해 사회의 책임이 없었던 때는 단연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p.26 쫓아내고 쫓아내도 배고픈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집 안으로 들어가 아무데나 벌러덩 드러눕기도 한다. 때리든 말든, 굶어죽게 생겼으니 차라리 잡아가서 관밥이라도 달라는 식으로 배짱을 부린다.
그가 살아낸 시대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교과서 속에서나, 어쩌면 이전 세대의 회고로나 들어왔을 재앙같은 시기였다. 수틀리면 끌려가 고문당하고 쥐도새도 모르게 존재가 지워지는 일이 흔했다. 하루 굶으면 다행, 죽지나 않으면 그럭저럭 사는 인생이 숱했다. 그는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그가 오롯이 자기만의 힘으로 살아왔다면, 또 누군가를 도울 힘이 있었을 때 마땅히 손을 뻗지 않았다면 아마 익명의 무언가(사람도 아닌)로 남았거나 그마저도 남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 뜻이야 어쨌든 나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성공보다 도움을 읽어내기를 바란다.
저자가 낱낱이 고백하는 이전의 삶,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간들에서 나는 지금을 본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내가 모른다고, 아니, 알고 싶지 않다고 외면하는 세상에 수많은 임승남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가.
p.140 한 할머니가 100원짜리 동전을 꺼내 소년의 손에, 그것도 허리를 숙여 조심스럽게 건네주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몽둥이로 세게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지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나는 그 소년과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시인의 글에는 "아무도 온정을 베풀지 않는다면"이라는, 성립될 수 없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 나는 비로소 펜이 총칼보다 더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다보면 정말, 세상이 온 힘을 다해 나를 떠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겪은 작은 고난들에도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괴로웠고 또 막막했다. 하물며 사회에 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은, 나라가 나서서 그 존재를 부정하고 몰아내려는 이들은 어떠하겠는가.
그저 절망만은 아니다. 두 발로, 온 몸으로, 수치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기어나오는 그의 삶을 배워야 한다. 저자에게서 나는, 굴하지 않는 용기를 보았다. 가벼운 말로나 회자되는 것이 아닌, 세월을 온몸으로 겪어내며 터득한 ‘꺾이지 않는 마음’의 중요함을 보았다.
p.144 인간쓰레기들은 나처럼 교도소를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는 이들뿐인 줄 알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나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 이 사회의 담장은 나 혼자 잘해서 되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담장 자체가 아예 보이지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더 큰 절망에 빠뜨렸다.
한 해의 끝, 없는 사람 살기에 이만큼 고달픈 것도 없다는 겨울의 한가운데를 향해 가는 이 시점에 나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묻고 또 물으며 읽었다.
그 자신의 역사로, 살다보면 희망이, 그것도 사람이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내는 희망이 있다고 몇 번이고 증명해내므로, 나또한 어두운 시대에도 한 줄기 희망이 있다고 믿어보련다.
나의 희망, 우리의 희망, 모두의 희망,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이들의 희망을 놓지 않으련다. 해봐야 한다.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믿어봐야 한다. 우리, 수많은 평범한 이름들에게 달리 선택할 바가 없지 않은가...